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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이방원, 시작부터 썩었던 조선 왕조의 뿌리.

 각종 비리와 실정, 폭정 끝에 분출하는 국민의 불만 속에 싸드 배치, 개헌 논의까지 겹치면서 나라가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이런 시국을 조선 초기와 빗대며, 이방원의 쾌도난마가 필요한 때라는 입론이 들려온다. 참으로 어이없는 이런 반응은 이방원의 본색을 전혀 모르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에 다시 한번 태종 이방원의 전모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뒤끝 작렬, 이방원의 민낯..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정권욕에 희생된 사람은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아버지 주위의 지인이자 불사의 충신이라던 정몽주, 김종서, 조선 건국의 대들보라 할 정도전을 비롯, 배 다른 동생이자 당당한 왕세자였던 방석과 방번까지도 비참하게 그의 손에 죽었다.

 나중에는 이방원의 셋째 아들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던 심온이 자신의 행동을 불평한다며 사사시켰다. 이런 피비린내의 중심 이방원의 족적이 당시 복잡한 정세때문이었고, 왕권을 사수하기 위해서였기에, 결론적으로 신생국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순기능이 더 켰다고 왕조실록을 참조해가며 주장할 수도 있다.
 
 어쩌면 조선 건국후 방방곡곡의 모든 "왕"씨를 찾아 고려의 뿌리를 완전 박멸하여 전국을 피로 물들게 했던 태조 이성계였으니 그의 아들 방원이  보고 배운 것이 무엇이었을까하며 동정의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원은 한 수 더 떠 충신, 심복,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식 세종의 장인인 사돈까지 처단하며,  잔학했던 애비를 넘어서 대단한  '승어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왕조실록이외의 다른 자료까지 종합해 재구성한 현실 속 이방원의 진실은 통설과는 정반대에 가깝다. 병든 자신의 아버지를 만만히 보고 밀모를 조작하여 동생 둘을 죽였으며, 이런 패륜에 대노한 아버지를 위협해 왕권을 내려 놓게 한 후, 형 방과를 허수아비 왕 정종으로 내세웠으며, 억지로 바지저고리 왕이 되었지만 동생에게 살해당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정종이 결국 떨리는 손으로 양보한 왕권을 챙긴 악당이었다.

 악행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왕세자의 어머니이자 서모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조선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강씨는, 사후에 이루 말로 못할 망신과 수모를 겪게 된다. 이 한가지 만으로도 그는 천추의 패륜아이자 유교국가를 표방하던 조선을 뿌리채 뽑아버린 장본인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사심불구, 말은 공자 말씀이지만, 그 속은 뱀같던 언행불일치 무뢰배의 손아귀 속에서 모순 속에 지탱되었던 기이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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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의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둘째부인 강씨는 세자로 책봉되었던 자신의 아들이 방원에게 죽기 이태 전(1396)에 다행히 세상을 떴다. 강씨를 총애했던 이성계는 경복궁 발치인 지금의 중구 정동에 왕비의 정릉을 마련하고 재궁 기능을 할 절, 흥천사를 능 동쪽에 대단한 규모로 지었다. 정무 중에도 수시로 정릉과 흥천사를 둘러보러 나가는 통에 대신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전해질 정도로 이성계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런데 애비가 죽고나서 명색 왕비릉인 정릉 일대를 부지가 너무 넓다는 구실을 대며 농토로 허용해 욕보이더니, 결국 방원이 왕이 되고 9년 되던 해(1409), 아버지 이성계가 졸한지 채 아홉달을 넘기지 않은 때에 그마저 더 이상 못보겠다는듯이 동대문구 안암동으로, 다시 핑계를 대어 더 멀리 떨어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한다.

 이 와중에 묘지의 석물을 들어내 청계천 광통교 다리에 재활용해 온 장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는 일체의 제사와 관리를 중단해 버리니, 능은 피폐해져 폐허가 되었다. 폐비가 아닌 멀쩡한 왕비가 죽은 후에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은 아마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그의 의지가 대단했던지 260년 동안 역대 어느 왕도 감히 정릉의 참배, 관리에 나서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선조 때 '쑥대밭같은 그 자리가 왕비릉인 것같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을까?  예의를 숭상하는 이왕조의 건국이념이라던 유교 왕국의 모든 사람이 500년 역사의 절반이 지날 동안 이런 패륜에 모르쇠하며 눈감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선왕 이성계가 경복궁 바로 옆 정동에 왕비의 정릉을 마련한 이유는 바로 그 옆에 자신이 묻히고자 함이었으되, 방원은 이를 무시하고 따로 자리를 보아 지금의 동구릉에 애비를 장례 지낸다. 뭐가 그리 보기 싫었던지 이성계의 능을 돌보던 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대략적 위치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명색 나라를 건국한 왕의 능을 돌봐야할 원찰이 이리 망해버린 것은 나라의 기강은 접어두고라도 바로 자식이 불효한 결과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방원은 서모 뿐 아니라, 그 서모를 사랑했던 자신의 애비에게마저도 뒤끝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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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때(1669)에 이르러서야 예송논쟁 중이던 송시열의 주장으로 비로소 정릉은 왕비릉으로 복귀되어 제례가 가능해지고, 왕비는 종묘에 배향되었다. 무려 260년 동안 15대의 왕 어느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이 부조리한 집안 내력은 오로지 이방원의 뒤끝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이 내세워 허수아비 왕을 만들었던 친형, 방과는 사후에는 공정대왕이란 어설픈 칭호로 왕의 존호를 받지 못한 채 무시되다가, 이 또한 15대가 지난 숙종 때(1681)가 되어서야 "정종"이라는 존호를 받게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었던 사람,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포함해, 서모였던 신덕황후 강씨, 자신의 친형인 정종 방과. 이 모두를 눈에 가시로 짓밟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오기와 패륜을 왕권강화란 명분으로 덮어서야 어찌 세상에 도의와 윤리가 서겠는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씨 왕조의 마지막 27대 순종의 왕비 순정황후 윤씨는, 가난에 찌든 채 갈 곳없는 몸을 정릉 흥천사 방 한칸에서 기숙하며 연명하다가 왕가의 최후를 마감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비가 밀려 쫓겨갔던 정릉을 관리했던 바로 그 절에서 조선 최후의 왕비가 생을 마감하는 극적인 역사가 이뤄진 셈이다. 참으로 얄궃은 집안 내력다운 결말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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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흥천사 역사:
 1398년 정종 때 완공된 중구 정동의 흥천사는, 정동에 있던 정릉이 미아리로 이장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170칸이 넘는 규모로 승려 140명 이상이 머무는 대찰로 유지되다가 연산군 때(1504) 큰 화재를 겪고, 중종 때(1510) 유생들의 방화로 폐사된다. 절에 있던 큰 종은 동대문을 거쳐 지금은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본디 미아리 정릉 근처에는 신흥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 데, 이를 선조 때(1576)에 신흥사로 개칭하고, 현종 때(1669)에 정릉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하여 약간 옮긴 후 정릉의 원찰로 지정한다.  정조 때(1794) 다시 자리가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고종 때(1865) 이르러 대원군의 지원으로 중창하면서 비로소 "흥천사"란 휘호를 내려 원래 명칭을 회복했다. (얼마전까지 "미아리 신흥사"로 불리며 유명했던 회갑연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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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최후의 퍼스트 레이디, 순종의 왕비, 순정황후 윤씨:
 625전쟁 피난 후 서울로 환도하면서 흥천사에 "대지월"이란 법명으로 얹혀 살게 된다."하루 양식 한 홉으로 두끼를 먹었는" 데도 그것을 아껴 향과 초를 사들고 흥천사에서 예불을 드렸다는 일화가 있다. 선영의 죄과를 받은 것인지 결국 멸문에 이르른 왕가의 마지막 회한을 윤씨는 정릉의 원귀 강씨와 나누려 했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이승만 등의 독재정권이 정당성 시비를 회피하려 그랬는지 의도적으로 왕가를 흘대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윤씨는 1966년(71세)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쓸쓸히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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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황후 강씨.
 조선이 개국하기 1년 전(1391)에 방원의 모친이자 이성계의 첫째 부인으로 함경도 영흥에 머물고 있었던 한씨가 별세한다. 1년 후, 조선 개국(1392)의 중심지 개성의 권문세족 집안 출신으로 영흥의 향처에 대비되어 서울(개성)의 경처로 불리던 강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어 등극한다.
 이런 강씨를 못마땅히 여긴 한씨 소생의 아들 방원이 강씨의 정릉을 외진 곳으로 이장하고 석물을 광통교 다리에 활용한 패악을 저지른 후 자신의 만행을 합리화시키려고 입에 혀같던 신하와 벌인 수작(1416)이 역사에 기록되어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왕 (태종 이방원) : 계모란 뜻은?
   신하 (좌의정 유정현): 모친 사후에 들어온 새 모친을 말합니다. 

왕 : 그러면 강씨는 내 계모인가?
    신하: 생모께서 살아계셨을 때 들어 오셨으니, 계모라 할 수 없습니다.

왕: 그렇구나, 강씨는 내게 전혀 은의가 없다.
      나는 친모 집에서 자랐고, 장가 들어서도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혜가 있겠는가? 
     (태종실록: 1416년 8월 21일)

 이 따위 아전인수 문답으로 이방원의 총애를 받던 유정현은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그는 본디 정몽주의 수하로 귀양까지 갔던 고려의 중심 관리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란이 성공하자 전향했고, 조선 초에 아들 둘을 과거에 급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관직에 다시 등장한 후,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을 처치하는 데도 활약하는 등의 대단한 충성심으로 이방원의 수족 노릇을 했다.

가히 그 왕에 그 신하의 문답이지만, 여기에서 유교의 근본, 충효와 인의예지신을 찾을 수는 없다.
 이방원의 진면목을 두고, 나라를 근심하는 만 백성의 어버이라기 보다는.. 불구사심, 부처의 말을 읊조리나 속에는 뱀이 들어있었다 할 지경이었다면 심한 말일까?  그렇게 시작된 조선왕조가 주기적인 왕권다툼의 피비린내로 얼룩지다가, 결국은 마지막 왕들이 외세의 침략 속에 독살 당하는 비극으로 문을 닫은 것은 사필귀정, 원형이정의 실현이었을 수도 있다.


정릉: http://www.seongbuk.go.kr/tour/tourism/sights/jeongreung.jsp

흥천사: http://www.seongbuk.go.kr/tour/tourism/temple/heungchunsa.jsp

조선 왕 중에, 속 편히 임종한 사람이 없었다..
http://todayinfo.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8/20160808026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