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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기접놀이꾼 여현수.. 국민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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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오르면 깃끈을 부여잡고 서서히 깃발춤을 춘다. 파도를 타듯 기를 내리깔아 바닥을 쓸고 다시 세워 머리 높은 곳에서 너울너울 깃발의 물길을 연다

올해 마흔넷인 여현수가 사는 곳은 전북 고창, 토요일이면 그는 아침 일찍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향한다. 그가 차를 세우는 곳은 시청역 인근, 주말이면 단속을 하지 않는 어느 후미진 골목이다. 서울까지 오가려면 기름값에 통행료 등 돈이 제법 들어간다.
뿐인가. 서울에 도착해 서두른다고 촌에서 하는 습관으로 불법 유턴하다가 과태료를 몇 번 맞았고 차 지붕에 8미터나 되는 장대를 달고 가니 교통경찰에게 여러 번 걸렸다. 또 광화문 뒷길에 어설프게 차를 세워두었다가 주차딱지까지 집으로 날아오게 했다.
비용도 아껴야 하고 아내의 불호령도 무서운 참에 무료 주차장을 찾아낸 셈이니 반가울밖에. 문제는 시청부터 광화문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대는 둘러매면 되지만 지나는 길에 극우의 집회와 부딪힐 땐 봉변을 당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여현수가 준비를 마치고 용기를 들면 사방에서 탄성이 터진다. 드디어 대장기가 올라왔구나. 광장에 그득 찬 작은 깃발이 마치 어미새를 만난 듯 들썩인다. 12월 3일부터 벌써 4개월째에 이르니 낯익은 얼굴이 많다. 달려와 악수하고 물을 챙겨주고 요깃거리를 준다. 여현수는 고맙게 받아드나 닭이 모이쪼듯 입만 축인다. 왜냐하면 광장에 들어서면 깃발을 지닌 채 화장실을 오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도 안 마시고 끼니도 거른다. 일정이 끝난 후에도 저녁을 먹지 않는다. 갈 길이 먼데다 배가 두둑하면 자칫 졸음운전을 할까 겁이 나서다.

용기 깃발이 일으키는 물마루는 넘실대고 꿩장목은 금방이라도 차고 오르려 한다. 하늘로 날아 천지신령님에게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민초의 염원을 아뢰고 북두칠성님에게는 평화와 민주를 간구할 양이다.

용기는 깃발의 군무까지 받아안아 열길 공중에서 "윤석열을 파면하라"는 구호를 천둥소리로 만들고 "내란 세력 타도하자"라는 외침을 이 땅 어디에든 퍼지라고 쾌속 구름에 실어보낸다.

그렇게 한 겨울 광장에서 용기는, 겨레의 함성을 하늘로 땅으로 실어 내었다. 지성이면 감천 이 땅에 새 봄이 온다.

광장의 어느 화가가 여현수에게 그려준 그림,화가는 이 그림을 엽서 크기로 인쇄해 여현수에게 선물하고 시민에게 나눠줬다. ⓒ 트위터 아이디는 @jeong__sd

본디 글: 
https://www.ohmynews.com/NWS_Web/Articleview/article_print.aspx?cntn_cd=A000311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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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4

풀죽어 있을 사람을 잊지 않겠습니다. - 2025년 4월 4일, 파면 !

그러니까 정말 혹시 원하던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너무 낙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꽃은 필 거고, 날은 따뜻해질 거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가운데에서도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갈 용기는 어디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을 테니까요. 대개의 사람들이 들떠 서로를 바라보며 즐거울거로 생각하지만, 한쪽에 풀죽어 있을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의와 원칙, 풀뿌리 민주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사필귀정의 길에 함께 하지 못했던 이들도 마음을 다잡고 다같이 포근한 봄날을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한 의견과 환경이 서로에게 적대가 되지 않고 작은 아쉬움과 다양성의 희망으로 모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악이 물러가고 악당들 가려낸 자리에 선 우리 모두는 자랑스런 민주시민입니다.

오늘, 다음 주, 내달... 그리고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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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은..
당신을 물었던 뱀이
두번 다시 해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 피로 싸워 얻은
이 귀한 민주주의가
또 위협받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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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가도 파시즘은 남는다         이세영  

김수영의 시 절망은 난해한 텍스트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첫 줄에서부터 독자는 난감해진다. 너무나 자명한 듯하지만, 그 태연자약한 자명함이 오히려 읽는 이에게 당혹과 혼돈을 안겨주는 탓이다

대체 풍경이란 시각 이미지와 곰팡같은 하등 균류에게서 어떻게 고도의 정신작용인 반성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사학적 개연성에선 차라리 윤석열이 윤석열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 시절과 세태에 더 들어맞아 보인다.


윤석열이 가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이 봉인을 풀어버린 파시즘의 기운 때문이다. 파면 뒤 이어질 형사재판에서 윤석열이 내란 우두머리 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아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번 풀려난 극우 파쇼라는 악의 기운은 사회 곳곳을 배회하며 증오와 절멸의 언어로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이 창궐하는 데는 열정적 추종자도 환호하는 구경꾼도 필요 없다. 방관과 무관심이면 된다.

 

그래도 희망을 갖는 건 12·3 내란 국면에 군과 정부기관 안팎에서 목격한 소수의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다. 최근 보도된, 내란 당일 국회 진입 명령을 거부하다 작전에서 배제된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 하급 간부의 사례는 우리의 관료사회가 2의 내란이나 극우화의 공격을 이겨낼 면역체계(반성적 사유 능력)도 함께 갖췄음을 보여준다. 계엄 당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사령관 지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재고를 요청하고 후속 부대에는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지시한 수방사 제1경비단장의 경우는 또 어떤가.

 

그러니 악은 전능하지 않다. 지레 포기하고 절망의 늪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고 공화국을 지켜낼 수 있다. 

앞에 인용한 절망의 후반부에서 김수영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바도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44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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