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ed By Blogger

2020-12-07

적폐의 핵심, 검찰개혁에 동참하기를 온 나라 양심세력에게 읍소합니다.

나라를 바로세우려는 검찰개혁이, 사이비 언론과 적폐 잔당들의 공작으로  
마치 추미애 법무장관 대 윤석열 검찰 총장의 대결로 격하되고 호도되는 이 때. 

참다 못한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과 사제들이 나섰습니다. 

사기꾼 목사 전광훈 덕에 면목이 없다며 말을 아끼던 양식있는 기독교인들도 동참합니다.  현 정권이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고, 우리가 꿈꾸던 최선의 정부까지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까지의 족적으로 보매 촛불로 살려낸 작은 불씨가 살아있음은 명약관화합니다. 지지율 40%가 그 증거이고, 떨어지는 지지율은 어쩌면 이렇게 지지하는 국민의 여망을 대차게 실현하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데 대한 회초리일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이승만 12년, 박정희 18년, 전두환 12년의 독재 폭압정권들의 충견들이 여전히 득시글대는 검찰. 안하무인 무소불위 권력 적폐가, 국민의 소명인 개혁을 피하려 앞뒤 가리지 않고 막장극을 펼치는 중입니다. 
양두구육의 무리들이 새로 일어서려는 나라를 난장판을 만들고 
인권과 국법을 제멋대로 전횡하는 지금. 
모든 종교인들에게 다시한번 준엄히 묻습니다.
 
아담 어디에 있느냐?
 

 

천주교 사제·수도자 3951검찰개혁 촉구선언       등록 :2020-12-07

지난 1종교계 100인 선언이은 대대적 시국 참여


7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관계자 등이 검찰 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3천인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천주교 사제·수도자 3951인이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사제들은 선언 참여자를 대표해 7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정문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뒤 검찰개혁을 촉구했다. 지난 1일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종교계 100인 선언을 지지하면서 나온 천주교 성직자들의 대대적인 시국 참여다.

사제·수도자들은 선언문에서 잠잠히 고요하게 지내야 할 사제와 수도자들이 이렇게 나선 것은 숱한 희생과 헌신 끝에 이룩한 민주주의가 또다시 갈림길에 놓였기 때문이라며 지금이 아니면 문제의 검찰개혁이 영영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간첩사건 조작, 선택적 수사와 기소, 전관예우 등 검찰이 행해 온 문제점이 현재진행형임을 지적했다. 이어 이는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을 지지 않는 무제한의 권능 때문이라며 검찰 독립은 검찰의 독점권을 포기할 때 시작될 것이므로 대다수 검사의 명예와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새로 태어나는 진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선언 참여인들은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윤석열 검찰총장의 행태도 비판했다. 이들은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티끌 같은 일도 사납게 따지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검찰총장의 이중적 태도는 검찰의 고질적 악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특권층의 비리와 범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눈감아 주지만, 자신의 이해와 맞지 않으면 그것이 국민이 선출한 최고 권력이라도 거침없이 올가미를 들고 달려드는 통제 불능의 폭력성을 언제까지나 참아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검찰의 판사사찰이 드러났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는 사법부의 무기력함도 지적했다. 성명서에서 재판관 사찰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아직 뚜렷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검찰이 재판관을 압박하여 판결에 개입하는 몹쓸 행태를 무심히 바라만 보고 있다하루빨리 사법부의 권위와 존엄을 회복할 것을 당부했다.

이번 선언엔 윤공희 대주교, 김희중 대주교, 강우일 주교, 이성효 주교, 김종수 주교, 옥현진 주교를 비롯해 사제 926명과 남자수도회 소속 사제와 수사 227, 여자수도회 수도자 2792명 등 총 3951명이 함께 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

아래는 선언 전문이다.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수도자 3951인 선언

1. 잠잠히 고요하게 지내야 할 사제와 수도자들이 이렇게 나선 것은 숱한 희생과 헌신 끝에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또다시 갈림길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이라는 네 글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존과 명운을 쥐락펴락해 온 검찰의 진로가 어느 쪽을 향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며, 지금이 아니면 문제의 검찰개혁이 영영 어려울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오랜 세월 반칙과 특권에 기대어 살아온 집단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반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바를 두고 옛길과 새 길이 충돌하는 양상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고대하는 우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하시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옛길의 자취를 무시하지 않되 부디 새로운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부디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이 기뻐하고, 공동선을 위해 사랑과 봉헌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 춤추게 되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지난 121일자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종교계 100인 선언"을 지지하면서 호소합니다. 검찰은 오늘 이 순간까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참회하기 바랍니다. 오매불망 '검찰권 독립수호'를 외치는 그 심정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검찰이 권한을 남용하여 불러일으켰던 비통과 비극의 역사를 생생하게 떠올립니다.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이를 간첩으로 만들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멀쩡한 인생을 망치게 만드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가진 사람들의 죄는 남몰래 가려주고 치워주었던 한국검찰의 악행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당해 본 사람들의 눈에는 검찰이 마치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자기 손으로는 더러움을 지울 수 없음을 깨닫고 "저를 깨끗하게 해주소서."(마르 1,40 참조) 하고 무릎을 꿇던 어느 나병환자처럼 부디 용기를 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을 주권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직분으로 거듭나는 천금 같은 기회로 받아들이고, 양심에 어긋나는 악습들을 과감하게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이 출발하기 바랍니다.

3. 누구라도 가졌던 것을 내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권한들을 포기하는 일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소송 때 남을 지게 만들고, 재판하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우며, 무죄한 이의 권리를 까닭 없이 왜곡하는"(이사 29,21) 악행이 가능했던 것은 수사든 기소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고도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을 지지 않는 무제한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는 부패와 거악을 척결한다면서, 뒤에서는 현직과 전관들이 밀어주고 당겨주는 뒷거래를 일삼았을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하지만 매미 같은 미물도 때가 되면 허물을 벗습니다. 과거의 허물을 벗는 일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검찰 독립은 검찰의 독점권을 포기할 때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공익을 지키기 위해 수고하는 대다수 검사들의 명예와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검찰은 새로 태어나는 진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4.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오래 전부터 권한도 책임도 골고루 나눠서 만사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국가공동체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정의란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는,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에게 고르게 힘을 배분함으로써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도 자기를 전능하다고 여기거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의 존엄성과 권리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171항 참조) 그런 점에서 권한을 여러 국가기관에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규제하는 사법 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검찰총장이 이런 개혁 방향에 반발함으로써 스스로 최대 걸림돌이 되어버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법무부 장관이 제기한 직무배제의 여섯 가지 이유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만,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티끌 같은 일도 사납게 따지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검찰총장의 이중적 태도는 검찰의 고질적 악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특권층의 비리와 범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눈감아 주지만, 자신의 이해와 맞지 않으면 그 어떤 상대라도, 그것이 국민이 선출한 최고 권력이라도 거침없이 올가미를 들고 달려드는 통제 불능의 폭력성을 언제까지나 참아줄 수 없습니다.

5. 아울러 언론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펜과 혀는 창과 칼보다 무섭습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쏟아내는 거짓뉴스들 때문에 시민들의 영혼은 하루하루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건너야 할 다리를 힘겹게 건너고 있을 뿐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불안을 부추기고 선의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개인의 능력과 에너지를 공공재로 여길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입니다. 공동선 실현을 위한 일련의 개혁 조처들을 비웃고 훼방할 게 아니라, 혜택과 행운을 누려온 이들이 먼저 익숙한 과거와의 결별하고 낯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특권사수를 위해 결사항전에 나서도록 부채질하는 대신,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언론은 진실을 격려하고 거짓을 꾸짖는 본래의 사명을 어서 회복하기 바랍니다.

6. 사법부의 책임 또한 가볍지 않습니다.'재판관 사찰'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아직까지 뚜렷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검찰이 재판관을 압박하여 판결에 개입하는 몹쓸 행태를 무심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기득권 최후의 보루가 되겠다고 작정한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만 심지어 재판관에 대한 사찰과 정보정치를 업무상의 관행이라 강변하여도 그저 묵묵부답하는 대목에서는 불안과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하루빨리 사법부의 권위와 존엄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7. 오늘까지 제1야당은 검찰개혁을 위한 노력은 고사하고, 검찰의 일탈을 방조하거나 협력하다가 결국 대통령 2인을 감옥에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과오를 책임지는 자세로, 아울러 다시 집권해서 나라를 이끌게 될 때를 위해서라도 여당과 합심하여 검찰개혁을 거들어주어야 합니다.

8. 내년은 김대건, 최양업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의 금기를 뛰어넘어 평화와 인간존중을 소망했던 조선 첫 사제들의 정신을 본받아, 그리고 인권과 정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하다 스러져간 수많은 '김대건, 최양업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면서 사제와 수도자의 본분과 사명에 더욱 헌신하기로 다짐합니다.

9. 신앙인들과 시민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생태계 말기적 파국의 '리허설'이나 다름없는 코로나 사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야 하는 이때에 검찰개혁이라는 숙원을 놓고 분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랑과 정의, "연대와 같은 선은 단번에 영구히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쟁취해 나가는 것"(회칙 모든 형제들11)임을 되새기며 실망하지 말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의 겨울을 돌보고 저마다 역량을 다하여 정의와 인권을 회복하는 데 모든 이가 정성을 다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2020127
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을 지내며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3,95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973066.html#csidxb593d186f3fb6dcb3986042ee8a277a
tmp55B8


 

역사적 예수와 한국 교회         등록 :2020-09-22

예루살렘 사제들은 야훼를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만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현장예배를 고집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런 예루살렘 사제들과 얼마나 다른지,

교회에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수의 식탁이 보여주는 자유로우면서도 거룩한 예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교회공동체는 아프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 ㅣ 소설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 형성된 우리의 일상을 짧은 시간에 균열시킨 코로나19의 위력은, 전염병이 강요하는 거리두기가 역설적으로 삶을 성찰하게 하는 정신적 거리를 만듦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영위해온 자본주의의 삶이 지구 생태계는 물론 삶의 생태계에 얼마나 폭력적 형태였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현장예배로 방역 주체인 정부와 긴장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집단감염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현장예배를 가정예배나 온라인 예배로 대체해주기를 지속적으로 권고했음에도 일부 교회들의 현장예배 강행으로 지역사회 감염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두번에 걸친 코로나19의 폭발적 확산의 진원지도 교회였다. 그것으로 국민들이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일부 교회는 여전히 현장예배를 고집한다.

지난 827일 대통령이 개신교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한 것은 코로나19 방역 문제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이 한 말 가운데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역에 적극 협조할 것이나 교회의 본질인 예배를 지키는 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부분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교회의 존재성과 함께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곱씹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근원적 존재다. 근원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두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못에 박히는 고통을 겪었던 역사적 존재로서의 정체성과,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이 두 정체성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생명체처럼 연결되어 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가 있었기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는 십자가형으로 종결된다. 십자가형은 예수의 생애를 집약하는 본질적 사건으로, 그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라는 초월적 존재가 잉태되었다. 역사적 예수를 올바르게 보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것은 예루살렘 권력의 원천인 성전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그 부정의 극적 행동이 복음서에 기록된 성전 정화. 당시 유대의 통치구조는 종교가 곧 권력인 신정체제였다. 성전은 유대의 민족신이면서 우주의 유일신인 야훼가 머무는 집으로, 희생 제물을 바쳐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유대 신정체제의 근간인 성전 이데올로기는 죄를 병의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성전을 유일한 참배 공간이자 치유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전세계 유대인들의 성전 참배가 끊이지 않았고, 그들이 성전에 바치는 세금과 재물은 엄청났다.

성전 이데올로기는 성전에 들어오는 재물은 하느님에게 귀속된 재산이므로 세속적 목적으로 쓸 수 없게 했다. 성전과 성전 바깥의 세속 세계를 분리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성전에 엄청나게 쌓이는 재물은 성전 권력자들이 구축해놓은 부패구조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예수가 성전 뜰의 상인들을 내쫓은 것은 상인들도 성전 부패구조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권력은 예수를 죽여야 했다. 성전 권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성전 정화기록 가운데 요한복음서에 교회의 모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용이 나온다. 상인을 쫓아내는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보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예수가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대답한 뒤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21-22)

위의 구절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성전의 실체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새로운 성전이 신비스러운 것은 부활이 신비스럽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신비의 실체를 구현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노력의 구체적 형태가 교회다. 교회의 존재성은 부활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의 신비를 역사적 예수와 분리하는 순간 신비의 광채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 유일한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가버나움에서조차 머무는 기간이 짧았다. 예수의 몸 자체가 끊임없이 이동하는 교회였던 것이다. 그 교회의 식탁은 신분의 귀천을 구분하지 않았다. 상인 세리 농부 어부 노동자 대장장이 양치기 창녀 이방인에서 병든 자, 파산한 자, 버림받은 자, 누더기 걸친 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 먹었는데, 그 식탁 자체가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였다. 예수의 죽음 이후 세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가 무너뜨리고자 한 성전과, 그 폐허 위에 세우고자 한 새로운 성전사이에 세워졌고, 앞으로도 세워질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사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예수가 생명체이듯이 예수를 구현한 교회 역시 생명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인 예배도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유를 희구한다. 그런 생명체를 교회 안에 가둔다는 것은 생명체를 훼손하는 행위다. 예루살렘 사제들은 야훼를 성전에 가두어놓고 성전에서만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그것은 신앙을 독점하는 행위이자 권력을 독점하는 행위다. 현장예배를 고집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런 예루살렘 사제들과 얼마나 다른지, 교회에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수의 식탁이 보여주는 자유로우면서도 거룩한 예배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교회공동체는 아프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교회 세습도 위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교회를 생명체로 생각한다면 세습은 불가능하다. 교회를 물질로 보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물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비역사의 광채, 초월의 광채에 현혹되어 역사적 예수를 잊고 있다. 물질주의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한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광채를 잇는 다리가 십자가형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역사적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했다. 그 사람들을 쉼 없이 찾아다니는 예수의 옷과 신발은 늘 먼지투성이였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우리는 간절히 물어야 한다. 교회가 사회공동체에 끼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3204.html#csidxff65dcc99dc4077a57a8bc60bd41f64


 

종교와 정치 잘못된 결합’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입력 : 2011.05.20 20:23수정 : 2011.05.20 20:27

 

추악한 동맹존 그레이 | 이후

 

인간을 지푸라기 개’(Straw Dogs)에 비유한 학자가 있다. 2008년까지 런던정경대학(LSE) 유럽사상 교수로 재직했던 존 그레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번역·출간됐던 그의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짚으로 만든 개에 인간을 빗대며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휴머니즘)를 물어뜯는다. 그는 이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를 전면 부정하면서 호모 라피엔스’(약탈하는 자)야말로 인간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역사는 진보한다보편적 믿음에도 도리질을 치면서, 인간이라는 약탈자는 가이아(지구)의 자정 능력에 의해 언젠가 큰코를 다치고 말 거라는 경고를 보낸다.

한데 그레이는 애초에 생태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학자로서 한창 상승세를 타던 1970년대에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 진영에 발을 담갔고, 90년대에는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으로 배를 갈아 탄다. 갈지자 행보였다. 어떤 이들은 그를 좌충우돌의 경박한 학자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구의 휴머니즘을 비판하고 좌·우로 펼쳐진 모든 정치적 신념을 논박하는 그의 논지에선 일관된 흐름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기만하는 거대 담론에 대한 부정, 서구의 계몽주의 유산에 대한 불신이다.

 

<추악한 동맹>도 그 연장선에 있다. 그레이가 이번에 도마에 올린 것은 종교와 정치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둘은 끈끈한 동맹관계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신념이 정치로 옷을 바꿔 입었다는 뜻이다. 저자가 그 첫번째 사례로 지목하는 것은 급진적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프랑스 자코뱅당이다. 계몽 철학자들은 기독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싶었지만 역사를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파악하는 사관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세계는 파괴되고 새롭고 완전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정치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결국 자코뱅당은 더 고차원적인 삶이 가까이에 있다는 신념으로 폭력을 자신들의 강령에 통합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창조적 파괴라는 환상에 넋을 잃었다는 측면에서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동격으로 취급한다. 예컨대 공산주의는 역사적 유물론을, 나치즘은 과학적 인종주의를 내세웠지만 그들의 주장은 모두 사기였다는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의 볼셰비키 같은 근대 혁명가들은 전통종교를 혐오하면서도 초기 기독교의 신념을 세속적으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반혁명론자다. “역사를 변혁한다는 생각 자체가 종교에서 기인한다근대 혁명 운동들은 모두 종교의 계보를 잇는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서양정치사를 움직인 혁명운동의 배후로 두가지를 지목한다. “언젠가 이 승리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희망’, 그것을 이루기 위해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공격적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반식민주의 사상가 프란츠 파농, 마오쩌둥, 폴 포츠, 급진 이슬람 운동 등을 모두 도마에 올린다. “그 흐름들은 매우 이질적이지만, 폭력이 지닌 해방의 힘을 믿었다는 점에서 한결같이 자코뱅당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냉전의 주체들에게도 적용된다. “(냉전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공통점이 아주 많은 이데올로기 사이의 경쟁이었으며, 서로를 치명적 라이벌로 간주했던 두 이데올로기는 보편 문명의 도래를 고대하는 계몽주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때 좌파에서 나타났던 유토피아주의가 어떻게 우파를 통해 권력을 잡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한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 혁명 이후 우파는 스스로를 유토피아주의의 반대자로 규정해왔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우익 유토피아주의가) 크게 세력을 키웠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는 지난 30년간 일어난 전통적 보수주의의 몰락과 신보수주의의 발흥에 주목한다. “1980년대부터 세력을 키운 신보수주의는 과거의 극좌파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전쟁과 혁명에 불을 지핌으로써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편적 민주주의와 전지구적 자유시장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라는 거대한 정치 기획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역사적 목적론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유토피아주의에 불과하며,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망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추악한 동맹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것은 미국의 네오콘이다. “부시 대통령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뒤“(기독교 근본주의가) 미국 정치의 중심으로깊숙이 진입했으며, “9·11 이후 전방위적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저자는 종말론적 신념과 유토피아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냈던 부시의 몇몇 발언들을 지목한다. 부시는 9·11 테러 직후의 한 연설에서 요한의 묵시록과 이사야에 이르는 수많은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또 이라크 침공 몇 달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께서 알카에다를 공격하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들을 공격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담을 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저자는 일체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거부하는현실주의를 제안한다.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의 세계로 통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면서, “종교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세속적 단일체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다원화된 세계로 접근해가야 폭력의 발생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놓은 대안에 대해서조차 비관적이다.

 

실현할 수 없는 꿈에 영향을 받은 세대는 의미없는 모험을 (계속) 선호할 것이라며 폭력에 대한 제어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 스스로 회의적이다. 지식의 성장은 인간의 물적 조건을 향상시키지만 갈등의 야만성도 증폭시킬 것이라며 “(앞으로의) 폭력은 자원을 둘러싼 투쟁과 맞물리며 전개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영국의 좌파 문예이론가 테리 이글턴이 그를 대책없는 허무주의자로 지칭한 까닭은 바로 그런 태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에 쏟아진 영국 언론의 상찬은 꽤 뜨겁다. ‘가디언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면서 눈부실 정도로 불꽃 튀는 비판이라고 썼다. ‘인디펜던트역설이라는 수술용 칼로 대상을 해부하는 그레이의 글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평했다.     책의 원제는 ‘Black Mass’.     추선영 옮김. 18000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105202023415#csidxd032b7f9db47af6b8edba22ce256c07
tmp268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