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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박정희'가 없다?



1979년 10월 26일은 18년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 의해 사살된 날입니다.
부하가 상사를 살해하는 데 온갖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박정희가 폭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10월 16일 부마항쟁이 그 원인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것에는 별 이의가 없습니다.
어찌보면 1980년 5.18 광주항쟁의 복사판이 될 뻔했던 부마항쟁은 핵심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그만이라도 다행한 수준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마항쟁이 평화로운 시위와 통제 속에 진행된 것은 아니었고, 적지않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있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노력해 시작해서 이제 겨우 2년째 추념식에서 박정희라 이름은 금기어입니다. 우린 언제까지 이런 성역을 견뎌야 할까요. 진정한 민주화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지.
 
 
박정희의 다음 언사는 그가 개죽음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 나라가 어떤 상황을 맞을 뻔했는지 증거가 될 터입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박정희' 없다

 

[] 41주년, 번째 국가기념일 돌아왔지만... 소환되지 않는 이름 '박정희'   20.10.16

 


'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박정희 유신정부의 폭거에 항거한 반독재·민주화 운동입니다. 10 16일은 부마민주항쟁 41주년이자 두 번째 국가기념일입니다. 이날 의미있는 행사가 부산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그러나 지역의 거대 양당 정치권에서는 민감한 그 이름인 '박정희'를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41주년이 돌아왔으나, 아직도 어려운 이름


국민의힘 부산시당은 부마항쟁 41주년 기념식을 맞아 항쟁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포함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어디 내용을 한번 볼까요?

"항쟁의 정신을 계승한 정당으로 불의에 항거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더욱 공고히 해나겠다",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한 역사적 항쟁임에도 가치에 대한 평가가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다."


분명히 일리있는 지적이자 다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대목은 눈을 씻고 봐도 보기가 어렵습니다. 부마항쟁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 1500여 명을 연행·탄압했던 그 분의 이름 말입니다. 18년에 달하는 장기집권, '유신독재'에 대한 평가, 이에 항거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말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부마항쟁 기념식 날 '박정희'라는 단어를 어려워하는 정당은 또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성명에도 지난해 국가기념일 지정, 문재인 대통령 참석이 부마항쟁의 역사적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런데 '유신독재' 표현은 있지만, 전문 어디에도 '박정희'는 찾을 수 없습니다
.


그러면 정세균 국무총리의 기념사는 어떨까요? 정 총리는 처음으로 이날 민간이 조성한 부산대 부마민주항쟁탑을 찾아 헌화·참배했습니다. 이후 기념식에 참여한 그는 기념사에서도 부마항쟁의 역사성을 강조했습니다. "부마항쟁이 유신독재를 쓰러뜨리는 도화선이 됐다". 그렇지만 정 총리의 기념사 역시 '박정희' 대통령 이름을 담진 못했습니다
.

이는 부마항쟁이 발생한 지역임에도 정치적으로 여전히 보수 텃밭인 부산의 지역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탄핵 정국을 거치고 지난 대선과 지방선거를 거치며 크게 달라진 것 같지만, 이번 총선 결과는 부산의 여전한 기반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

국민의힘은 그렇다 쳐도 민주당은 도대체 왜,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걸까요? 직접 물었습니다. "유신독재의 핵심인 박정희 대통령을 말하고 싶어도 이를 지적하는 모양새로는 지역에서 기념사업을 수행하는 데 문제가 있다. 같이 가려면 어쩔 수 없다." 민주당 관계자의 말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인데, 결국 지역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실리를 택한 겁니다
.
  









1961. 5. 16. 시청광장에 나타난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소장(가운데, 왼쪽 박종규 전 경호실장, 오른쪽 후 차지철 경호실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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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기념일에도 '박정희'를 말하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5·18을 말하면서 학살자인 '전두환'을 빼놓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온 4·19 또한 '이승만'이라는 단어가 항상 뒤따릅니다. 역사는 이들의 잘못을 분명히 짚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이 늘 우리에게 욕을 먹는 것도 같은 이유죠. 일제강점기에서 가해국인 일본을 빼놓고,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부마항쟁은 발발 41주년이 흘러도, 정신 계승을 말하지만, 공식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부산지역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쯤이면 박정희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

오늘 기념식에는 부마항쟁의 희생자로 첫 인정된 고 유치준씨의 아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들어볼까요
?


"공권력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무참히 죽어갔다. 유족의 동의도 없이 이름 모를 동네 의원에서 시신은 훼손당했고, 야산에 암매장됐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권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다는 걸... 아버지가 겪은 일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다시는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기를, 다음 세대에서는 절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분의 말이 실현되려면 유신독재 시절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를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정치인 분들이 어려워하니 다시 한번 제가 대신 말합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요?    


▲ "다시 시월에 서서" 41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이 16일 부산대학교 넉넉한터에서 열리고 있다. 국가가 인정한 부마항쟁 희생자 고 유치준 씨의 유족인 유성국 씨가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84797&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2&CMPT_CD=E0027

 

 

박정희 죽기 10일 전, 김재규가 본 충격적인 광경.. [김종성의 히,스토리] 10·16이 있어 10·26도 있었다  20.10.16 08:06l최종 업데이트 20.10.16 08:06l 김종성(qqqkim2000)

 




 부마항쟁

ⓒ 진실화해위원회 자료사진


10·16이 있어 10·26도 있었다. 10·16이 있었기에 10·26이 유신체제의 마침표가 될 수 있었다. 김재규가 총을 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날 밤 그의 옷 속에 권총이 있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한국인들은 평화적 권력이양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며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같은 사람들이 그를 고무시켰기 때문만도 아니다.


근원적인 요인은 김재규가 1979 10 16일 이후의 부마민주항쟁(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일으킨 민주화운동, 아래 부마항쟁)에서 민중의 에너지를 확인한 데서 찾을 수 있다. 10·16이 그의 가슴을 자극했던 것이다. 박정희를 죽이고 투옥된 뒤인 1980 1 28일 작성한 '항소이유 보충서'에서 김재규는 이렇게 술회했다
.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마산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부마항쟁을 목격한 김재규는 10·16의 전도사가 되어 박정희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그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박정희에게 촉구했다. 위 보충서는 이렇게 말한다.
 

본인이 부산사태 직후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실장과 차지철 실장과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 사태는 체제 반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항에 조세 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귀는 막혀 있었다. 박정희는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이것은 김재규가 유신체제에 대한 기대감을 거두고 몸 안에 총을 감추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박정희의 반응에 관해 보충서는 이렇게 말한다.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왕국 기둥에 도끼를


부마항쟁은 경남 거제에서 출생하고 부산에서 여섯 번 당선된 1979년 당시의 김영삼 의원( 7)을 상대로 박 정권이 신민당 총재직과 의원직을 박탈한 일로 인해 촉발된 측면이 컸다. 박 정권의 김영삼 박해가 경남·부산 민심을 자극하고 이로 인해 박 정권의 부조리가 부각되면서 민중항쟁이 폭발했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는 국회를 무력화시키며 1인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1972년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한국 민중의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

유신체제는 '박정희 왕국'을 유지하고자 헌법이 아닌 긴급조치로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부마항쟁은 긴급조치라는 사상누각에 세워진 박정희 왕국을 허물고자 그 누각의 기둥에 도끼를 들이대는 사건이었다
.

2018
년에 <한국과 국제사회> 2권 제1호에 실린 정주신 한국정치사회연구소장의 논문 '10월 부마항쟁의 진실과 역사적 성찰' "부마항쟁은 대학생을 비롯해서 소시민, 영세상인, 도시빈민, 접객업 종업원, 자영업자, 노동자, 재수생, 고등학생 등 하층 도시민과 학생들의 주 참여 계층이 가세한 민중항쟁이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라고 말한다
.



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부마항쟁이 즉자적인 반유신 민중봉기가 아니라 야당의 선동으로 발생한 '불순분자들'의 행동이나 '식당 보이' '똘마니' 그리고 '깡패' 등에 의한 단순한 소요로 본 행태는 통치자로서의 애민의 입장이기보다는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민중을 천민으로 본 발상이었다"고 말한다
.

박 정권이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들로 비하한 서민 계층이 궐기했다는 것은, 2016년 연말 이래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는 이스라엘기까지 흔들며 이승만·박정희·박근혜를 연호하는 극우세력에게 '당신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

박정희 시대의 서민 상당수는 데모는 위험한 일이며 가방끈 긴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했다. 그랬던 그들이 데모대에 음료수나 맥주를 날라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시위에 참여했다. 극우세력의 주장처럼 박정희 시대가 살기 좋은 시대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

그런 면에서 부마항쟁은 박정희 시대를 살아본 서민대중이 박 정권에게 매기는 성적표와 같은 것이었다. 박정희 체제가 인간을 못살게 구는 악의 체제였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

'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 등이 1960 4·19 혁명으로부터 19년 만에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는 것은 박 정권 18년 동안에 정치체제 못지않게 경제체제의 모순도 심화됐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저항에 나선 것은 박정희 체제가 정치적 자유나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분배에서마저 이들을 박대했기 때문이다
.



고전적인 민란




 


 

 부마항쟁

ⓒ 진실위 자료사진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같은 노동자 착취에 기초했다. 휴일이 한 달에 두 번만 있어도 감지덕지해 하면서 선반 기계 옆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쪽잠을 자며 철야로 노동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노예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국가와 경찰이 재벌과 대기업을 비호하는 속에 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니, 그 시대의 노동에는 노예노동의 측면도 없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도성장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기업가나 국가뿐 아니라 노동자도 적정한 분배를 받아야 한다. 노동력이 사실상 공짜로 착취되는 구조에서는 고도성장이 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를 인간답게 대우하는 가운데서 고도성장을 이룩했다면 박정희 경제정책은 당연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가운데서 이룩한 것이므로, 그것은 재벌 및 대기업 혹은 국가의 고도성장이지 대한민국 전체의 고도성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부마항쟁은 박 정권의 고도성장이 알맹이 없는 허위에 불과했음을 폭로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서익진 경남대 경제금융학과 교수가 금년에 <사회경제평론> 62호에 기고한 '박정희 공업화 발전모델의 위기와 부마항쟁'에 이런 대목이 있다
.
 

국가 주도 공업화 과정에 동원된 민중 블록은 성장의 과실 분배 과정에서는 배제되거나 희생되었다. 이는 만성 인플레이션 하에서의 물가 급등, 노동 착취 강화와 노동운동 탄압, 민중의 조세 부담 가중, 도시 하층민의 증가와 방치, 불로소득의 집중과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나타났다.

민중 블록은 이러한 모순이 누적될수록 불만도 커져갔지만, '잘살아 보세' '선 선장, 후 분배'라는 성장 이데올로기 약속의 실행을 기다렸다. 그러나 1976~1977년의 대호황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은 지켜지기는커녕 방위세와 부가가치세로 조세 부담만 급증하고, 1979 4월의 경제안정화 조치로 불황의 부담이 전가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분노로 바뀌었다.


열심히 노동하는 대다수가 고도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정권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소수만 혜택을 누리는 모순 구조는 '불순분자, 식당 보이, 똘마니, 깡패' 등이 저항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민중의 경제적 불만이 중요한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부마항쟁은 고전적인 민란의 성격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부마항쟁의 발생 시점도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1969 10 17일에 통과시키고 유신체제를 1972 10 17일에 선포했다. 10 17일은 박정희 왕국의 초석을 다진 날이었다. 부마항쟁은 10 16일 시작해서 10 17일에도 거세게 번져나갔다. 박정희 왕국의 생일에 초를 뿌리는 항쟁이었던 것이다
.

부마항쟁의 직접적 결과로 박 정권이 무너진 것은 아니므로 10·16이 박 정권의 마침표가 됐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10·26이 단독으로 마침표가 됐다고도 보기 힘들다. 10·16이 정권을 흔들어대지 않았다면 10·26은 일어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

그러므로 10.16 10·26의 복합 작용에 의해 박 정권이 몰락했다고 보는 게 균형 잡힌 시각일 것이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에서 발생한 사건이므로 부마항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평가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화이부동.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는다.
협상과 타협으로 민주주의의 대의를 행해 나아가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대의를 위한다는, 합리를 위한다는 그리고 무엇무엇을 위해서라는 각자의 명분도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판을 깨는 일이 다가와서는 안될 터. 그러나 역사는 화이부동의 실패 사례가 넘쳐난다.
해방 직후 우리는 그렇게 나라를 반으로 갈랐고, 결국 죽쒀서 개주는 꼴로 모진 전쟁까지 겪으며..암살과 숙청을 일상으로 겪으며 겨레의 인재들은 다 치워버린 채, 이승만과 김일성이라는 희대의 독재자를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업보를 지금도 치루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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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좌우합작의 실패 불안한 평화를 낳다     등록 :2020-08-14

 

광복75해방 뒤 운명의 이틀:  

해방입니다기쁨을 뒤로하고   여운형-총독부 2인자 엔도의 만남













75년 전 815. -소 냉전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한반도에 갑작스러운 해방이 찾아왔다. 조선인들은 해방 당일부터 독립된 통일국가 건설에 나섰지만, 결국 분단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한반도는 다시 미-중 대립이라는 신냉전의 초입에 서 있다. 실패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방 이후 40시간에 걸친 격동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이후 <경성야화>란 회고록을 남기는 조용만(1909~1995)15일 새벽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집이 있는 계동으로 향했다. 전날 총독부에 불려 들어간 이성근(1887~?) 사장은 오후 5시쯤 풀이 죽은 얼굴로 신문사로 돌아와 전 사원을 불러모았다. 그는 미국 등 연합군이 포츠담 선언을 통해 요구한 무조건 항복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신국불패·본토결전을 외쳐대던 일본의 허무한 항복이었다. 조용만은 여운형씨의 집에 가 인터뷰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날 밤 계동에 들렸다가 허탕을 치고 아침 일찍 다시 여운형을 찾은 것이었다.

해방의 15일은 쾌청한 날이었다. 하루 평균 기온은 27.2도였고, 아침엔 하늘에 80%의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정오 일왕의 항복 방송이 나온 뒤인 오후 3시 무렵엔 구름이 걷히고 쾌청해졌다. 조용만은 계동 집 근처에서 이후 여운형이 중심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이강국(1906~1956)·박문규·최용달 등 이른바 성대파(경성제대파) 공산주의자들과 만났다. 경성제대 선배인 이강국은 조용만에게 여운형이 잠시 후 총독부의 2인자인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과 만나 담판을 짓는다는 사실을 전했다. 잠시 후 계동 골목이 떠들썩해지고 여운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여운형은 언덕 위로 올라와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오늘 정오를 기해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됩니다.”

좁은 계동 골목 안에서 많은 이들이 만세를 부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15일 아침, 여운형-엔도 회담이 이뤄진 시각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총독부 관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일본인 모리타 요시오(1910-1992)의 역작 <조선 종전의 기록>(1964)을 보면, 여운형이 오전 630분께 나가사키 소장, 백윤화 경성지방법원 판사와 함께 야마토정(현재 충무로)의 총감관저를 방문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15일 새벽 여운형과 함께 있던 동생 여운홍은 회고록 <몽양 여운형>에서 아침 7시 당시 조선의 유일한 자동차 정비공장인 을지로 6가 경성서비스 정형묵이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두었던차가 도착했고, 여운형이 오전 750분에 출발했다고 적었다. 통감관저에 도착한 여운형은 이제 곧 해방될 조선의 운명을 둘러싸고 엔도와 담판을 시작했다.

엔도의 고민은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70여만 재조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가하면 어찌하나였다. 엔도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 시절에 발생한 3·1 만세시위를 현장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조선 민중들이 분노할 경우 얼마나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지 알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서대문 형무소 등 조선 곳곳에 갇혀 있는 정치범·사상범 등을 석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조선인 유력자에게 치안 협조를 구해야 했다. 총독부 실무자들은 <동아일보경성방직·보성전문 등을 거느리고 조선 내 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송진우(1887~1945)에게도 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엔도는 평소 자신과 깊은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던 여운형을 택했다.

해방입니다기쁨을 뒤로하고  여운형-총독부 2인자 엔도의 만남.. 치안유지-일본인 안전 보장 담판

정오 일왕의 항복’ 437초 방송.. 여운형은 정치세력 단합꾀하고   송진우는 경거망동 삼가라거부

-소는 38도 경계 분할점령 합의.. 경성서 독립만세거대한 물결에도  분단과 골육상쟁의 비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이 만남에서 엔도와 그의 직속 부하인 니시히로 다다오 경무국장(한국의 경찰청장)여운형에게 조선인 사상범·정치범을 석방할테니, “이들이 망동을 하지 않게 해달라. 민중 가운데 청년·학생이 폭동의 중심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으니 냉정함을 유지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그 대가로 3개월간 식량 확보 치안유지와 (국가)건설사업에 간섭과 구속 배제 민족해방의 추진력이 될 학생훈련과 청년조직 간섭 배제 등 5대 조건을 내걸었다. 해방을 앞둔 극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 대표 여운형과 총독부 사이에 유혈 충돌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해야 한다는 합의가 도출된 것이다.
















여운형

이날 엔도는 여운형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정세 예측을 전했다. 청진 등 조선 북부에 진입해 있는 소련군이 적어도 17일 오후 2시까지 경성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엔도 류사쿠

당시 기준으로 이는 매우 합리적인 예측이었다. 소련이 90소일 중립조약을 일방 파기하고 소-만 국경을 넘어 일본을 향한 공격에 나섰다는 것은 <매일신보>에도 보도된 공개 정보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여운형은 물론 엔도 역시 미-소가 북위 38도를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이 내용이 담긴 미국의 일반명령 1호에 동의한다는 뜻을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해 온 것은 그 다음날인 16일이었다.










아베 노부유키

여운형은 당연히총독부 2인자의 정세 예측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늦어도 내일 모레소련군이 경성에 진입한다면,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좌파들이 중심이 돼 건국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해방 직후 한반도 정국을 뒤흔드는 좌익 중심의 건준 결성으로 이어진다.










송진우

그날 정오, 일왕의 항복 방송이 일본과 전 조선에 울려 퍼졌다. 14일 밤 궁내성 내정청사 2층 정무실에서 녹음된 437초 길이의 방송이었다. 방송의 핵심 내용은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4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것이었다.

총독부 청사 제1회의실로 모여든 직원들은 기립한 채 방송을 청취했지만, 잡음이 심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는 일본어 구사능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일본 최고명문인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1932년 졸업한 뒤, 이듬해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최하영도 천황의 목소리가 가늘어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일왕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렸다 해도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이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뜻임을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최하영은 일본이 앞서 패전 예고를 했기 때문에 항복한다는 얘기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방송이 끝난 총독부 제1회의실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를 깬 것은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통곡소리였다. 회의실에 모인 다른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지도 분개하지도 않았다. 다만, 모두 기진맥진한 표정들이었다.

21살 일본 여성 나가타 가나코는 3-4개월 전부터 총독부에 임시 고용돼 중요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나가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느 새 직원들이 방을 오가며 태워라, 태워라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중요문서에 대한 소각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창밖으로 누군가가 파기해야 할 중요 문서를 내던지면, 아래에선 이를 쌓아 놓고 기름을 부어 태웠다. 청명한 여름 하늘에 서류를 태운 재가 눈꽃처럼 휘날렸다.

같은 시각 정국의 중심으로 떠오른 계동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운형의 딸 여연구(1927-1996)는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서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방안과 마루,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적었다.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임수의 아들 이란은 방송이 끝난 뒤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집 안엔 움직일 틈이 없었, 그 인사들은 서로 수근수근대며 거의 자기 정신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해방 전후로 여운형이 온 힘을 기울인 것은 조선 내 정치세력의 단합이었다. 여운형은 주요 인사들에겐 해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1일께부터 우파 세력을 대표하던 송진우와 합작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이던 이만규는 <여운형 투쟁사>에서 언제나 송(송진우)만은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경계하고 해방을 맞이할 준비도 하려 들지 않았다. 15(<동아일보> 조사부장 출신인) 이여성을 보내고, 그 다음에 또 사람을 보내고, 그 다음엔 여운형이 친히 가서 그대 보기에 나의 출발이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국가의 큰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나와서 대중의 신망을 두텁게 하고, 대사에 차질이 업께 하라고 힘 있게 권하였다. 송은 끝끝내 경거망동을 삼가라. 충칭 정부를 지지해야 된다하고 협동을 끝끝내 거부했다고 적었다. 송진우의 비협조로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일원화를 목적으로 내건 건준은 불완전한 출범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당일이던 15일 건준 출범을 위한 실무작업을 담당한 것은 이후 건준 부위원장과 미군정 민정장관에 오르게 되는 안재홍(1891~1956)이었다.











안재홍

안재홍은 15일 오후 경성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계동 서울방송국 편성과 임병현씨 집 2층을 건준을 위한 연락사무소로 써야 하니 전화를 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 설치를 위해 기술과 직원 심상웅이 사무실을 나서며 신출내기 기자 문제안을 불러냈다. 두 사람이 서둘러 도착한 건물 안에 안재홍이 있었다. 그는 아래층 큰방에 보성전문, 연희전문, 중앙불교전문, 경성제대 학생 40명을 앞에 두고 드디어 우리들이 국가를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조선이 독립됐다! 안재홍의 뜨거운 연설을 들은 문제안의 눈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해방 당일부터 좌파들이 정국 주도권을 잡아가는 모습에 우익 인사들은 말 못할 초조감을 느꼈다. 해방 무렵 양주 덕정에서 몸을 피해 있던 민족 변호사 이인(1896~1979)은 서둘러 경성으로 향했다. 15일 저녁, 우익 인사들은 송진우의 원서동 집에 모여 냉수로 축배를 들고 있었다. 송진우는 모인 이들에게 해방 직전 이쿠타 기요사부로 경기도 지사 등으로부터 협력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인은 정치는 현실인데 몽양과 민세(안재홍)가 비록 불순하기는 하나, 불과 반일 간에 몽양의 천하가 된 것처럼 그 기세가 충천하는듯하다. 만일 이대로 간다면 전도가 암담하다!”고 말했다. 좌익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빨리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일왕의 항복 연설문이 담긴 1945816일치 <매일신보>

이인은 일제 치하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여운형과 아홉 차례의 옥고를 치른 안재홍을 변호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중재로 162시 여운형과 송진우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여운형의 측근 이만규의 기록을 보면, 여운형이 국가의 큰일이니 허심탄회하게 나와서 대중의 신망을 두텁게 하고 대사의 차질이 없게 하자고 말했지만 송진우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송진우 쪽의 기록인 동아일보사의 <독립을 향한 집념>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공산주의자도 못되면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고 여운형을 만류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좌파 중심으로 어서 빨리 건국 준비를 하자는 여운형과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는 송진우의 의견 대립으로 해방 직후 첫 좌우합작 시도가 실패한 것이다. 이때 시작된 좌우갈등의 불씨는 미-소 냉전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제약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일본인 증오 말고 포용을

해방의 소식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16일 경성 시내엔 거대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총독부의 약속대로 이날 아침 여운형의 입회 아래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대거 석방되자, 그 환영 인파를 중심으로 불어난 군중이 경성 시내를 휘감아 돌며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다. 이 열광에 무리에 이제 곧 경성역에 소련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후 310. 마치 조선인의 독립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선포하는 것 같은 지금 해내·해외 3000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로 시작하는 안재홍 건준 부위원장의 연설이 울러퍼졌다. 하지만, 기대했던 소련군은 오지 않았다고 조선인들은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5815일 해방을 맞아 서울 시민들이 남산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해방을 맞는 조선인들은 머잖아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좌우갈등이라는 거대한 불씨를 품은 한반도는 분할 점령이라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매일신보> 24일 “조선에 관하여서는 자유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하에 두고 각각 군정이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 민중들을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해방 당일 밤 조선건준위 긴급 구성.. 안재홍 부위원장 역사적 대중 연설

갑작스런 해방·무모한 충돌 막으려 처절한 보복 아닌 화해·협력 호소.,, 퇴각 일본에 무력자제 경고 의미도

해방의 감격이 잦아든 19487월 안재홍은 “8·15 이래 실망, 실망에 떨어져 들어가고 있는 민중이 기뻤던 것은 816일 뿐이었다고 개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70년 넘게 이어지는 분단과 골육상쟁의 비극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었다. 8·15는 일제의 압박 속에 시름하던 조선이 해방된 가장 기쁜 날이 동시에 지금까지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가 시작되는 가장 어두운 날이기도 했다.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957766.html#csidxebfb42eec77b166b0d3bc6c3b4bd4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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