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0일 한겨레가 없었다면,
많은 것이 지금과 다를 것입니다. 세상을 뒤집은 특종만 꼽아봐도 한참입니다.
전두환의 폭압정치, 보안사의 사찰과 이근안의 고문, 황우석의 사이비 줄기세포, 국정원의 대선여론 조작, 무엇보다도 최순실의 테블릿
피씨가 여전히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
한편, 문화민족 한민족의 자랑 중 제일이 한글 창제라면, 그 한글 만을 사용해서 그것도 가로쓰기로 기록한 세계 최초 유일의 국민주 신문은 두번째 자부심이라 해도 좋을 터입니다.
한편, 문화민족 한민족의 자랑 중 제일이 한글 창제라면, 그 한글 만을 사용해서 그것도 가로쓰기로 기록한 세계 최초 유일의 국민주 신문은 두번째 자부심이라 해도 좋을 터입니다.
1988년 2만 7천명 국민이 십시일반 주주가 되어 만들었던 한겨레. 전두환의 살육극을 이어받아 국민을 ‘속이구’있던 노태우의 우민정치
시대에, 물고문에 절명한 박종철의 억울함을 외쳐대던 이한열까지 비참하게 죽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민중의 봉기였습니다.
누구도 한겨레가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이 없었고, 온갖 비바람에 종이쪼가리로 사라질 뻔도 했지만, 이제 당당히 32년의 연륜 아래
주주들에게 배당을 실시합니다. 단돈 250원에 만감이 교차하는 이유입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험하지만, 한겨레가 있었기에 오늘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주주들의 감동과 국민적 자부심을 되새깁니다. 20주 5,000원의 배당금 통지서가 천금처럼
무겁습니다.
“‘가치가 다르고,
만족도
다릅니다’
내 나름의
창간사였죠”
등록 :2020-05-18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
1면에 우성건설의 아파트 분양
광고를 낸 조계현 브랜드마케팅협회 회장이 지난 13일 한겨레신문사 현관의 창간호
동판 앞에서 32년만에
‘광고
비사’를
털어놓았다. 사진 김경애
기자
<한겨레>
창간
32돌을 이틀 앞둔 지난 13일,
뜻밖의 독자가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왔다.
1988년
5월15일치 창간호 신문을 한 장 받아든 그는
신문사 3층 현관 입구에 걸린 ‘창간호 동판’
앞에서 한참을
감회어린 듯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창간호의
1면 아랫쪽을 장식한 5단 광고에 머물러
있었다.
“가치가 다르고,
만족도
다릅니다.”
우성건설의 ‘부평 우성아파트타운’
분양 광고에 적힌
카피를 소리내어 읽은 그는 자신이 직접 지은 문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로
88년 당시 우성건설 기획조정실 상무로서 광고를
집행한 조계현(77)
브랜드마케팅협회(BMA)
회장이었다.
88년 군사정권 노골적
압력에도 ‘한겨레’
애정으로
‘자리’
걸고
분양광고 한달 앞당겨
1면에
창간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 ‘좋은 신문은 좋은 독자가
찾아’
“워낙은 회사 이미지를 홍보하는 카피로
제작까지 마쳤는데,
마지막 순간에
바꿨어요.
단순히 광고주로서
창간을 축하하는 차원을 넘어,
개인적으로
‘한겨레’에 바라는 지향점을
담았어요.
‘한겨레는 가치가
다르고,
만족도
다릅니다’로 읽어보면,
창간사를 압축한 듯한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죠?
실은 오늘에야 처음
얘기하는 겁니다.
허허.”
그는 뒤이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한겨레>
창간호
1면 광고 비사’를 32년 만에 털어놓았다.
“창간 1주일 전쯤부터 한겨레신문사 변이근 광고이사가
내 사무실 소파에 눕다시피하면서 내내 농성’을 하다시피 했어요.
하지만 안기부를
비롯해 모든 부처와 기관이 총궐기하듯 <한겨레>에 광고를 못하게 노골적으로 탄압을 하던
때였잖아요?
이른바
‘빨갱이 신문’에 광고를 하는 업체엔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성 경고’를 했어요.
그러니 가뜩이나 관급
공사 수주와 금융 지원에 목이 달린 건설회사의 사주들이 누구보다 몸을 사릴 수밖에요.
그래서 고심 끝에
사장도 회장도 몰래 혼자 결단을 내렸어요.
‘부평
타운’의 착공을 한달간 앞당겨 분양 광고를 냈던
거죠”
실제로 그는 5월15일 창간호 광고가 나간 직후 최주호 우성건설
회장에게 사직서를 내고 두 달간 ‘자의반 타의반’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왜 독단적으로 광고를 저질러서 회사 안팎을
시끄럽게 하고 손실까지 끼쳤느냐는 질책을 받았어요.
‘세상의 이목인 쏠린
새 신문의 창간호인데다 광고 단가도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광고 전단’(찌라시)를 제작해 돌리는 비용보다 싸게
‘최고의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어서
했다,
기업은 이익이 최우선
아니냐고 해명과 설득을 해봤죠.
하지만 당장 정부
쪽에서 발주하는 공공사업 입찰을 하지 못하게 됐으니 회사로서는 피해가 상당했어요.
결국은 안기부 등에
4번이나 사직서 낸 사실을 확인시키며 고초를
겪어야 했어요.
다행히 최 회장의
두터운 신임 덕분에 복귀를 했지만요.”
이처럼 직·간접적인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창간호
광고를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5일 창간 32돌 기념 행사에 참석한 변이근 전 광고이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창간호 때
36면을 발행하면서 과연 광고를 다 채울 수
있을지 우려가 컸지요.
그나마
‘창간 특수효과’를 무기로 육탄공세를 편 덕분에 삼성 현대
럭키금성(엘지)
포항제철 대한한공
금호산업(아시아나)
해태 한국화약 등등
주요 대기업에서 광고를 따낼 수 있었어요.
<한겨레>
탄생 자체가
기적이었지만,
창간호 광고를 완판한
것도 기적이었어요.
그런데 맨 뒷면에
실린 삼성그룹의 전면 광고와 더불어 가장 단가가 셌던 1면에 중견업체인 우성건설의 광고가 나간 건
순전히 조 회장의 ‘한겨레’에 대한 남다른 애정
덕분이었어요.”
그랬다.
조 회장은
“이런 얘기도 처음”이라며 파란만장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1943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만 마치고 서울로 유학해 마포고를 다녔다.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을 줄지어 사용해야 했던 여기 ‘공덕동’
달동네에서 낯선
타향살이를 시작했으니 인연이라면 인연이죠,”
경희대 국문과를 나와 어느 대기업 공채시험에
합격했으나 발령을 받지는 못했다.
뒤늦게 알아보니
‘오너의 특정지역 기피’
때문이었다.
한동안 개인사업과
취업을 반복했던 그는 1976년 <문화방송>(MBC)
공채로 입사해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81년
<경향신문>으로 잠시 옮겼다가 <엠비시애드컴>에서 ‘광고홍보인’으로 입문했다.
그는 그때부터 연세대
경영대학원과 중앙대 언론대학원 석사,
청주대 경영학 박사
등으로 전문성을 키우는 한편,
전경련 소속
30대그룹 홍보협의회를 비롯
프레드(Pred)클럽,
서울카피라이터즈틀럽
등의 창립 회원으로 ‘마당발 네트워크’를 쌓아갔다.
<한겨레>
창간을 주도한
해직언론인들과도 19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유대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다.
“1982년께부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에 대비한 대규모 택지개발과 공공주택
건설 투자가 붐이 일었잖아요?
그 가운데 강남
노른자위로 꼽힌 개포지구에 기자촌 아파트(1987년 우성7차)가 포함됐는데,
막판 사흘 사이
기자단을 설득해 유력했던 현대건설을 제치고 우성건설이 사업권을 따내도록 도왔어요.
주요 경제지에 부동산
시세표를 상설 게재하는 아이디어도 처음 제안했지요”
그 덕분에 일약 매출이 두배로 성장한
우성건설은 그가 광고인으로 변신해 성과를 올리자 임원으로 전격 스카웃했다.
그로부터
10년간 그는 우성건설에서 광고마케팅 담당으로
활약했다.
1996년 우성건설이
부도로 쓰러진 뒤 외환위기의 파고가 몰려올 때 그는 기아자동차 구조조정본부 상임고문을 맡아 삼성의 ‘기아차 인수’
비밀 프로젝트가 담긴
이른바 ‘삼성 신수종 사업
보고서’를 입수해 공개하기도
했다.
“신문의 저녁
가판에는 기사를 넣지 않고 2판부터 깜짝 터트렸고 파장이 일자 결국 삼성
쪽에서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말았죠.”
1988년
5월15일치
<한겨레> 창간호에는 군사정권의 노골적인
광고 탄압 속에서도 36개면 모두 광고가
실렸다.
특히
현대· 선경(SK)· 럭키금성(LG)· 포항종합제철(포스코)· 삼성 등 주요 대기업은 전면광고를
냈다.
그 때문에 삼성 쪽에서
‘원흉’으로 찍힌 그는 평소 친밀했던 삼성그룹 광고
담당 임원과도 한동안 ‘절연’
상태였고,
상대적으로 친삼성
쪽이었던 대부분의 매체 기자들로부터도 ‘경계 대상’이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닦은
광고마케팅 경륜을 인정받은 그는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정년 때까지 12년간 교수로 재직했고,
그 뒤로도 지난해까지
협성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후진을 키웠다.
<피알(PR)실전론>(2005·컴북스)
등 교재용 저서도
여럿 냈다.
지금도
2009년 창립한 브랜드마케팅협회를 통해 국내
기업의 글로벌 이미지 전략 등을 자문하고 있다.
“나름 ‘자리’를 걸고 창간 광고를 내긴
했지만,
내 이름으로 직접
주식까지 살 엄두를 내지 못한 게 훗날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어요.
2000년대 들어
광고 현업을 떠난 이후로는 <한겨레>와 인연도 차츰
희미해졌죠.
몇해 전인가
5월 창간기념일 즈음에 혜화동 전철역사 안에서
‘한겨레’
사람들이 구독
캠페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반가움에 달려가 인사를 했는데 아무도 알아봐주는 이가 없어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올해
32돌 소식을 듣고 이제라도
‘창간 광고 비사’를 한 줄이나마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왔어요.”
조 회장은 마지막으로 해직 세대가 아닌
지금의 ‘한겨레’
구성원들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고 했다.
“부디 창간 때
‘새 신문 참 언론’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열정을 잊지 말고
‘좋은 신문은 좋은 독자가
찾는다’는 마케팅의 법칙을
기억하세요.
언론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정론의 지평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국민이 만든 한겨레가 없었다면
‘촛불 혁명’
가능했을까요”
등록 :2020-05-18
임재경 한겨레 초대 편집인에게
듣는다 인터뷰 ㅣ안재승
논설위원실장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 독재의 폭압 속에서 고통받던 국민 노력이 이뤄낸 결실.
조중동을 보세요.. 오래됐다고 자랑할 일 아냐.. 제구실 하는 게 중요
차별받는 이에게 희망 주고,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한겨레.. 자부심 가질 만하다고 봐.
대주주 없는 신문,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지만.. 일사불란보다 나아... 1천호에 썼던 ‘공공재’ 소망.. 한겨레 임직원 겸손하게.. 이 시대 가치 담아내야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 독재의 폭압 속에서 고통받던 국민 노력이 이뤄낸 결실.
조중동을 보세요.. 오래됐다고 자랑할 일 아냐.. 제구실 하는 게 중요
차별받는 이에게 희망 주고,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한겨레.. 자부심 가질 만하다고 봐.
대주주 없는 신문,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지만.. 일사불란보다 나아... 1천호에 썼던 ‘공공재’ 소망.. 한겨레 임직원 겸손하게.. 이 시대 가치 담아내야
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옥상 정원에서 창간 당시의 상황 등에 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18일
1만번째 신문을
발행했다. 1988년
5월15일 창간됐으니 정확히
32년 하고
3일
만이다. 한겨레 창간의 주역인 임재경 초대
편집인 겸 부사장은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주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함께 고통받던 우리 국민 전체의 노력이 이뤄낸 결실”이라고
회고했다. 임 전 편집인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한국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뒤 민주언론운동에 매진해오다가 19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했다.
임 전 편집인은 1991년 8월10일 한겨레 지령 1천호 신문 1면 칼럼 ‘지령 1천호를 맞이하며’에서 “한겨레가 이 시대 최고의 공공재로 남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임 전 편집인은
“한겨레는 여러모로 차별받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고 한반도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막아 평화를 모색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며 “물론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말했다.
임 전 편집인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했다.
―한겨레가 5월18일 지령 1만호를 발행합니다.
한겨레 창간의 주역
중 한 분으로서 소감이 어떠신가요?
“지령이라는 건 사람으로 말해선 수명이고
생명체로 보면 생존 기간인데,
이게 꼭 오래간다고
해서 가치 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래서 지령만을
가지고 자랑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보세요.
100년이 되지
않았어요.
중앙일보도
5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과연 그
매체들이 제구실을 하고 있느냐를 볼 때 지령이,
그 신문의 존속
기간이 길다는 것이 바로 신문의 가치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한국 언론사에서 세 매체를 꼽는다면
독립신문,
일제 강점기에 여운형
선생이 만든 조선중앙일보,
4·19 직후에 나온
민족일보를 듭니다.
그런데 독립신문은
3년을 못 채웠고,
조선중앙일보도
3년을 못 갔어요.
민족일보는 불과
4개월,
지령으로는
92호,
100호를 못
채웠어요.
한겨레는 이 세
매체보다 굉장히 오래 유지하고 있어 한겨레 창간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뿌듯한 마음을 숨길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지령
1만호라고 해서 좋다고 흥분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령 1만호라는 숫자가 아니라 한겨레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해왔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나는 한겨레가 100이면 100
사람 전체에게
만족감을 줬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에게 뭔가 기대를 안겨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했다고는 봅니다.
최근 몇년 동안만
봐도,
만약에 한겨레가
없었다면 ‘촛불 혁명’이 가능했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겠는가,
4·15 총선 결과가
이렇게 나왔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또 정치적 변화뿐
아니라,
한겨레는 여러모로
차별받는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고 한반도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것을 막아 평화를 모색할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되지만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고 봅니다
―1988년 한겨레 창간이 한국 사회에서
또 한국 언론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좁게 보면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자유언론
투쟁,
그리고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기자 대량 해직과
관계가 있죠.
그러나 길게
보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폭압적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전 국민적인 욕구가 한겨레라는 결실로 맺어진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봅니다.
한겨레는 한 시대가
만들어준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를 창간한 해직기자들도 조금 겸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전부를 내걸고
만들었다는 긍지를 갖는 건 좋지만,
한겨레는 시대가
만들어주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 함께 고통받던 우리 국민 전체의 노력이 이뤄낸 거다,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시대가 만들어줬다고 하셨는데 당시 시대정신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신다면?
“정치적 폭압에 저항하는 것은
‘천부의 권리’다,
요즘 자주 쓰는 말로
하면 ‘주권재민’의 원리입니다.
대통령이 주인이
아니고 이 땅의 평범한 국민이 주인이라는 겁니다.
촛불 혁명의
핵심이기도 하죠.
박근혜가 대통령이지만
당신이 주인은 아니다,
당신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당신
물러나라,
이게 성공한 게
주권재민의 원리죠.
물론 주권재민의
원리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선 한겨레 창간되던 무렵부터 움트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한겨레 창간 때 국내외 언론들이 많은 관심을
보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랬습니다.
외국의
신문·방송들이 과연 이 매체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건가 의문을 나타냈어요.
당시 르몽드의 서울
주재기자와 여러 차례 만났는데 굉장히 비관적으로 보더라고요.
프랑스처럼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에서도 르몽드 같은 신문이 끊임없이 재정적 위험에 시달리는데 과연 한국에서 가능하겠느냐?
군부,
재벌,
관료,
또 조중동 같은
세력들이 한겨레 같은 신문을 용납하겠느냐고 냉정하게 본 거죠.
그런데
32년 동안 유지됐고 지령
1만호까지 발행했으니 정말 대단한
겁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1988년 9월 한국언론회관에서 지령
100호 기념 자축연을
했어요.
이름은 밝히지
않겠는데,
조중동 발행인 중 한
사람이 왔어요.
나와 악수를 하면서
인사말이 그래요.
“이젠 자리가 좀
잡혀갑니까?”
이렇게 얘기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리는 거예요.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야 이놈아,
얼마나
가겠느냐”라는 표정이 역력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안 했죠.”
―한겨레는 세계 언론사에서 처음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표방한 ‘국민주 신문’입니다.
그만큼 창간 초기부터
신문 제작과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삼성이 요즘은 광고를 좀
합니까?
어때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비판적 보도 때문에
좀….
“창간 몇년 동안은 삼성에 전혀 말을 못
붙였어요.
기업은 어떤
매체하고도 적대적 관계를 가지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한겨레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거죠.
광고를 안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질 않았어요.
내가 면담 신청을
여러 차례 했는데 안 만나주더라고요.
‘너희들은 오래 못
간다.
그러니 너희들하고
적대적 관계를 맺어도 상관없다’,
이런
거였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잘못 짚은 거죠.
한겨레 미래를 잘못
짚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을 우습게 본 거죠.”
임재경 한겨레신문 초대 편집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3층에 설치된
‘창간 발기
선언문’ 앞에서 창간 당시 상황 등에 관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당시 노태우 정부의 탄압도
심했죠?
“대표적인 게 ‘리영희 선생 방북 취재
계획’
사건과
‘서경원 의원 방북
취재수첩’
사건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1989년 1월 김일성 주석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일본
이와나미서점을 통해 북한에 편지를 보내려 했어요.
하지만 그해
3월 문익환 목사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으로
공안 정국이 조성돼 방북 계획을 접었죠.
실제로 편지도
전달되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가정보원)가 4월 국가보안법상 고무찬양죄를 걸어 리영희
선생을 먼저 연행했고 다음으로 나를 끌어갔어요.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보니까 한겨레신문사 등록 취소가 그들의 목표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노태우 정부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위해 박철언이 밀사로 북한을 드나들고 있었던 거예요.
남북기본합의서를
추진하는 쪽에서 한겨레를 때려잡는 것도 좋지만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되니 이 정도만 하자고 했다고 해요.
그래서 리영희 선생을
구속하고 나는 입건 상태로 어정쩡하게 묶은 거죠.”
―서경원 의원 사건 때는 안기부가 압수수색까지
했죠?
“서경원 평민당(평화민주당)
의원이 당 지도부에
알리지도 않고 1988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는데
윤재걸 기자가 이런 사실을 알고 취재를 했어요.
다만 평민당이 서
의원의 방북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 보도를 미루고 있었죠.
그런데 서 의원이
1989년 6월 당국에 방북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구속됐어요.
그러자 안기부가 서
의원의 방북 사실을 알고도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며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를 적용하고 윤 기자의 취재수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어요.
우리가 취재원 보호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부하자 안기부가 7월12일 새벽에 경찰 1개 중대를 동원해 편집국 압수수색을 강행한
거죠.
한겨레 임직원들이
회사 입구에서 온몸으로 막았지만 경찰이 철문을 부수고 들어와 취재수첩을 빼앗아 갔죠.
노태우 정부가
한겨레를 더 이상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보고 무리수를 뒀다고 봐요.”
―노태우 정부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한겨레
발행을 취소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렸군요.
국민주 신문은 세계
최초의 실험이었는데 신문사 내부 상황은 어땠나요?
“내가 자화자찬만 하면 안 되고 솔직히
얘기해야겠죠.
한겨레는 대주주가
없어서 흔히들 하는 얘기가 “주인 없는 신문”이라는 거예요.
‘중구난방’이란 말이 있죠.
여기저기서 떠들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신문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어집니까?
매일 만들어야 하고
오자 하나만 나와도 문제가 돼요.
그리고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이렇게 복잡한데
중구난방이었어요.
3년에 한번씩 사장
선출하죠,
편집국장
선출하죠.
그때마다 으쌰으쌰
하죠.
이 사람들이 신문을
만들려고 왔는지,
선거를 하려고
왔는지,
지금은
어떤가요?
그런데 중구난방의
반대가 뭔지 아세요?
일사불란이에요.
그런데 일사불란이
과연 신문이 표방할 가치일까요?
중구난방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건 한겨레가 갖고
있는 태생적 조건이에요.
처음부터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사불란한 신문을 표방하지 않았다면 중구난방을 감수하자,
그렇게 한
겁니다.”
―지령 1천호(1991년 8월10일)
발행 때
1면에 쓰신 기념 칼럼에서
“한겨레가 이 시대 최고의 공공재로 남기를
바란다”고 소망하셨는데 지금 한겨레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공공재라고 할 때 이게 영어로는 퍼블릭
구즈(Public
Goods)인데,
상품이 아니라는
거죠.
신문을 한부에
1천원,
한달에
1만8천원 하는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상품이 가지는 조건에 얽매이면 곤란합니다.
누가
그래요.
한겨레는
‘브랜드 파워’가 있다.
나는 그것에도
반대입니다.
상품으로서 가지는
위력은 거부해야 한다고 봐요.
그럼
뭐냐?
이 시대가 가지는
가치다.
신문은 그 가치를
구현해야 해요.
다만 공공재도 좀
염증이 나면 곤란하니까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줘야 합니다.”
―끝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내가 서두에 해직기자들이 좀 겸손해져야
한다,
한겨레를 자신들이
만들었다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한 것처럼 지금 한겨레 임직원들도 겸손해져야 한다고 봐요.
다시 말하지만
한겨레는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국민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늘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어요.”
안재승 논설위원실장 jsahn@hani.co.kr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도 한겨레 국민주주
1988년
5월14일 오후 임재경 당시
편집인(앞줄
왼쪽)이 막 윤전기를 빠져나온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받아들고 감격스러워하고
있다.
옆으로 이돈명
이사, 송건호
대표이사. <한겨레> 자료사진
18일로 지령
1만호를 발행한
<한겨레>는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국민주
신문’이다.
7만명의 국민이 모아준 성금이
한겨레의 주춧돌이 됐다. 대부분
소액주주다. 200주(액면가 기준
100만원) 이하 보유 주주가 전체의
95%다.
한겨레 주주는 일반 기업의 주주와
다르다.
투자 목적으로 주식을
산 게 아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선 이 땅에 제대로 된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염원에서 국민주 모금에 참여한 것이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도
한겨레 주주다.
모두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주주가 됐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주주로 참여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가 먼저 주주가
됐고,
몇달 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도 주주로 참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1987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설 때 한겨레 창간기금 모금에 참여했다.
창간
주주다.
노 전 대통령은 한겨레가
2005년 5월 ‘제2
창간
운동’을 하면서 발전기금을 모금할 때도 참여
의사를 밝혔다.
대통령 월급으로
모아둔 예금에서 1천만원을 발전기금으로 내고 싶다는 뜻을
비공개로 전해왔다.
한겨레는 노 대통령이
기존 주주인데다 발전기금 기탁 자격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받을 계획이었다.
다만 노 대통령의
참여 사실을 따로 공개하지는 않고 발전기금 모금이 완료돼 기탁자 명단을 신문에 게재할 때 노 대통령 이름도 함께 싣기로
했다.
그런데
<조선일보>가 이를 알고 시비를
걸어왔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노 대통령이 자신과 뜻이 맞는 언론에는 각종
지원을,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는 각종 규제를 서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터무니없는 악의적
선동이었지만,
소모적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 대통령의 참여를 퇴임 이후로 늦췄다.
한겨레는 올해 3월 주주총회에서 창간 이후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배당을 결정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주주 배당을 검토한 적이 있으나 회사 재정 사정 때문에 늦어진 것이다.
한겨레는 주주 배당을
공고하면서 “한겨레를 아끼고 응원해주신 주주들께 드리는
작은 보답”이라며 “지속가능한 언론사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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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살림 좀 폈나?…32년 만에 첫 주주배당 김달아 기자2020.02.18 16:50:41
한겨레신문이 창간 이래 처음으로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한다.한겨레는 18일 열린 정기 이사회에서 주주들에 대한 현금 배당 안건이 상정돼 가결됐다고 밝혔다. 한겨레 경영기획실이 사내 공지한 글에 따르면 이날 이사회에 참석한 사외이사
4인 전원은 회사 유동성의 현저한 개선과 그동안 한겨레 구성원들에게 지급된 성과급 등을 고려해 주주들에게 배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외이사들의 현장 발의에 따라 의결된 배당 금액은
1주당 250원이다. 총 배당 재원은 2017~2019년 누적 당기순이익의 1/3에 해당하는 13억9000만원이다.
다음달 21일 주주총회에서 배당 안건이 최종 확정되면
7만 주주들에 대한 배당금이 소유 주식 수에 비례해 지급된다.
한겨레는 "모든
사외이사들은 지금껏 자산 가치가 사실상 없었던 한겨레신문사의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에게 작게나마 배당을 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며 "(이사회 전날) 현
대표이사는 다음달 취임할 신임 사장과 '배당이 가능한 여건이며 요구가 제기될 경우 배당 실시에 이견이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전했다.한겨레에서 주주 배당의 필요성은 몇 해를 거쳐 여러 차례 제기돼왔다. 최근 들어 사내 구성원들은 성과급 등을 지급받기도 했지만, 일반
주주들은 1988년 한겨레 창간 이후 한 번도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번 주주 배당 안건 가결에 대해 한겨레는 "32년 한겨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며 "한겨레를 아끼고 지탱해주신 주주에게 약소하나마 그간의
지지와 애정에 대한 보상이 되는 동시에 한겨레신문사의 주식이 '사회적 의미'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가 있음을 알리는 서곡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길윤형 전국언론노조 한겨레지부 지부장은 "한겨레가
지난 30여년 동안 자신을 키워 준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이 많았다"며 "이번 배당이 주주는 물론 시민사회와 소통을 확대하고 신뢰를
회복해 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7만 국민 주주가 지켜온 한겨레
등록 :2018-05-29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18년 2월 14일,
서울역은 귀성객들로
온종일 붐볐다.
오후
2시,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달뜬 얼굴을 한 10여 명의 사람들이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날 아침 발행된 한겨레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한겨레신문사 임직원 같지만,
아니다.
이들의 정체는 한겨레
주주·독자 모임인 한겨레신문발전연대
회원들이다.
한겨레신문발전연대는 2001년부터 18년째 매년 설·추석 명절 직전에 귀성객들에게 한겨레를
홍보해왔다.
2001년
3월,
정형기 주주가
한겨레신문에 개인 돈으로 광고를 내어 모집한 한겨레신문사랑모임(한사모)이 2010년 다른 시민단체와의 연대에 무게를 두려고
한겨레신문발전연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초대 대표인 정형기를
이어,
노재우,
김종열,
임성호,
정재현,
이요상 주주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이 모임만이 아니다.
한겨레가족청주모임,
부산주주독자클럽,
경남주주독자클럽 등
전국 곳곳에 한겨레 주주·독자들이 조직되어 맹활약해오고
있다.
모두 각자의 삶터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목적하는 바는
비슷하다.
1992년 창립해 27년 차를 맞은 한겨레가족청주모임의 회칙에는
“이 모임은 가족끼리 한뜻으로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회의 민주화와 겨레의
통일’이라는 한겨레의 창간이념을 지역사회에서
실현해 나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 사업으로는 첫째,
한겨레 독자
늘리기,
둘째,
모임을 키우고 널리
알리는 조직·홍보,
셋째,
민주·사회단체와 연대 등을
열거했다.
최영분,
임명수,
김성구,
조인호,
김윤모,
연규민,
정영권,
오상칠,
박찬교,
조관호,
김인규,
조철호 주주 등이
모임을 이끌었다.
부산·경남 지역은 하일민,
서금성,
배다지 주주 등이
주도했다.
경주·포항 독자 주주 모임은
이미진,
남용탁 주주 등이
지켜왔다.
이들만이 아니다.
2018년
3월 현재,
한겨레 주주는 모두
6만 9509명이다.
이들이 보유한
311억 3795만 원의 주식이 한겨레의
자본금이다.
전체 주주 가운데
95.14%가 200주 이하를 갖고 있다.
1000주 이하를
가진 소액 주주가 전체의 99.6%다.
이들 소액주주가
보유한 주식액은 191억 원이 넘는다.
창간 주주
2만7223명
국민 주주가 한겨레를
낳았다.
한겨레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도왔다.
1987년
12월 15일,
신문사 설립등기를 할
때 12억 5000만 원의 발행 자본금을
모았는데,
7000여 명의
주주들이 이 돈을 냈다.
1988년
2월 25일,
창간기금
50억 원을 다 모았을 때,
모두
2만 7223명이 참여했다.
이들이 창간
주주다.
창간 직후 발전기금 모금운동을 다시
벌였다.
1988년
12월,
주주가
3만 8217명으로 늘었고 자본금도
74억 원이 되었다.
그 뒤에도 꾸준히
국민주 모집을 통한 증자를 추진했다.
1989년
4월,
처음으로 자본금이
100억 원을 넘었고,
1991년
12월,
주주가
6만 명을 넘어섰다.
2001년까지 200억 원에 조금 못 미치는 자본금을 갖고 있던
한겨레는 2002년 12월,
자본금을 크게
늘렸다.
신문사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임직원들이 퇴직금을 주식으로 바꿨다.
주주 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자본금은
198억 원에서 311억여 원으로 크게
늘었다.
한겨레의 현직
임직원들이 보유한 주식은 2018년 현재 전체의 19.76%
정도다.
퇴직 임직원들이
보유한 주식을 더하면 그 비중은 더 늘어나지만,
사원 주주에 비해
국민 주주의 비율이 여전히 더 높다.
매년 열리는 한겨레
주주총회장에서는 2~3대에 걸친 가족 참가자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매년 2월 또는 3월에 열리는 정기주주총회는 국민주 신문사
한겨레를 상징한다.
전국의 주주 수백
명이 한자리에 모여 한겨레를 꾸짖고 격려한다.
2018년 3월 17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30기 정기주주총회 자리에서도
그랬다.
주주들은 경영진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손실이 나는 자회사를 빨리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자 교육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됐다.
삼성언론재단 등 바깥
단체의 돈으로 기자를 교육시키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주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기자들한테 교육비를 대줄 수 있는 사업을 계획하면 어떤가?”,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국가 경제를 제대로
운영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는 보도를 한다면,
신문 판매를 늘릴 수
있지 않을까?”
화를 내고,
고함치는 주주들도
있다.
하지만 자제시키는
이도 주주들이다.
창간 때부터 매년
빠짐없이 주주총회를 찾은 이태호·김경자 부부는 2016년 “주총에서 주주들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것도 바른 길을
가기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다 조용히 지나가면
한겨레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창간 초기 주식업무실 이사를 지낸 김태홍은
한겨레 임직원들이 주주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파악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서툴고 엉성하고
정돈되지 않은 ‘럭비공처럼 튀는 열성’은 때로는 부담스럽겠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민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족들끼리 한겨레 주총장
찾기도
주주총회에는 어린아이를 업은
부모,
장성한 자녀의 부축을
받는 어르신 등 2~3대에 걸친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많다.
경기 군포시에 사는
정종식 주주는 30기 주주총회에 초등학교
5학년 딸과 2학년 아들을 데려왔다.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내가 애착을 가진 신문은 이런 곳이라는 것,
기업 활동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 등을 보여주려고 함께 주주총회에 오고 있다.”
한겨레는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당하지 못했다.
한겨레 주식이 아직
주식시장에 상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겨레 주주들은 그 주식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길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한겨레 주주는 보통의
주주들과 조금 다르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금전상의 이득에 앞서 올바른 언론이다.
“창간 정신을 잊지
말라.”
지난
30년 동안 한겨레 주주들의
요구다.
생각이 서로 다른 수만 명의 주주들이 내놓는
건강한 제안과 비판을 한겨레의 지면과 경영에 어떻게 담을 것인지는 한겨레가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제다.
‘세계 유일의 두레
자본주의’에 기초해 미디어 기업 경영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길을 한겨레 사람들은 여전히 찾고 있다.
오늘날도 누구든 한겨레의 새
주주가 될 수 있다. 2017년
2월
24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새 주주 초청 간담회. 전남 보성과 목포 등 전국에서
모두 54명의 새 주주가 이날 모임에
참여했다.
한겨레 주주 가운데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이 많다.
한겨레 창간 때
논설고문을 지낸 리영희는 창간 직후 사보에 쓴 ‘한겨레 후배기자들에게’라는 제목의 글에서 “나는 우리 신문의 ‘기자’를 편집국 소속원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전국의 주주들도 각기
있는 곳에서 한겨레의 기자이고 기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주주도 한겨레에 직접 정보를 제공하는 뉴스
생산자라는 선구적 발상은,
2006년
5월 주주·독자가 직접 리포터로 참여해 기사를 쓰는
주주·독자 매거진 ’하니바람’
발행으로
실현되었다.
주주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2005년
5월,
제2창간을 선언한 한겨레는 이듬해인
2006년 4월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주 간담회를
열었다.
“한겨레와 더 자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달라”는 주주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니바람은 종이신문
대판 형태로 한 달에 한 차례씩 발행되다가 2007년 8월 한겨레 경영 위기로
중단되었다.
2014년 9월,
한겨레는 다시
주주통신원을 모집하고,
2015년
1월 디지털 주주 매거진인
’한겨레:온’(www.hanion.co.kr)을 창간했다.
250여 명의
주주통신원들은 다시,
자발적으로
한겨레주주통신원회 모임을 조직했다.
한겨레:온 편집위원회 자율규약을
만들고,
전국 한겨레
주주통신원 총회를 열었다.
2016년
겨울,
촛불 혁명 때
‘한겨레:온’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여했다.
한겨레
주주·독자와 시민들이 협동조합을 꾸리고
종로 피맛골에 보금자리로 ’문화공간
온’을
만들었다. 이곳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주주통신원회는 온라인 기사
취재·작성 활동에서 나아가,
한겨레 주주들과
시민의 오프라인 아지트 ‘문화공간 온’을 만들었다.
한겨레
주주·독자는 물론 시민사회와 협동조합 형태로
협업해서 사회적 경제 실험을 해보자는 취지였다.
신문에 첫 광고를
내고 열흘 만에 1억 원 가까이 모였다.
140여 명의
조합원이 2억 원가량의 자본금을
모아,
2016년
5월 17일 서울 종로 피맛골(종로구 종로 11길 6)에 문을 열었다.
공연,
전시,
강연,
세미나,
단체 회식 등을 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마련되었다.
일반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
한겨레가 창간
30돌을 맞아 디지털 역사관인
’한겨레 아카이브’를 열었습니다.
이 글은
'한겨레 아카이브'에 소개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한겨레의 살아 숨쉬는
역사가 궁금하시다면,
한겨레 아카이브
페이지(www.hani.co.kr/arti/archives)를 찾아주세요.
한겨레
30년사 편찬팀 achiv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