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함께 했던 고무 지우개.. 연필 쓸 일이 많지 않다보니 긴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쓸만하지만, 지우개를 싸고 있던 보호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갑니다. 어느 가난한 프랑스 유학생이 귀국 길에 선물로 전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고국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주머니를 가늠했을 그 모습이 문득 어른거립니다. 몽블랑 만년필은 아니었지만, 삼척안두를 굳건히 지키는 인드라망의 징표입니다.
인간관계도 사연을 쓰고 지우고, 애증을 주고 받으며, 닳고 닳다가.. 언젠가는 지우개처럼 사라질 터이고, 결국에는 피안을 찾아 공수래공수거로 그렇게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곁을 지켜주고 도움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죄책감의 피해자가 되었을 이들에게는 사죄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끝까지 죄를 안고 버티며 지우개 하나 챙길 줄 모르던 귀태.
사람같지 않은 언행을 고집하다 참회의 기회도 놓친 채 지옥문을 들어설
어떤 중생의 임종이 더욱 안타까운 소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