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나면 모두 잊혀진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반복되지 않는다고 역사가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역사가 조지 산타야나의 이 말은, 600만명을 가스로
살해한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앞 마당에 박혀 있습니다.
지드는 우리에게 다시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언제까지 이 비극을 되풀이 할 것인가? 언제 우리는 이런 천인공노할 잔학행위를 멈출
것인가?
Toutes choses sont dites déjà ;
mais comme personne n'écoute, il faut toujours recommencer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으나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 앙드레 지드(André Gide, 프랑스 소설가 겸
비평가)
오래되어
잊으셨다거나, 아니면 그저 지나간 역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시거든 도움이 되시라고 싣습니다.
소름끼치는 이 악행의
주범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역사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5·18을 모르는 당신에게
등록 :2016-05-17 21:44수정 :2016-05-18 10:45
36년 전 오늘, 광주에서 5·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이날 기념식이 열렸지만 올해는 유독 기념식을 앞두고 ‘논란’이 첨예합니다. 그 중심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의 본질은 그 이상입니다. 168명(정부 집계)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5000여명이 다쳤습니다. 지금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로 박제화된 채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불가 세력’은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5·18을 기리지 못하게
흔들고 있습니다. ‘5·18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 기사는 5·18기념재단 등의 기록을 발췌해
재구성했습니다.
제36주년 5·18민중항쟁
추모제가 열린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당시 아들 김병연씨를 잃은 이봉길(81)씨가 오열하고 있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 5월18일은 국가
기념일입니다
36년 전 오늘,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월18일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1980년
5월18일은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날입니다.
법정 기념일 제정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확실히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념일 지정 결정 직전인 1997년 4월17일 전두환·노태우의 반란 및 내란 혐의가 확정됐습니다. 공식 명칭도
‘5·18민주화운동’으로 통일됐습니다. 시민들이 ‘저항하고 싸웠다’는 점에 방점을 두어 ‘5·18광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간혹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항쟁’이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띠고, ‘운동’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을 일컫는 데 반해, ‘사태’는 시위대의 폭력성에 무게를
둔 표현입니다.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할 때 사용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2. ‘서울의 봄’의 마지막을 부여잡은 ‘80년
광주’
18년 걸친 독재끝 민주화 열기, 신군부가 총칼로
꺾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서울의 봄’이 좌절되면서 시작합니다.
부산과 경남 마산 등에서 부마항쟁이라고 부르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26일, 종신 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가 피살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1980년 봄은 ‘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렸습니다. 1980년 초부터 전국에서 계엄 철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습니다.
하지만 1979년 12·12쿠데타로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의 열기를 총칼로 꺾었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이 보인다’며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등교하는 대학생들을 구타하고, 통행금지 시각을 저녁 7시로
정했습니다.
3. 1980년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18일 군 투입…총을
쐈습니다, 21일 시민군이 생겨났습니다
일부 극우인사·단체는 아직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폭도’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군 이전에 계엄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5월18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광주 전남대
부근에도 계엄군이 투입됐습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본디 경찰의 임무입니다.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19일 청각장애인 김경철씨가 시민 가운데 처음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귀가 어두웠던 김씨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의 곤봉에 맞은 지 하루 만이었습니다. 같은 날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됩니다. 작전명은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된 ‘화려한 휴가’입니다.
21일 계엄군은 도청에 모인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합니다.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무차별 발포는 시민들이 ‘시민군’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시민들은 광주·화순·담양 지역의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꺼내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21일부터 26일까지는
항쟁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을 목숨 걸고 지킵니다.
4.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27일 시민군 최후 저항…민간인 168명 숨지고
4782명 다쳤죠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는 ‘최후의
저항’을 알리는 시민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 4시께 전남도청 진압을 시작한 계엄군은 1시간여 만에 도청을 접수했습니다. 윤상원씨를
비롯해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헌병대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도청에는 200~500여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5·18기념재단은 이날 도청에서 희생된 인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2001년 정부 발표를
보면, 항쟁 당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해 195명, 부상자는 4782명입니다.
5. 광주의 진실 어떻게
알려졌나
신문엔 한 줄도 싣지 못했습니다…‘푸른 눈의 목격자’가
알렸죠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전한 국내 언론은
없었습니다. 신군부의 언론 검열 때문입니다. 언론들은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21일 담화문 내용 그대로, 광주항쟁을 ‘불순분자 및 고첩(고정간첩),
이에 동조하는 불량배들이 벌인 책동’으로 규정합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신 및 교통수단이 마비됐던 터라, 광주 바깥의 시민들은 언론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27일 한국방송(KBS) 9시 뉴스에서는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오늘 오전 3시30분
군병력을 광주시에 투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울러 “군이 진압하는 동안 도청과 공원 등지에서 폭도들의 일부 저항이 있었으나 오전 5시10분
광주 일원을 완전 장악”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현지 왜곡
르포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김 고문은 25일치 사회면에 ‘바리케이드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광주 시민들을 “총을 든 난동자들”로 표현했습니다.
반면, 검열에 반대하며 사표를 던진 언론인들도 있었습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을 전하려 한 20일치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공동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고 사직서에 적었습니다.
5·18의 진실은 독일 제1공영방송에서 내보낸 ‘푸른 눈의
목격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 씨의 취재 영상과 5·18단체·광주시민들의 끈질긴 진상규명운동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6.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습니다
1980년 광주의 희생은 7년 뒤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집니다. 19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이듬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고,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광주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전두환은 11월 백담사로 피신해 은둔합니다.
1992년, 시민들은 김영삼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30여년 군사정권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여론에도 1993년 5월 김영삼은
5·18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에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들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합니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궤변을 앞세워 전·노 등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민학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욱 거세진 전·노 처벌 여론에 국회는 1995년 12월
여야 합의로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하여는 1993년 2월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킵니다.
전두환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 및 내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 및 상관 살해 미수 등으로 무기징역을, 전직 대통령 노태우는 징역 17년(반란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와 상관 살해 미수 등)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22일 김영삼은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전·노를 특별사면했습니다. 처벌은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광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5·18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8일 오늘은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6년째 되는 날입니다. 5·18의 정신은 희미해진 채, 각종 잡음과 논란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5·18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5·18을 다룬 소설과 영화, 웹툰 8편을 소개합니다. 5·18민주화운동 열흘을 꼼꼼히
기록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5·18이 남긴 상처를 드러낸 작품도 있습니다. 희생자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돼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작품도 있습니다.
■‘5·18 직전 9박10일의
광주’
1. 영화 <스카우트> (김현석 감독, 2007)
1980년 5월8일, 대학 야구부에서 스카우트를 맡은 호창(임창정)은 5·18을 열흘 앞두고 광주로 ‘급파’된다. 고교 야구스타인
광주일고 3학년 선동열을 스카우트 해오라는 황당한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장르는 코미디지만, 영화 곳곳에 의미심장한 상징이 녹아 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야구는 3S(Sex, Screen,
Sports)정책을 상기시킨다. ‘3S 정책’은 5·18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이 대중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성, 영화,
스포츠 산업을 장려한 것을 말한다. 호창이 ‘급파’되는 시기도 5월8일부터 17일까지다. 18일 본격화된 5·18민주화운동과 하루도
겹치지 않지만, 그 기간이 9박10일로 항쟁 기간과 같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전두환은) 진짜 남자’
호창은 광주에서 첫사랑 세영(엄지원)을 마주친다. 세영은 운동권 출신으로 군부 정권의 민주화 시위 진압에 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세영과 대화를 나누던 호창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진짜 남자”라며 추켜세운다. 세영을 향해 “너희들 모여 시민운동 하는 것도
다 겉멋 아니냐”라며 쏘아붙이기도 한다. 가해자의 무지가 피해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5·18 당시 열흘을 기록한 첫
소설’
2. 소설 <봄날> (임철우 작가, 1998)
200자 원고지 7000여장, 낱권으로 5권에 이른다. 대하소설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1998년 출간된 임철우 작가의
<봄날>은 5.18민주화운동을 전면에서 다룬 첫 소설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80년 광주에 대해 거듭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자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심부터 탈고까지 무려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열흘 동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시민군 윤상현, K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상섭 등을 등장시켜 실존 인물들의 자취를 꼼꼼히 더듬는다.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문, 김준태·양성우 시인이 광주를 노래한 시 등 시대를 보여주는
자료도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암울한 시대를 기록하려는 작가의 끈질기고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잊힌 도시’
작가는 <봄날>의 서문에서 “끝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그 봄날 열흘, 저 잊힌 도시를 위하여 이
기록을 바친다”고 했다. <봄날>을 통해 비로소 광주는 온전히 기록된 채 대중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5·18 당시 평범한 희생자들을 그려낸
흥행작’
3. 영화 <화려한 휴가>(김지훈 감독, 2007)
택시기사 민우(김상경)와 고등학생 진우(이준기), 간호사 신애(이요원) 등 광주의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맞서 총을 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 제목은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작전명이기도 하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680만 관객을 모았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항쟁 마지막 날 새벽, 신애가 텅 빈 광주 거리에서 애타게 외치는 말이다. 이는 실제로 계엄군이 최후 진압을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하던 5월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 울려 퍼진 목소리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영화 말미에 신애와 민우는 상상 결혼식을 올린다. 끝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려다 숨을 거둔 이들은 모두 함박웃음을 짓지만, 살아남은 신애
혼자만 웃지 못한다. 비극을 겪은 사람은 살아남아도 평생 죄책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조용하고 길게 클로즈업되는 신애의 슬픈 얼굴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5·18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위로’
4. 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 2014)
최근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2014년 펴낸 소설이다. 작가는
5·18 이후 무너진 희생자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5·18 당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중학생 동호, 박정희 유신 정권 때 노동 운동을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광주에 그림자처럼 스며든 여성 방직 노동자, 시체를 닦기 위해 병원과 도청사를 오가는 고등학교 소녀 등 순박한
시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숨죽인 광주 시민들에 대한 씻김굿이다.
-5·18을 보여주는 문장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30여년이 지나 80년 광주를 기록하겠다며 찾은 작가에게 동호의 가족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일부 극우 세력이 당시 시민군을 ‘폭도’라고
매도할 때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짐작케 한다.
■‘엄혹한 시대에 가해자가 돼야 했던
피해자’
5. 영화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 1999)
구로 공단의 야학에 다니던 평범한 청년 영호(설경구)는 1980년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된다. 영문도 모른 채 단순히 지시에 따라
시민들에게 총과 곤봉을 휘두른 뒤, 그의 삶도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삶을
망가뜨린다.
5·18민주화운동은 가해자에게도 상흔을 깊게 남겼다. 당시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했다. 경찰 대신
군대를 앞세우고,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영화는 이들
역시 역사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5·18을 보여주는 문장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는 중년에 접어들어 망가진 자신의 생을 뒤돌아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친다. 이후 그의
삶이 역 시계열적으로 나열된다. 영화는 한 번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
<꽃잎> 장면 갈무리 (가운데가 혼신의 열연을 보여 주었던 가수
이정현)
■‘처음으로 5·18 현장에서 촬영된
영화’
6. 영화 <꽃잎> (장선우 감독, 1996)
소녀(이정현)는 5·18민주화운동에서 어머니를 잃고 정신분열증을 얻게 된다.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탓이다. 인부 ‘장’(문성근)은 그녀를 거두지만, 정신이 불안정한 그녀를 육체적으로
학대한다.
1996년 상영된 이 영화는 5·18민주화운동을 전면으로 다룬 첫 영화로 알려져 있다. 최윤 작가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원작이다. 미국 방송 시엔엔(CNN)에서 언급되며 국제적으로 5·18을 다룬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잡음이 이어졌다. 영화 광고에 ‘학살자 전두환을 처단하라’는 구호가 등장했다는 이유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서 수정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21일은 계엄군이 광주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발포한 날이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다. 영화에서 소녀의
어머니(이영란)도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이 의문사한 것에 분노해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 숨진다. 이 장면은 실제로 광주 금남로에서
촬영됐다. 5·18 희생자의 유가족과 광주 지역 학생 등 수천 명이 시위대나 계엄군으로 출연했다. 5·18 당시 광주 관련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는 장선우 감독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80년 5월의 아름다운 세상, 그 위대한 5월의
정신을 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5·18을 통해 보여주는 민주화
열망’
7. 소설 <오래된 정원> (황석영 작가, 2000년)
5·18민주화운동 주동자로 지목된 현우는 도피생활을 하다 미술교사 윤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현우는 다시 민주화 운동에 나서고, 이내
붙잡혀 감옥에서 17년을 보낸다.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5·18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기
징역을 선고하는 엄혹한 시절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집약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수십년이 흘러도 가해자는 사과하지
않는다’
8. 웹툰 <26>, 강풀26>
만화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가족을 조명한다. 광주에서 주먹을 쓰는 진배, 사격선수 미진, 경찰 정혁 등은 모두
5·18 이후 가족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항쟁 26년 만에, 5·18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진압 책임자인
‘그 사람’(전두환)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이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6>은 끝내 실패하는 복수를 담아낸다. 26>
<26>26>
<26>26>
<26>26>
<26>
26>
- 5·18을 보여주는 문장: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사람’은 5·18 당시 자신의 책임을 끝내 부인한다. “26년 전 그날 양민을 학살할 것을 명령했나”라고 재차 묻지만 “나는
그날... 발포가 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어… 그건 그쪽의 일이었어”라고 말한다.
픽션이 아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월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어느 누가 총을 쏘라고 하겠어
국민에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라며 발포 책임을 부인했다. 이어 “대통령이 되려다 안 된 사람의 모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체 그 때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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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4회 광주학살
(상)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을 무더기 연행함과 동시에 광주 주요 대학에 무장 공수부대를 진주시킨 뒤
5월18일 시위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 살상했고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80년 5월16일 밤까지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여는 등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월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 광주의 도청 앞
광장에는 시민과 학생이 참가한 ‘민족 민주화 성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는 마지막날 5만여명에 이르렀다. 5월17일 밤 김대중과 동교동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시각에 광주에는 특전사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배치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할 경우 광주에서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7일 밤 12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 공수부대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급습해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붙잡아 구타하고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했다.
신군부 ‘김대중 체포’ 저항
예상.. 5월17일 밤 공수부대 광주 투입..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 ‘충돌’
오후들어 제7공수 ‘무차별 살육’.. 현장 기자
“인간사냥이었다” 증언
19일 ‘화려한 휴가’
끔찍한 만행.. 오후 시민들 투석저항에 ‘첫 발포’
“싸우다 죽자” 시민들 하나로 똘똘.. 20일 저녁 택시 200대 금남로 시위.. 수천
시민들 태극기 들고 도청으로
계엄사
‘광주 소요 경미한 피해’ 발표.. 오락프로만 틀던 방송국들 불탔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 100여명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수는 곧 200~300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무장한 공수부대를 앞에 두고 “계엄군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돌격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곤봉에 머리를 맞은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흩어진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로 옮겨갔다. 정오 무렵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일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동경찰대가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모이기를 계속하며 금남로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터미널, 공용터미널 인근에서 계속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오후 4시를
전후해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투입되자 사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수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가슴과 배를 걷어찼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쓴 진압봉은 단단한 박달나무에 쇠심을 박은 길이
70㎝의 살상용 곤봉이었다. 전투경찰이 쓰던 길이 50㎝ 진압봉과는 질이 달랐다. 곤봉에 맞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공수대원들은 골목까지 쫓아가 숨어 있던 젊은이들을 개처럼 패고 죽은 개를 잡듯 끌고 가 군용트럭에 던져
넣었다.
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훗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상황을 증언했다. 시위 현장에서 사태를 목격한
시민 김시도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간 학생을 잡으려고 공수부대 2명이 양복점 안까지 쫓아갔다. 공수들은 그 학생의 멱살을 잡더니 다짜고짜
다리미를 빼앗아 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학생의 머리와 얼굴을 구분하지 않고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입만 벌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서 있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죽일 놈들아! 이놈들아!’ 하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살기가
오른 공수부대는 이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붙잡힌 학생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뛰어가 몸으로 학생을
막았다. 할아버지가 ‘이러지 말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공수부대는 엠(M)16 소총에 살상용 대검을 장착하고 있었다. 사람 잡는 칼이었다. 공수대원은 잡힌 학생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치고 대검으로 등을 찌른 뒤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시위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들은
더 끔찍하게 당했다. 백주에 대검으로 겁탈을 당하는 꼴이었다.
항쟁기간 중 시민군 상황실장이 된 박남선은 이날 본 것을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 놈들은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60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 놈들은 ‘이 ×××아, 너는 뭐야?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홧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홧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대로에서 벌어지는 만행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가.’ ‘우리 국군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국군의 짓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시민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했다. 거리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만행에 짓이겨지며 내지르는 희생자들의 비명과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울부짖는
시민들의 통곡이 대로와 골목에 흘러넘쳤다.
80년
5월20일 저녁, 사흘째 계속된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에 맞서 마침내 광주 시민 10만여명은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앞세우고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광주 상황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 이런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가 ‘인간사냥’이었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같은 표현들이 떠올랐으나 이것 역시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뒤에 시민들에게 잡힌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에 배치되기 전
사흘 동안 식량을 받지 못했고,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 소주를 배급받았다고 실토했다. 공수부대는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공수부대의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진압훈련으로 살기등등해진 공수부대는 광주의 백주대로에서 사람을 때려잡아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공수부대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라도 새끼들 다 죽인다”, “씨를 말려버린다”고 고함치는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난행이었다. 공수부대는 보란 듯이 때리고 찌르고 짓밟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끔찍함에
몸서리쳤다.
공수부대의 곤봉과 대검이 휩쓸고 간 뒤 5시쯤 거리엔 핏자국만
남았다. 사람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학생을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장면을 보았던 김시도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너무나
분한 마음을 삼키며 전업사를 하고 있는 형님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고 뭣이고 다 던져버리고 우리도 나가서 싸웁시다.’ 그리하여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금남로로 걸어 나왔다. 나는 같은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만행을 보고도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녁 7시쯤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고, 공수부대가 나타나 시위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공수부대는 산수동과 풍향동 일대 주택가를 뒤지며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5월19일 오전 공수부대의 만행은 극에 이르렀다.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울먹일 정도였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호소했다. 금남로는 피에 굶주린
야수의 정글이 되었다. 누군가 건물 창문에서 공수부대를 바라보기만 해도 일대의 건물을 샅샅이 뒤져 사람을 잡아낸 뒤 금남로 바닥에 꿇어앉혔다.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면 곤봉으로 내리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트럭에 짐짝처럼 던졌다.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다 잡아 죽인다’, ‘내 새끼들을
공수부대가 다 죽인다’고 시민들은 절규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일부러 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으로 칠 때도 얼굴과 머리를 가격했다.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사람들을
패고 찌르며 묘한 웃음을 짓거나 서로 낄낄대기도 했다. 공수부대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과시하는 듯이 날뛰었다. 그 광란에
시민들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광주항쟁에 마지막까지 참여한 김종배는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그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공수부대들이 무차별 학살을 했기 때문에 수류탄이 아니라 폭탄이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도 갖고 공수부대들한테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몰았다. 점심때쯤 금남로
일대의 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부터 시위의 주력은 대학생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지 않으면 광주 시민들이 모두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거리를 뒤덮었다.
시위대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인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사판 자재와 집에서 쓰던 연장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맞섰다. 계엄군은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폭도’ ‘불순분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선무방송을 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모는 계엄군의 선무방송에 격노했다.
시민들은 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이 앞에서 싸우고
여자들은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뜨려 시위대에 전달하고 공사장의 인부들은 각목과 쇠막대를 실어다 날랐다. 목숨을 건 항쟁이었다. 시위군중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공수부대의 폭력은 더욱 극렬해졌다. 대검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19일 오후 5시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최초로 발포했다.
19일 저녁 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비를 피해 흩어졌다가 20일
아침 다시 모였다. 전남주조장 앞에서 참혹하게 찢긴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이날 오후가 되자 시 외곽의 시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금세 수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자 다시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의 공수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2시30분께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쏘아 그 자리에서 여러 명의 시민이 타 죽었다. 오후 3시 금남로 화니백화점 앞에서
시민 수천명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시위대는 “우리를 다 죽여라!”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하고 죽음을 작정한 절규를 쏟아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대자보는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 대인동의 사창가 여자들도 할 일을
찾아 뛰어나왔다. 피를 뽑아 헌혈하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행주는 이렇게 증언했다. “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종업원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광주 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오자 유동삼거리 쪽에서 대형 트럭과 버스를 앞세우고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켠 채 금남로로 밀려왔다. 차량시위는 전날의 택시기사 학살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19일 택시 한 대가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공수대원에게 걸렸다. 택시기사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병원으로 실어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자 공수대원은 택시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 대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날 적어도 세 명의 택시기사가 그렇게
살해당했다. 20일 밤 차량시위는 이 참혹한 만행에 대한 항의였다.
택시 200대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금남로의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자들은 김밥·주먹밥·음료수·수건을 가지고 나와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날 저녁 수천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 도청 앞 광장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광주는 피의
바다였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신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도시였다. 계엄사는 20일 오후 ‘광주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언급을 했지만, 이 발표도 광주 지역 방송에만 보도되었다. 이 발표는 18일·19일 소요로 경미한 피해가 있었으며
연행한 176명은 모두 귀가시켰다고 했다. 시민들은 보도에 분개해 문화방송국(MBC)과 한국방송국(KBS)으로 몰려갔다.
텔레비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락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었다.
문화방송국 앞에 시위대가 몰려들었을 때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어 사람들을 깔아뭉갰다. 어린아이 두 명이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게 죽었다. 이날 밤 문화방송국과 한국방송국이 불에 탔다. 11시30분 광주역 부근에서 제3공수여단이 시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
총소리가 도시의 밤하늘을 갈랐다. 시위대는 밤을 지새우며 공수부대와 싸웠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80년
5월21일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이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5월26일까지 광주는 철저한 고립 속에도 시민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공동체를 이뤘다. 시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광주의 참상에 대한 보도를 막던 신군부는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를 내보냈다. 이 발표문에는 ‘광주 지역에 유포된 유언비어의 유형’도 들어 있었다. 대다수 신문이 발표 내용을 1면에 그대로
보도했다. 계엄사가 ‘유언비어’라고 내놓은 말들은 참혹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 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해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 피를 흘리고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문.. 실제 만행을 ‘유언비어’로 왜곡
30만 시위에 공수부대 철수 약속.. 오후들어 헬기 사격·집단 발포
시민들 인근 파출소
무기로 ‘무장’.. 저녁 시민군 도청 진입에 ‘함성’.. 22일 시민수습위 구성 ‘해방 자치’
외곽 후퇴한 공수부대
‘학살’ 계속.. 끌려간 시민들 고문·학대도 ‘잔인’
25일 항쟁지도부
결성 ‘결사항전’.. 27일 재진입 계엄군 투항자도 사살 .. “광주의 피와 한으로 이룬 민주주의”
대부분이
광주 시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신군부는 ‘유언비어 유형’을 미리 유포함으로써 공수부대의 만행을 고발하는 말들의 힘을 빼앗고 진실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민중봉기로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김대중 중간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언론은 이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내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1일 오전 10시 3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광주
중심가로 운집했다. 전날 밤 최전방 20사단 병력이 서울을 출발해 21일 광주 지역의 공수부대와 합류했다. 광주는 2만명의 병력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지 않으면 이 무서운 고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꼈다. 30만 시민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하며 금남로를
채우고 도청을 에워쌌다. 한 도시의 시민 전체가 일어나 완전 무장한 군대와 맨몸으로 맞선 것은 현대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위대는 아침부터 버스와 트럭을 이용해 시민들을 금남로로 실어
날랐다. 여자들은 동마다 통반 조직을 가동해 쌀을 거두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었다. 전 시민이 시위대를 성원하고 시위대와 일체가 됐다. 당시
시위에 참여해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이세영은 이렇게 증언했다. “가는 곳마다 아주머니들이 힘내서 싸우라며 김밥과 주먹밥을 차에 올려주었다.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음료수와 빵을 던져주었다. 물수건으로 최루탄 가스에 뒤덮인 얼굴을 닦아주기도 했다. 시민들의 격려와 보살핌은 어느새
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뜨거워졌고 눈시울은 젖어 마침내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죽음마저도 각오했다. (…) 이것이 바로 운명공동체인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수십만명으로 불어나자 계엄사는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중에도 광주 일원의 상공에선 헬리콥터가 땅을 향해 기총사격을 했다. 도청의 공수부대는 시민들 몰래
실탄을 분배받았다. 12시가 넘어도 계엄군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술렁거리며 차량을 앞세워 도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후 1시 공수부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집단발포였다. 앞쪽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무더기로 쓰러졌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 피의
바다로 변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로 적어도 54명이 죽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비무장 시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박남선은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부대는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조차
사살해버렸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쏘아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민들은
울부짖었다.
1시30분께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웃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돌진했다. 청년은 “광주 만세!”를 외쳤다. 공수부대의 총격과 동시에
청년의 몸이 고꾸라졌다. 전율이 시민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지나갔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나라의 군대가 시민을
학살하니 목숨을 지키려면 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는 무기고로 차를 몰아 가장 가까운 나주 지역 파출소에서 총과 실탄을 가져왔다. 다른
지역에서도 무기를 거두었다. 오후 3시께 시민들은 광주공원에서 총과 실탄을 분배했다. 시민군이 등장했다. 후에 계엄사는 시민군에게 들어간 총이
5400정이었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이 반격하자 공수부대는 서둘러 철수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도청에 진입했다. 함성과 통곡이 뒤엉켰다.
5월25일 시민군은 ‘왜 우리는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무장한 시민들은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냈지만, 광주의 해방은
외부와 단절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해방이었다. 시 외곽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봉쇄됐고 전화마저 두절돼 밖으로 소식을
알릴 수도 없었다.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인류학자 리나 루이스는 그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곳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풀브라이트 담당관인 마크 피터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대대적인 도청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는 죽음으로 맞섰다. 도청을 재장악한 계엄군이
유혈이 낭자했던 도심 곳곳을 소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광주시 외곽으로 후퇴한 뒤에도 공수부대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도청 앞뜰로 주인 없는 주검들이 끝없이 실려 왔다. 관이 부족했다. 시민군들은 외부에서 관을 가져오려고 소형버스를 타고 화순 방면으로
나갔다. 그 소형버스에는 시민군 5명, 여고생 2명, 여공 2명을 비롯해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지원동을 지날 무렵 공수부대가
버스에 총탄을 퍼부었다. 조선대에서 철수해 그곳 야산에 주둔해 있던 부대였다.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남자 2명이 중상, 여고생 1명이
경상을 입었다. 공수부대 장교는 리어카에 실려 온 중상자를 보고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공수부대의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4일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야산을 타고 철수하던 공수부대는 진월동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놀란 아이들이 둑 너머로 달아나다가
그중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공수부대는 또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이유 없이 총질을 했다. 도망가던 중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걸 집으려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가 공수부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전재수의 몸에는 열 발도 넘는 총알이
박혔다. 공수부대는 송암동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불러내 청년 세 명을 철로변으로 끌고 가 죽였다. 동네 하수구에 숨은 주부 박연옥을
발견하고는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엠16 소총을 갈겼다. 박연옥은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고 죽었다.
공수부대의 총칼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그것으로 죽음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당한 고문과 학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공수부대 장교들은 잡혀 온 사람들에게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하라고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따위의 말들을 수도 없이 퍼부었다. 공수부대는 정권 탈취에 눈이 먼
신군부의 하수인이었다.
공수부대원
중에는 월남전에 참가했던 하사관들이 적지 않았다. 5월20일 전남대 강의실로 끌려간 강길조는 거기서 목격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베트콩 여자 유방 40개 이상
자른 기념 칼이다’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면서 스포츠머리처럼 되었다.”
공수부대가 보인 잔인함은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것들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잡혀 온 사람들을 장난감 대하듯 짓이겨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가 공수대원들의 놀이였다. 잡혀 온 시민들을 트럭에 꽉 채워 넣은 뒤 차 안에
최루탄 분말을 뿌리고는,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며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22일 도청에서 종교지도자들이 포함된 시민수습위원회가 꾸려졌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특전사 지휘관들은 ‘폭도’를 소탕해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시민들은 22일
오후 모든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들을 도청 앞으로 옮겼다.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으깨어진 시신을 뒤지고 또 뒤졌다. 자식이나 남편의 주검을
확인한 여자들은 그 자리에 엎어져 오열했다. 이날 신군부 우두머리 전두환은 특전사 11여단장 최웅에게 ‘금일봉’ 100만원을 하사했다.
공수부대의 기세를 북돋우려는 것이었다.
도청에서는
수습파에 맞서 항쟁파가 형성되었다. 수습파는 더 큰 희생을 막으려면 총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엄군은 정해진 시간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탱크·장갑차·헬리콥터를 총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윤상원·박남선·김종배를 포함한 항쟁파는 광주시민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려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맞섰다. 시민을 학살한 살인마들에게 무조건 투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23일부터 도청 앞에서 열린 ‘민주수호를 위한
시민궐기대회’에서도 이 두 기류는 맞부딪쳤다. ‘더 큰 희생을 막느냐, 끝까지 싸우느냐.’ 어느 의견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22일부터 총기 회수가 시작돼 24일쯤에는 총 4000여정과 수류탄 1000여개를 거두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5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25일 저녁 도청에서 윤상원과 대학생 100여명이 중심이 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항쟁지도부)가 결성됐다. 목숨을 걸고 학살자들과 싸우겠다는 결사대였다. 26일 시민수습위원회 일동은 대변인인 신부 김성용을
통해 ‘추기경께 드리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저희는 계엄군에 의해서 짐승처럼 치욕과 학살을 당하고도 폭도요 난동분자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저희 80만 광주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아픔을 함께해 주십시오.” 26일 광주 대주교 윤공희는 대통령 최규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계엄당국은 27일 0시 이후 도청을 공격해 진압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26일 저녁 항쟁 지도부는 “최후까지 남을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렸다. 시민군 500여명이 도청에
남았다. 윤상원은 이날 밤 이렇게 말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고등학생들이 남겠다고 했으나 윤상원은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해 내보냈다.
27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일제사격을 했다. 도청의 시민군들이 금남로의 계엄군을 향해 응사하는 동안 3공수여단 특공대가 도청
뒷담을 넘어 건물로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는 총을 난사하고 방마다 수류탄을 던졌다. 시민군들은 눈앞에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특공대의 총과 수류탄에 죽어갔다. 시민군 8명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올리고 도청 앞뜰로 나왔지만 특공대는
투항자들을 모두 쏘아 죽였다. 한 특공대 병사는 한쪽 발로 시민군 포로를 군홧발로 밟은 채 사살하면서 “어때, 영화 구경 하는 것 같지” 하는
농담까지 던졌다. 살아남은 시민군은 굴비처럼 엮인 채 버스 넉 대에 실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날 진압작전에서 수백명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을 이끈 윤상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화염방사기로 까맣게 탄 주검으로 발견됐다. 도청을 점령한 계엄군은 학살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광주 시내를 소독했다. 짓밟힌 광주는 원한에 잠겼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5·18이 남긴 광주의 한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호남인들은 오직 말없이 김대중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하였지만, 광주학살에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정치학자
최정운은 “5·18은 우리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며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를 대가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썼다.
계엄군이 철수한 5월31일 밤과 6월1일 새벽 사이에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곳곳의 전신주에는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쓴 붉은색 글씨가 나붙었다. 6월2일 전남매일신문은 5·18
관련 시리즈 ‘무등산은 알고 있다’를 내보냈고, 같은 날 시인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를
실었다. 전남매일신문은 폐간당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맨
위 사진)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가운데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