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도 사연을 쓰고 지우고, 애증을 주고 받으며, 닳고 닳다가.. 언젠가는 지우개처럼 사라질 터이고, 결국에는 피안을 찾아 공수래공수거로 그렇게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곁을 지켜주고 도움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죄책감의 피해자가 되었을 이들에게는 사죄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끝까지 죄를 안고 버티며 지우개 하나 챙길 줄 모르던 귀태.
사람같지 않은 언행을 고집하다 참회의 기회도 놓친 채 지옥문을 들어설
어떤 중생의 임종이 더욱 안타까운 소이입니다.
전두환은 대통령 호칭이 오래 전에 박탈된 범죄인이다.
학살자 전두환의 죄 용납할 수 없다 등록
:2021-11-24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에 미국 시사지 <뉴스위크>는 “이번 한번만은 죽음이 인간 입술에 미소를 가져다주었다”고 썼다. 전두환씨가 죽었다. 1979년 12월12일부터 1988년 2월24일까지 8년여 동안 대한민국을 철권통치한 독재자였다. 그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민주화를 짓밟고 광주시민 수백명을 학살한 죄를 용서할 수 없지만 끝내 사죄하지 않고 생을 마감한 죄 역시 용납되기 어렵다.
전두환은 군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만 골라서 주도한 인물이다. 육사생도 시절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하는 데 앞장섰다. 군에서 금기시된 사조직(하나회)을 만들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이어서 5·17 쿠데타로 정권을 도둑질했다. 재임 시절에는 파충류적인 식성으로 재산을 긁어모았다. 독일 주간지 <슈테른>이 “1995년을 빛낸 국제 8대 사기꾼” 2위(노태우는 3위)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군인으로 입신했으나 군인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 그래서 군과 나라의 명예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다. 전방부대를 빼내어 쿠데타에 동원한 처사부터, 5·17 이래 걸핏하면 내세웠던 ‘국가안보’가 얼마나 허구투성이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죄상은 이것만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정의를 짓밟으면서 허울 좋은 ‘민주정의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양심세력·개혁인사들을 용공좌경으로 몰아 탄압했다. 수많은 민주인사가 살해·투옥되고 언론이 문을 닫거나 통폐합되었으며 교수·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돌이켜 보면 전두환 8년의 폭정이 그의 죄과만은 아니다. 그에 동조하여 5공 정권을 세운 정상배·군인·언론인·지식인·종교인·법조인들의 합작품이다. 이들은 전두환을 우상화하면서 끼리끼리 동종교배를 통해 감투와 세력, 먹을거리를 챙겼다. 청와대 보좌진, 총리,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업이나 언론사 대표가 되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면서 전두환을 지켜주었다. 저들은 독재자에게 변명의 멍석을 깔아주고 사실 왜곡의 양념을 쳐주면서 세력을 유지하고 국민을 억압하였다. 그래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검찰이 나오고, ‘인간 전두환’으로 신격화시킨 언론사가 급성장하고, 조찬기도회를 열어주고 대형 교회가 되었다. 지금도 5공의 잔재는 도처에 활개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행세한다.
맹자는 “백성을 학대한 죄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했고,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죽은 자에 대한 관용이 미덕처럼 되고 있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죽음에 국장이나 국가장을 치르고, 생전의 죄상보다 소소한 미담이 채색된다. 친일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역사가 흙탕물이 되고 현대사가 오염되고 있다.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는 유력 정치인이 나오고, 공적으로는 문제가 많지만 사적으로는 인연이 깊어 조문한다는 정상배가 적지 않다. 전두환의 죽음을 계기로 공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포용성이 깊은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역사에 대해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가 크다”고 말하였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죽었을 때 프랑스의 지성 장폴 사르트르는 〈르몽드〉에 “프랑코와 같은 독재자가 자기 침대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었다니”라며 개탄했다. 전씨와 더불어 역사와 겨레에 큰 죄를 지은 ‘생존 동업자들’은 이 기회에 ‘죄닦음’으로 속죄의 길을 찾았으면 한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because/1020664.html#csidx67c31ac4508364c961d3e2674ce00fe
전두환 부고에 부쳐…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1-11-23
1996년 2월26일. 전두환씨가 법정에 선 날이다.
12·12 군사쿠데타 주역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씨가 23일 사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도상 ㅣ 소설가
호남에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날 아침, 서울 인사동으로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윤상원’ 전시회를 보러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버스 차창 밖으로 초겨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윤상원을 오랫동안 그려온 하성흡 작가를 생각하다가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한순간, 멍해지더니 수많은 장면이 눈앞에 영화처럼 흘러갔다. 오래된 슬픔을 창문에 새긴 채 금남로를 바라보고 있는 전남도청이 떠올랐다. 그리고 인사동의 전시장에서 윤상원을 만났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이 남긴 말이다. 윤상원은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전투에서 전사했다. 반면에 전두환은 전남도청을 살육의 현장으로 만들고 승리했고 대통령이 되었다.
어느덧 41년 전의 역사였다. 윤상원은 전남도청에서 패배를 기록하고 전사했다.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부활하여 “추모되는 기억이 아니라 살아 격돌하는 현재”(신동엽문학관 누리집)가 되었다.
전두환은 전남도청에서 승리한 이후,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수배와 고문과 투옥의 기술을 품은 유전자까지 계승했다. 광주에서의 학살은 물론이고, 그 후에도 꾸준히 은밀한 죽음을 자행했다. 군대로 강제징집된 학생들을 사고로 위장하여 살인했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고문하다가 살인했고, 백골단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면서도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살인뿐만 아니라 감옥이 넘쳐날 정도로 투옥자도 많았다. 대학 교정은 물론이고 강의실까지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스며들어 감시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수배자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딸과 아들이 시위에 참여하면 부모를 감시했고 끝내는 직장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 분단체제를 이용해 간첩을 수시로 조작하여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쫓아냈고 블랙리스트를 이용하여 취업을 철저히 막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두환이란 존재는 민주주의로 나가는 길의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가 누르면 누를수록 민중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대학에서 탱크와 정규군이 사라지자 학생들은 맨주먹을 높이 들었고, 공장에서는 민주노조를 건설하느라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농민들도 생존권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전남도청의 마지막 날, 시민군이 백기를 들어 계엄군을 맞이하지 않고 피 묻은 깃발 아래서 죽어간 이후, 민중은 단 하루도 깃발을 내리지 않고 투쟁하고 투쟁하여 마침내 6월항쟁을 이루어내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전두환 덕분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의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가열찬 투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한 윤상원은 금남로에서 종로에서 광화문에서 시청 앞 광장에서 ‘수천 수십만의 윤상원’으로 부활하여 전두환에게 맞섰다. 전태일을 계승한 윤상원은 박종철로 이한열로 다시 부활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곤 했다. 윤상원을 부활하게 만든 전두환이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전두환은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날마다 죽어야만 했었다. 그림으로 죽고, 노래로 죽고, 시로 죽고, 영화로도 죽어야 했다. 역사의 법정에서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백담사로 가서 숨어야 했고,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전두환은 승리하고도 몰락했던 것이다. 그는 상처를 확장하는 원흉이었고 살아서도 무덤에 갇힌 과거로 41년을 살아야만 했다. 영광은 짧았고 굴욕은 길었다.
전두환은 죽는 순간까지 광주항쟁을 능멸했다.광주에서의 발포명령을 부인했고, 인민군의 개입을 주장했으며 실정법의 법정에서 조차도 뻔뻔한 변명과 위선으로 일관했다. 심지어는 자서전까지 출간하며 공개적으로 학살을 부인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어떤 성찰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역사에서 전두환처럼 처절한 패배자가 또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자들이 있는 이상, 5·18광주항쟁과 6·10항쟁 그리고 촛불항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0485.html#csidxe3300c9f03c38119c8031f0ecf0d2fc
전두환 사망 전한 국내·외 언론들…"전 대통령" vs. "잔인한 군부독재자" 박미라 기자 2021.11.25
국내 주요 언론들
"전두환 전 대통령
서거·별세" vs.
미국 등 주요
외신들 "군부독재자 전두환
사망"
전두환은 법적으로 '대통령'이란 호칭 오래 전에 박탈
쿠데타의 수괴. 전두환.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연합뉴스
(미디어인뉴스=박미라 기자) "전두환,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부정적 유산으로 빛 바래"-뉴욕타임스
대통령을 지냈던 전두환이 23일 사망한 데 대한 국내와 해외 주요 언론의 보도에서 온도차가 드러나고 있다.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대부분의 국내 매체들이 23일 속보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전한 것과 달리 미국을 비롯 해외 주요 언론들은 전두환을 '군부 독재자, 잔인한 독재자' 등으로 그의 생애를 조명했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전씨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잔인하며,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라고 평가했다. 또 재임 시절 이룬 경제성장이 그의 부정적 유산으로 빛을 바랬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23일(현지시간) 전씨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980년대 한국을 철권통치 했으며, 공수부대를 동원해 수 백명의 민주화 시위대를 살육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전씨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으며, 경남 출신의 육군 친구들과 함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군사 반란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이어 계엄령을 선포했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군을 투입해 몽둥이와 총검을 휘두르게 하고, 발포도 했다고 전했다. 이 사건으로 19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집계됐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은 사망자 수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인용해 광주의 사건은 "한국의 젊은 세대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준 잔학 행위이자 비극이었고, 이들 대다수는 미국에 극도로 비판적이게 됐다"고 전했다. 스트로브 전 한국과장은 "젊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광주 학살'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배신의 증거라고 받아 들였다"고 분석했다. 또 "레이건 전 대통령이 전 씨의 인권 유린에 대해 '조용한 외교'를 펼치자 미국이 한국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굳어졌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도 전 씨의 쿠데타를 예상치 못하고 당황했으며, 당시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 중 미국 당국자들의 통제를 받는 이들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국 언론이 전 씨가 광주에 군을 투입한 데 대해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고 보도했다고 덧붙였다. 스트로브 전 과장은 이에 대해 전 씨가 "한국 대중뿐 아니라 미국도 조종했다"고 밝혔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신문은 또 "전 씨가 재임 중 '사회정화 정책'으로 야권 인사, 학생운동가, 언론인들을 대거 고문실로 쓸어 넣었다"며 '잔인한 재교육'으로 수 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왼쪽부터) 뉴뇩타임스, 가디언, 로이터. "(군부)독재자 전두환 사망"으로 적고 있다.
◆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
'월스트리트저널' 신문도 전씨가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 그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했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전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전 전 대통령의 유산은 대체로 그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규정된다"며 "한국이 번영한 민주국가가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과하지 않으며, 부인하고, 전혀 후회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그의 가장 악명 높은 행동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인 억압이었다"며, "그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쏴 수 백 명이 사망했다"고 지적했다. 'LA타임스'는 미국이 당시에 개입하지 않고 전 씨의 통치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면서 반미주의 정서와 시위가 퍼졌고, 아직까지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전 씨의 재임 중 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거리시위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열기를 더해 갔다고 평가했다. 결국 전 씨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따랐고, 한국의 민주화가 분수령을 맞았다고 전했다.
'AP' 통신은 전씨가 군부 독재자로 197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화 운동가들을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재임 중 비위로 수감됐었다고 전했다. 또 1980년대 그의 재임 기간 수 백 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목숨을 잃고, 수 만 명이 수감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 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 뒤 일부 자유화를 허락했고, 한국 역사상 첫 대통령 직선제를 허용했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전씨를 둘러싼 한국 내 논란도 전했다. 그의 사망이 알려진 23일 한국 언론 중 일부는 '전 전 대통령'이라고 보도했지만 나머지는 단지 '전 씨'로 지칭했다고 전했다.
영국의 정론지 '가디언(Guardian)'지 역시 미국 매체들과 함께 "한국의 전 군사독재자 전두환 90세로 사망"이라면서 "전두환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8년간 대통령직에 있었고 악명 높은 광주 학살을 주도했다"고 전했다.
'로이터'는 국내 언론을 인용해 "1979년 군부 쿠데타 이후 대대적인 민주화 시위 촉발에도 철권통치를 단행한 전씨가 향년 90세로 숨졌다"면서 "(지병인) 다발성 골수종(혈액암)에 차도를 보이다가 결국 사망했다"고 전했다. '로이터'는 1979년 전씨가 주도한 12·12 쿠데타와 이후 이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 한국의 제11·12대 대통령 재임 당시 철권 통치로 민주화 시위를 촉발한 사실 등에 대해 전했다.로이터 통신 역시 군부독재자 던두환 사망으로 적고 있다.
일본의 NHK 방송은 "1980년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한편,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던 전 전 대통령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도 전 대통령이 서울 자택에서 숨졌다며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혼란기를 틈타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이 1980년 대통령에 올라 8년간 군사 독재를 펼쳤다"고 전했다.
◆ 국내 매체, 전두환 전 대통령 vs. 전두환씨
국내 매체의 경우 '조선·중앙·동아·한국일보' 등 이른바 보수지들의 경우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표현한 반면 진보성향에 가까운 '한겨레·경향' 등은 전두환 씨로 적었다.
주요 방송 매체의 경우 'KBS·MBC'는 전두환 씨로 'SBS'는 제11대, 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로 표기했다.
종편 TV인 'ytn·jtbc'는 전두환 씨로, 'TV조선'· '채널A'· 'MBN' 등은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고 적었다.
또 국가기간 통신사인 '연합뉴스'와 '뉴스1·뉴시스· 등 민영 통신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다뤘으며 ·한국경제·매일경제·머니투데이' 등 경제지들 역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적었다.
한편 전두환은 법적으로 '대통령'이란 호칭이 오래 전에 박탈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이름 뒤에 '대통령'이란 호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전두환 제거 역쿠데타 계획 :2021-09-28
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이 위컴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위컴은 거부했다.
위컴의
거부에는 군령 체계 위반과 안보 공백을 초래한 군사행동을 미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확인시켜줄 필요성과
함께,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 장성이 역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갖고 미국 쪽에 접근한 것이다.
지난 9월16일 외교부는 미국 카터 대통령 기록관으로부터 전달받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비밀해제 문서 사본들을 공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전두환 세력에 대한 군부 내 역쿠데타 움직임에 관한 문서로, 1980년 2월1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 본부에 “이범준 장군으로부터 12·12 쿠데타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으며, 위컴 주한미군사령관도 군부 내 추가적 소요의 조짐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2·12 쿠데타는 1979년 12월12일 전두환의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부 권력을 장악한 반란 행위였다. 이 사건이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당혹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안보의 공황 상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서울로 끌어들인 병력은 서부전선 방어의 핵심인 전방 9사단 1개 연대와 제2기갑여단, 30사단 1개 연대였다. 더욱이 이 부대들은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병력이었다.
용산 미8군 지하 벙커에서 쿠데타 상황과 배후세력을 파악한 노재현 국방장관은 한국군 1군단의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에 서울 시내 진입 준비를 명령했으나, 내전을 우려한 위컴의 강력한 만류로 물러섰다. 그사이 전두환 그룹은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자신들에게 필요한 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쿠데타군의 병력 출동을 막지 못한 상황에서 진압군 출동을 막았던 위컴의 조치가 전두환의 반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이 위컴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위컴은 거부했다. 위컴의 거부에는 군령 체계 위반과 안보 공백을 초래한 군사행동을 미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확인시켜줄 필요성과 함께,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표현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위컴은 한국군 당국에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전방병력 무단이탈에 책임 있는 장성들의 군법회의 회부를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 장성이 역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갖고 미국 쪽에 접근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글라이스틴 회고록과 위컴 회고록에서 내용이 다른 부분들이 노정되지만,
상황의 전체적
흐름은 거의 일치한다.
한국군 장성이
제공한 정보 가운데 민감한 내용은 전두환의 당초 계획은 군권 장악 후 민간 정부를 탈취하는 것이었으나 미국의 완강한 태도로 계획을 잠시
미루고 있다는 정보,
비육사 출신 장교
90%와 육사 출신
장교 50%가 전두환을
반대한다는 정보,
30여명의 장성급
장교들이 전두환 제거를 계획한다는 정보였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역쿠데타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조금도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한계가 따랐다.
우선 쿠데타
주역들의 정체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고는 했으나 또 다른 전두환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정보가 없었다.
더욱이 역쿠데타
동원 병력이 얼마나 되며,
유혈사태 없이
전두환 세력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12·12
반란과 같은
안보의 혼란을 다시 겪는 일이었다.
워싱턴은 역쿠데타 쪽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전두환에게도 그 사실을 알린 뒤 향후 민간 정부를 넘보는 일을 기도한다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역쿠데타 사건’을 매듭지었다. 워싱턴이 이런 조치를 취하기까지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인 그는 글라이스틴과 위컴에게 군 통치권자가 되어버린 전두환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미국에 없음을 지적하고, 워싱턴은 한국의 민주주의보다 안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상기시켰다고 했다.
12·12 쿠데타는 시기적으로도 운이 좋았다. 쿠데타 2주 뒤인 12월26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데탕트가 완전히 사라져버림으로써 워싱턴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대통령선거를 앞둔 카터 민주당 정부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쿠데타 사건’ 후 신군부가 15명의 고위 장성을 제거한 것에 대해 위컴은 회고록에서 “역쿠데타 계획 정보를 갖고 찾아왔던 장성은 제거 대상에 없어 계획의 실체는 비밀로 남겨졌다”고 언급했다. 이 언급은 그 장성이 전두환 측의 위장 인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전두환이 역쿠데타 계획이라는 위장극을 연출하여 미국의 본심을 알아내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컴이 전두환을 만난 것은 12·12 반란 두달이 지난 1980년 2월 중순이었다. 한국의 군부 실세와 관계 단절이 계속될 경우 한-미 안보체제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이 만남에서 전두환은 “자신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앞으로 행동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위컴의 회고록은 전한다. 그 만남 뒤 위컴은 상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전두환은 자신의 운명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지식이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이 국제사회에 미치게 될 중요성에 대한 지식은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발견했다”고 썼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말이 ‘운명’이다.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의 총성은 전두환에게 운명의 전주곡이었다. 보안사령관인 그는 암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제외하고 박정희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았다. 돌발 사태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이 보안사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의 ‘정치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박정희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슴 깊이 품었다면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심정과 흡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정동의 총성이 쿠데타의 일환이라면 쿠데타 세력과 맞설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에게 병력을 태릉 육군사관학교로 긴급 출동시킬 것을 요청한 데 이어,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에게 원대복귀를 요청했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암살범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때였다. ‘하나회’ 멤버들이 실전부대 사단장으로 포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12·12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지닌 무력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력의 대상이 광주 시민 전체가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운명이기도 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3076.html#csidxdb5eeedc5c44a8bbc98526134bc805d
“방관자였던
우리에게…‘무얼
하고 있는가’
묻고
떠난 친구 김의기”
등록
:2021-11-25
정대하 기자
[전두환
사망 -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5·18
때
상무대 근무한 정수연씨.. 당시
참옥한 학살현장 간접 경험.. 전씨 사망 듣고 친구 김의기 떠올려
1980년 5월27일 광주가 강제로 진압되고 사흘 후 광주 학살을 알리다가 투신해 숨진 김의기 열사와 대학 동기 정수연(왼쪽)씨가 1978년 11월에 찍은 사진. 정수연씨 제공
끝내 반성하지 않고 세상을 뜬 전두환씨는 5·18민주화운동 생존자나 희생자 유족 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과받지 못한 이들’의 아픔은 상흔으로 남게 됐지만, 트라우마는 피해자들만의 것은 아니다. ‘목격자’로서 당시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던 이들에게도 치유될 수 없는 고통을 남겼다.
5·18 시민군으로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염동유씨 인터뷰 기사(<한겨레> 24일치 4면)를 보고 연락해온 정수연(65·경기 용인시)씨도 그런 이 가운데 한명이다.
“피비린내 났던 비극적인 1980년 5월, 광주 군 상무대에서 일등병 군인으로 근무 중이었다”는 그는 25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군부대로 출퇴근하는 단기사병들한테 군인들이 총검으로 부녀자들을 찌른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육군 최대 군사교육시설인 상무대는 당시 전남 장성으로 이전하기 전이어서 광주에 있었다. 57통신대대 의무병이자 대대장 당번병이었던 정씨는 당시 지원부대 소속이어서 총알 없는 카빈총을 들고 야간보초를 섰다.
“그때 사람들이 죽어 왔다고 해서 (직접) 가서 본 거죠. 눈알이 튀어나오고, 복부의 창자가 나오고…. 총상이 상처가 크잖아요.” 정씨는 5월27일 5·18항쟁이 진압된 뒤의 상황도 기억이 생생하다. “잡혀 온 이들의 윗옷을 다 벗겼어요. 총알이 나오면 등바닥에 (매직으로) 총기소지라고 쓰고요. 총알을 입에 넣어 물게 하고 종아리를 밟고 두들겨 팼어요. 기절하고 난리가 났지요. 군인들이 인간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영내에서 광주학살을 간접경험한 정씨는 일기장에 그때의 충격적인 심경을 담은 시 5편을 남겼다.
“…함성/
총성/
아우성/
그리고,/
어둠이.
밤이
갔다./
하늘이
밝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늘은
시치미다
젖은 땅 축축한
세상/
그리고,
죽음이 아침을
노려본다…”
(1980년
5월22일·‘함성과
총성’)
경기도
용인에 사는 정수연씨는 1980년
5월
상무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광주의 참상을 목격했다.
정수연씨
제공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김의기 열사 묘. 김의기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23일 전씨 사망 뉴스를 듣고 정씨는 서강대 무역학과 76학번 동기인 김의기(1959~80)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고 했다. 김의기 열사는 5·18항쟁이 피로 진압된 직후인 5월30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적힌 유인물을 뿌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숨졌다.
농민운동 행사에 참석하려고 광주를 찾았다가 그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김의기 열사는 유인물에서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 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물었고, 5·18 뒤 패배감에 빠져 있던 많은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
정씨는 “5·18 직전에 휴가를 나와 교정에서 만났던 김의기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며 “군인이었던 나는 그때(5·18민주화운동 때) 방관자였을 뿐인데,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염동유씨를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867.html#csidx7d0f3f364c952b4961cf39afd3f266f
“전두환 후예들 지금도 득세…어설픈 반성보다 과거 청산이 먼저” 등록 :2021-11-25 최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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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사망 -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김규복
목사,
대전서
재심 열려..80년
5월
시위 주도했다 옥살이.. “당시
받은 처벌 부끄럽지 않아, 언제라도
그런 상황이면 나설 것”
김규복 목사. 강민구 대전문화연대 대표 제공
“며칠 전에 죽은 전두환씨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하기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는 것을 알았고, 이를 폭로하기 위해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피고인석에 앉은 김규복(69) 목사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떨리는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담담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그가 말을 이어갔다. “(당시 받은 처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대전지법 형사8단독 차주희 부장판사는 25일 오전 김규복 전 대전빈들교회 담임목사의 계엄법·포고령 위반죄 재심 공판을 열었다.
김 목사는 1971년 연세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강제징집됐다. 1979년 12월 복학한 그는 이듬해 5월 서울에서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해 현 정부를 짓밟고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하려 한다.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내용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담긴 유인물을 1만여부 만들고, 연대생 1천여명의 시위를 이끌었다. 수배자 신세가 된 그는 6월 뒤늦게 광주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각 대학 지도부와 도심시위를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월 경찰에 검거됐다. 1981년 1월24일 군법회의에서 계엄법·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 목사는 출소 뒤 대전으로 내려와 대전신학대와 장로교신학대에서 공부하고, 대전 대화공단 한복판에서 산업선교에 뛰어들었다. 이후 빈들교회를 세워 빈민과 이주노동자, 환경·평화운동에 헌신해온 세월이 30여년이다.
지난 3월 대전지검은 직권으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에서 정한 특별재심 조항에 근거해 김 목사 재심을 청구했고, 10월21일 대전지법은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며 재심을 결정했다.
지난
24일
<한겨레>와
만나 1980년
5월
상황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김규복 목사.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이날 재심 공판에 나와 담담히 ‘후회 없던 그날’을 얘기한 김 목사는 10여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서다 경찰에게 붙잡혀 당한 고문 후유증이다.
그에게도 23일 전두환씨의 죽음은 마음속 상처를 후비는 큰 충격이었다.
“반성하지 않는 전씨의 후예들이 지금도 득세하고 있고, 기득권을 지키려 버티면서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고 있지요. 전씨가 죽었으니 잔존 세력도 이제는 꺾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재판 뒤 <한겨레>와 만난 김 목사는 “80년 5월 광주의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에 평생을 광주시민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며 “전씨의 죽음은 어설픈 반성보다도 진정한 과거 청산이 우리의 사명임을 깨우치게 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의 재심 선고공판은 12월9일 열린다.
최예린 기자floye@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1020852.html#csidx2321bd8378f1cb28948c440e4cca57c
“뼈도 못 찾은 내 아들…전두환 고놈 말없이 뒤져 속 터지요” 등록 :2021-11-25 김용희 기자
[전두환
사망 -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
‘5·18
실종자’
당시
17살 임옥환군 어머니 김진덕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아들이 실종된 김진덕씨. 김진덕씨 제공
“죽기 전에 우리 아들 뼛조각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전두환 고놈이 말 한마디 않고 뒤져부러 속이 터지요.”
전남 고흥에 사는 김진덕(77)씨는 2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분노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 아들 임옥환(당시 나이 17·조대부고 2년)군은 1980년 5월 고흥 집으로 가기 위해 친구들과 자취를 하던 절을 나섰다가 지금까지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난리가 났다는 소식에 매일 옥환이와 전화통화를 했다. 19일 저녁 ‘엄마, 나는 괜찮응께 걱정 말어’라고 옥환이가 말했는데, 이게 마지막 통화였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임군과 전화 연락이 되지 않자 22일 광주를 찾았다. 버스가 다니지 않아 화순에서부터 걸었다. 임군이 머물던 절에서 “옥환이가 21일에 집에 간다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김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임군이 향한 방향인 조선대학교 뒷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들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등 광주 전역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만 아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임군이 죽었다고 생각해 6월2일 수의를 준비해 다시 광주를 찾았다. 고향마을 사람들도 임군 찾기에 동참했다. 시민 주검이 안치된 옛 전남도청 앞 상무관을 찾았지만 이미 주검들은 치워진 상태였다. 다시 조선대 뒷산을 찾았다. 계엄군이 입산 허가를 내주지 않았지만 경찰에 사정을 설명한 끝에 산을 올랐다. 계엄군이 버리고 간 소주병, 빵 봉지, 방망이 등만 있을 뿐, 아들의 행방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가매장이나 됐나 싶어 맨손으로 땅을 파보며 다녔지만 허탕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된 임옥환군. 국립5·18민주묘지관리소 제공
훗날 임군과 함께 자취방을 나섰던 친구는 산을 넘던 도중 총소리가 들려 모두 흩어져 도망간 게 임군과의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아버지 임준배씨는 5·18행방불명자 가족회 회장을 맡았고, 김씨 가족은 다른 5·18 희생자 유족과 함께 “아들을 찾아내라”며 광주, 서울 등을 돌며 투쟁에 나섰다. 그때마다 김씨 가족을 감시하고 있던 읍사무소 직원은 “가지 말라”고 말렸다. 김씨에게는 읍사무소 직원이나 전두환이나 똑같이 나쁜 사람으로 보였다.
5·18 연구자들은 임군 실종이 진압군으로 내려와 있던 7공수여단과 관련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계엄군은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시민 저항이 거세지자 광주 외곽 차단작전을 펼쳐 광주를 고립시킨다.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장교 포함 872명)은 이날 오후 조선대 뒷산을 따라 광주~화순 경계지역인 너릿재로 이동했다 . 걸어서 화순 쪽으로 가려 했던 임군 동선과 일치한다 .
아들 유골이라도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은 마음뿐이라는 김씨는 “남편이 ‘살아서 옥환이 뼈도 못 찾고 죽겄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전두환은 편히 죽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시가 인정한 5·18 당시 실종자는 모두 84명으로, 이 중 6명은 2001년 묘지 이장 과정에서 신원을 확인했지만 나머지 78명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특히 무연고 실종자는 정확한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김용희 기자kimyh@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709.html#csidx491eb1acf96142bb1c77814397e4f19
“5·18 뒤 운동권 학생 1152명 군에 격리…아직도 강박증 고통” 등록 :2021-11-25 정대하 기자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 조종주씨
조종주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사무처장.
“군대에서 늘 감시받고 있다고 느꼈지요. 눈치를 봐야 해서 강박증도 생겼고요.”
조종주(58·사진)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사무처장은 24일 “전두환 정권은 5·18 학살에 거세게 저항했던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격리해 좌절하게 하기 위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공작을 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은 5·18항쟁 이후인 1980년 9월부터 학생운동 관련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대로 보내는 ‘강제징집’을 시작했다. 신체검사 등 절차가 생략되기도 했다.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1982년 9월부터 강제징집자들을 대상으로 ‘녹화사업’ 공작을 했다. 녹화사업은 사람의 정신을 붉은 것에서 푸른 것으로 바꾸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안사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친구와 선배, 동지들의 동향과 조직 정보를 보고하도록 하는 프락치공작도 했다. 녹화사업은 1984년 11월 중단됐지만, 보안사는 ‘선도한다’는 의미의 선도공작을 지속했다.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회원들이 2019년 12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 집 앞에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의 책임자인 전씨의 처벌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추진위원회 제공
조씨도 경북대 수의학과 2학년이던 1983년 8월에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조씨는 “2학기 개학하는 날 등교하다가 정문 앞에서 붙잡혀 대구북부경찰서에서 하루 자고 바로 군대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첫 휴가를 나와 탈영했던 조씨는 군 영창에 15일 동안 입감되기도 했다. 이어 군에서 제대한 뒤에는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경남 거창과 경북지역에서 1998년 무렵까지 농민운동을 했다.
조씨는 피해자 300여명이 참여해 꾸린 진실규명추진위 사무처장을 맡아 피해자 구술조사를 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강제징집 피해자는 1152명이었다. 녹화사업 피해자는 강제징집자 921명 등 모두 1192명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이진래(서울대)·정성희(연세대)·이윤성(성균관대)·김두황(고려대)·한영현(한양대)·최온순(동국대)·한희철(서울대)·김용권(서울대)·최우혁(서울대)씨 등 대학생 9명은 군에서 의문사한다.
조씨는 “나는 녹화활동엔 동원되지 않았지만, 많은 분들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고 주변 누군가를 (학생운동 관련자로) 써내야 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해 지금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산다”며 “수치심 때문에 학생운동을 못 하게 하려던 것이다. 고 김두황씨와 함께 징집됐던 ㅇ씨 등 친구의 죽음을 지켜본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규명추진위는 지난해 말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조사 연한은 4년이다. 보안사에서 제출한 관련 자료만도 11만쪽에 이른다. 조씨는 “전두환이 죽었다고 국가폭력의 죄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과 그 하수인들의 과오와 역사적·도의적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며 “녹화사업 등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뤄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폭력이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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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708.html#csidxc9bc31c74040960adcd1ffa5f380694
전두환과 같은 날 세상 뜬 5·18부상자…“원한, 서운함 다 묻고 가네” 등록 :2021-11-24 김용희 기자
계엄군 총탄에 하반신 마비 이광영씨 극단 선택
평생
진상규명·민주화에
헌신…헬기사격 증언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5·18민주유공자 이광영씨.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을 상대로 평생 싸워왔는데…. 이렇게 가버릴 수가 있는가. 그렇게 힘들었던가.”
24일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장례식장에 모인 5·18단체 회원들은 동료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는 전날 전남 강진군의 한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이광영(68)씨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5·18민주화운동 때 척추에 계엄군의 총탄을 맞아 하반신마비 장애를 얻은 이씨는 전북 익산 자택에 A4용지 크기 종이에 몇마디 문장을 남기고 고향 마을에서 세상을 등졌다. 경찰은 이씨가 스스로 차를 몰아 강진으로 이동한 점으로 미뤄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5·18에 원한도 없으려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간다. 아버지께 가고 싶다’고 썼다. 석줄짜리 짧은 내용이었지만, 5·18 이후 40년 넘게 감내해야만 했던 그 고통을 짚어보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지현 5·18부상자회 초대 회장은 “일주일 전에 마지막으로 통화했는데 어제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다. 평소에도 몸과 마음의 고통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결국 이렇게 갔다”고 말했다.
이광영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남긴 유서 일부. 유족 제공
이씨의 동생 광성(61)씨는 “형님은 (최근) 진통제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많이 고통스러워하셨다. 남에게 신세를 안 지려는 성격에 본인의 길을 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가 세상을 뜬 시각은 23일 0시께로 추정된다. 5·18유공자들은 같은 날 오전 9시께 전씨가 숨지자 지독한 악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1980년 ‘진각’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었던 이씨는 초파일을 이틀 앞둔 5월19일 광주 무등산 증심사로 가다가 항쟁에 참여했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호송하는 일을 하다 5월21일 척추에 계엄군의 총탄을 맞았다. 병원 생활 중 환속을 하고 가정을 꾸린 그는 장애를 가진 몸으로 만화방을 운영하거나 학교에 식품을 납품하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1982년에는 5·18부상자회 창립을 주도하고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는 등 5·18 진상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그는 고조비오 신부와 함께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주요 증언자이기도 했다.이씨는 2019년 5월 전두환씨의 사자명예훼손사건 1심 공판에 첫 증인으로 출석해 “1980년 5월21일 오후 2시께 군용 지프를 타고 광주 남구 월산동 로터리 인근을 지나다가 헬기사격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평소 이씨를 곁에서 지켜본 5·18부상자회 창립회원 강상원(59)씨는 “형님은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던졌다. 형님은 고통을 못 이겨 가셨는데 전두환은 편히 죽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심신의 고통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5·18유공자는 매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9월에도 홀로 살던 정병균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한겨레> 2020년 9월3일치 9면) 김명희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올해 6월 발표한 논문 ‘5·18 피해자의 재구성과 집단트라우마 연구방법론’을 보면 1980년부터 2019년까지 극단적 선택을 한 5·18유공자는 46명에 달했다.
김용희 기자kimyh@hani.co.kr
1983년 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던 이광영씨 모습. 이지현씨 제공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705.html#csidxeb9ae326d93da64bc92af68112b1ff6
“전두환은
확신범…사과를
다그칠 게 아니라 응당 처벌했어야”
등록
:2021-11-24
정대하 기자
구독전씨 회고록 분석 논문 쓴 5·18 시민군 심영의 작가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인 심영의 박사.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욕될 것이어서 이름 대신 그라고만 쓴다. 그가, 마침내 죽었다.”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 심영의(63)
박사는 전두환씨가
사망했다는 뉴스속보가 뜬 23일,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짧은 글을 올렸다.
“사과는
무슨,
이라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호통을 치는,
그의 오랜 입이던
홍보비서관.
그의 남편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했던 그의 아내.”
심 박사는 “사람들은 그가 용서를 구하지 않고 죽은 것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정당한 것이지만,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들은 확신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심 박사는 1980년 5월23일 옛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붙잡혀 교도소 안으로 끌려갔다가 헬기로 군 병원으로 이송되는 등 108일 동안 고초를 겪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난 5·18 시민군이었다. 이후 ‘5·18민중항쟁 소설 연구’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로 살아왔다.
그는 지난해 12월에는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문화와 융합> 제42권 12호에 ‘역사적 진실과 자기기만 사이의 글쓰기―전두환 회고록의 경우’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심 박사는 “한국현대사, 특히 1980년 광주 일원에서 발행했던 5·18과 관련해 전두환만큼 상징적인 인물이 없다. 모든 사건은 그로부터 시작하고 그에게서 마침내 종결된다. 그래서 그의 자전적 글인 회고록에서 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했다.
심 박사가 회고록을 통해 분석한 전씨는 “법의 심판마저 수용하지 않는 확신범”이다. 그 근거로 전씨가 “‘내란’으로 판정되었던 ‘광주사태’는 어느 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되더니 어느 순간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역사는 수정되었고… 급기야 신화의 지위를 차지하고 말았다”(1권, 378~379쪽)고 한 부분을 들었다. 그는 전씨가 스스로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1980년 봄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나는) 역사가 사용한 하나의 도구였을지도 모른다”(1권, 20쪽)고 적은 게 그런 맥락에서란 지적이다.
심 박사는 “전두환과 그 일당에게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용서·화해하자는 언설만 난무할 뿐 범죄에 대해 제대로 된 책임을 지게 한 적이 없는 게 문제”라며 “회고록을 보면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반성을 안 하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에게 ‘양심도 없냐?’고 묻는다. (이런 자를 향한 사과 요구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020703.html#csidx2666871e4c4af0f9555a8e383e61d69
“전두환 죽었다고 끝난 일 아냐”…5·18 피해자 국가배상 소송 등록 :2021-11-24 최민영 기자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열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국가배상 청구 소송 기자회견에서 5·18 당시 피해자가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ㄱ씨는 19살이던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언니 집으로 가던 중 공수부대 5명에 붙잡혔다. 군인들은 군홧발로 배를 차고, 손으로 가슴을 주물렀다. 그런 뒤 대검으로 가슴과 등을 찔렀다. 주변에 숨어 있던 학생들의 도움으로 그는 병원으로 옮겨져 살 수 있었다. 입원해 있을 때도 수사관이 찾아와 집회참여 여부 등 신문을 이어갔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무섭다. 딸이나 아들이 늦게 오면 저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안경순씨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인 동생을 잃었다. 동생은 시민군으로 도청을 지키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된 안종필(당시 16살)군이다. 안군이 스러진 뒤 가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아들, 동생을 잃은 슬픔에 더해 ‘폭도 가족’이라는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야 했다. 안씨는 “당시 군인들이 달려들어 짐짝처럼 주검을 하나하나 던지던 참담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는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와 그 가족의 증언이 이어졌다. 특히, 이들은 한마디 사죄도 없이 23일 사망한 5·18 광주학살 책임자 전두환의 죽음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안씨는 “전두환이 죽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 가족들이라도 5·18 피해자들에게 꼭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형호 5·18 부상자회 서울지부장은 “5·18과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25일 (전씨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영안실 앞에 모여, 항의의 뜻을 밝히고 발인하는 날까지 손팻말 시위를 할 예정이다. 저 장례를 조용히 치르게 놔둘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런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 민변 과거사청산위원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5·18 피해자들과 함께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이날 소장을 낸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는 70여명이고, 앞으로 피해자들이 신청하면 추가 소송을 낼 계획이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조영선 변호사는 “5·18항쟁이 민주화운동이라는 평가는 이미 이뤄졌지만, 전두환은 이를 폭도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하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등 정당한 평가를 외면해왔다”며 “그동안 피해자들이 받은 보상 또한 지나치게 낮거나 모욕적이었다.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그 죄를 국가에 묻고자 한다”고 소송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소송은 지난 5월과 7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5·18 보상법)과 관련해 내린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은 5·18보상법에 따라 일정한 생활지원과 보상을 받았으나,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배상을 받지 못했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헌재와 대법원이 5·18 보상법에 따라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보상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손해에는 적절한 배상이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소송을 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최형호 서울지부장은 “5·18 유공자가 된 지도 20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권리를 침해받은 손해를 회복한다는 뜻의) ‘배상’이라는 용어는 쓸 수 없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 공권력에 항거하다 쓰러져 죽고 다쳤는데도, 개인 간 싸움의 피해를 회복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보상’이라는 말로만 보상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민변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어 전씨의 남은 가족들이라도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변은 “12·12, 5·18, 삼청교육대, 강제징집·녹화 선도공작, 형제복지원, 의문사, 그리고 온갖 시국 공안 사건 및 재일동포간첩 조작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살아생전 자행했던 수많은 악행처럼, 진실을 밝히지도 않았고 사과나 반성도 하지 않은 전두환의 죽음은 또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남은 가족들이 5·18을 비롯한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고, 역사 앞에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며, 부정하게 축재하여 숨겨둔 재산을 꺼내어 미납추징금을 완납하는 길이 역사와 피해자 앞에서 조금이나마 전두환의 악행에 대해 속죄하는 길일 것”이라고 촉구했다.
최민영 기자mymy@hani.co.kr
“나는 세탁기 소리에도 덜덜 떠는데…전두환은 편안히 눈 감았다” 등록 :2021-11-24 황춘화 기자
[원풍모방
노조 탄압]
박순희
전 노조 부지부장
“하루
한 번 고문소리·신음
듣게.. 학살자는
말년까지 골프 치다가 집에서
편안히 눈감다니…분노”
‘5월 광주 성금 모금’ 등으로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박순희씨가 수감돼 있던 사이 원풍노조는 ‘노동계 정화조치’로 82년 9월 해체됐다.
사진은 수백명의 경찰이 사내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강제해산시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말년까지 건강하게 골프치다가 집에서 그렇게 갔다니…광주에서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고 수만명을 가슴앓이 시킨 ‘살인마’가 갈 곳은 영원한 지옥 그보다 더한 곳일 겁니다.”
박순희(74·세례명 아그네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은 24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전두환씨가 자택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분노가 차올랐다”고 말했다. 1980년대 그는 강력한 단결력으로 전설적인 투쟁을 벌였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부지부장이었다. 80년 5월 ‘시내의 아스팔트가 피범벅이 되고, 시민들이 부상자들에게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는 광주항쟁의 소식을 듣고 1700명 조합원이 모은 ‘5·18 성금’ 470만원을 전달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당시 원풍모방 조합원들 중에 호남에서 온 여성노동자들이 많았어요. 광주가 봉쇄됐지만 알음알음 조합원 친척이나 이웃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거에요. 조합원들은 내 오빠, 내 동생이 다쳤다고 하니 치료비라도 대자는 마음으로 돈을 모은 거거든요. 그런데 안기부(현 국정원)는 광주는 빨갱이들이 선동한 내란인데 거기에 돈을 가져다 줬으니 우리도 빨갱이라고 하더라고요.”
박순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수배자로 쫓기다 81년 4월 안기부에 잡혀갔다. 16일간 독방에 갇혔다. 안기부 요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24시간 복도에 울렸다. 저 발걸음은 어느 방을 덮칠까. 발걸음 소리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요원들은 하루에 한 번 그를 고문실 앞으로 끌고가 고문소리와 신음소리를 듣게 했다. 고문 받고 쓰러진 젊은 학생들을 보여줬다. 퀭하고 생기 잃은 그 눈들. “나는 지금도 트라우마에 시달려요. 고문소리가 꼭 세탁기 소리 같더라고. 그 소리를 들으면 떨리고 가슴이 조여와서 나는 이 나이에도 손빨래를 합니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사이 70년대 최강 민주노조였던 원풍노조는 전두환 정권의 ‘노동계 정화조치’로 82년 9월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노조를 파괴한 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노조원들의 재취업까지 막았다. 전두환씨는 뒤늦게 5공 비리와 쿠데타, 5·18 유혈 진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수감 2년 만에 특별사면됐다. 되레 노조원들이 자신을 숨기고 숨죽여지냈다. 조합원 일부는 노조를 했다는 이유로 ‘불순한 아내 며느리’가 돼 매맞고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15~16살에 불과했던 대다수의 여성 조합원들은 빨갱이 낙인이 두려워 원풍이라는 말을 꼭꼭 숨긴 채 평생을 살았다. 2001년 이후 원풍 노동자 157명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엊그제 환갑된 우리 조합원이 처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조합원이 2007년 민주화운동 인증서를 받았는데 그때 처음 남편에게 원풍 노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 유공자증을 받고 남편은 미안해 울고, 그는 서러워서 울었답니다. 그 사람이 떠났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모두가 가보지도 못했어요.”
스무살에 방직공장에 취업해 5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지키고 있는 박순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지도위원. 사진 박순희 위원 제공.
순희. 세상에서 가장 순한 계집이되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순한 계집이 어찌 이렇게 모진 삶을 사는지…” 스무살에 방직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한 그는 50년 넘게 지금도 노동·사회운동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그는 전두환씨의 삶과 죽음을 통해 남아있는 이들이 성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사과를 바라지 않았어요. 전두환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는 반성 없이 떠났고 남은 이들이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고 배워나가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더 기술적으로 착취 당하고 있죠. 어쩌겠습니까. 더 버티고 살아남아 인간이 인갑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황춘화 기자sflower@hani.co.kr
“9살에 부랑인으로 갇혀…가해자 용서할 기회마저 뺏겼다” 등록 :2021-11-24
[형제복지원
인권 유린]
한종선
피해생존자 대표
“지금도
척추분리증 고통 시달려.. 함께
끌려간 누나는 정신병원 생활”...
3만명
피해 추정,
드러난
죽음 551명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한종선씨.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기회도 빼앗겼구나.” 23일 전두환씨 사망 소식을 뉴스에서 본 한종선 (45)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실종자, 유가족) 모임 대표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인정하지 않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구나, 누군가 저걸 보고 배우겠구나, 우리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올 수도 있겠구나, 했죠.” 수용자번호 ‘84-10-3618’번이던 9살 아이는 이제 불혹이 넘었지만, 잘 때 불을 끄지 못한다. “무서워서. 형제복지원에서 소등을 하고 나면 약한 아이들은 이불 속에서 두들겨 맞고 성폭행 당하기도 했어요.”
그의 아버지는 구두닦이였다. 어머니 기억은 없다. 세 살 터울 누이는 그에게 달고나를 만들어주곤 했다. 1984년 10월16일 아버지는 오누이에게 새 옷을 입혀 파출소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둘은 검은 지프차에 태워졌다. 형제복지원 행이었다. 나중엔 아버지도 끌려왔다. 1987년 김용원 검사의 수사로 실태가 드러날 때까지, 그는 굶고 맞으며 생존했다. 당시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사람은 3500여명이다. 공식 사망자는 551명이지만 암매장을 봤다는 증언이 여럿이었다. 형제복지원이 부산시가 내 준 땅인 북구 주례동 산18번지 야산에 들어선 1975년부터 따지면, 피해자가 3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지복지원 건물도 수용자들이 강제노역으로 지었다.
악몽은 그의 몸 안에 살아있다.“저는 아직도 밥을 빨리 먹어요.” 형제복지원에서 5분 안에 먹어야 했다. 선착순 몇 명 안에 들지 못하면 맞았다. “아직도 한여름에도 찬물로 샤워하지 못해요.” 또래 아이들과 잠깐 놀다 조장에게 걸린 9살 종선 씨는 한겨울 발가벗겨져 물고문을 당했다. “수술을 두 번 했는데 아직도 허리가 아파요.” 너무 맞아 척추분리증에 시달린다.
누이(48)와 아버지(74)의 시간은 형제복지원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직 정신병원에 있다. “누나는 9살 때 제 사진은 알아봐요. ‘내 동생 종선이 아이가.’ 그런데 나이든 저는 자기를 감시하러 온 형제복지원 조장이나 소대장인줄 알 때가 있어요.” 1987년 종선씨는 서울 소년의 집으로 보내졌다. 누이와 아버지 소식은 2007년이 되어서야 알았다.
지난
2018년
9월5일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가 인터뷰에 앞서 국회 천막농성장 앞에 서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소년의 집을 나온 뒤 구두공장에 취직했다. 사장은 식사 때 “밥 같이 먹자”고 말해줬다. 종선씨는 그가 가족같이 대해준다고 느꼈다.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했다. 사장은 주민등록증이 없던 종선씨 임금을 떼먹었다. 5년 일하고 임금 달라고 하니 “경찰에 신고해 복지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겁나서 도망쳤어요. 혹시라도 또 돌려보낼까봐. 피해 당사자들은 외롭게 살아오다보니 누구 하나 친절하게 대해주면 자기 약점인지도 모르고 다 이야기하게 돼요.”
그는 왜 전두환씨에게 사과를 요구해왔을까? “박인근 원장 혼자 사회정화사업 했나요? 국가 정책이었잖아요. 국가가 키웠고 비호했잖아요.” 형제복지원은 연 10억~20억원 (당시 금액) 국가보조금을 받았다. 전두환씨는 대통령이던 1981년과 1984년 박인근 원장에게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부랑인 격리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간다. 이를 ‘치적’으로 내세운 건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1960년 형제육아원에서 시작한 형제복지원이 1971년 부랑인시설로 탈바꿈 하고 1987년 3천여명을 수용하는 시설로 몸집을 키운 데는 국가의 뒷배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5년 12월 15일 내무부 훈령 410을 발표했다. 훈령은 “걸인, 껌팔이 등 건전한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부랑인을 신고, 단속, 수용 보호하고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하라고 명시했다. 국가가 감금을 승인한 꼴이다. 내무부 훈령이 제정된 해에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법인으로 부산시와 부랑인 일시보호 사업 위탁계약을 맺는다. 박인근 원장은 이 훈령을 근거로 불법감금 등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고 횡령 등만 인정돼 2년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왔다. 형제복지지원재단에 복귀해 2011년 이사장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줬다. 형제복지원 재단은 중증장애인 시설 등을 운영하며 2015년 부산시가 법인허가를 취소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형제복지원
원생들이 바닥에 앉아 있는 사진.
박인근
회고록에 실린 사진으로,
찍힌
장소와 시점 설명은 쓰여 있지 않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 제공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 격리 정책을 확대했다.
1981년
‘부랑인 복지시설
운영개선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1984년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민간 시설에 보조금,
세제 혜택을
늘렸다.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관광객에게 깨끗한
인상을 주고 국민들의 불쾌감을 없애기 위해”
‘사회정화’
공무원을
1만 명 투입하는
등 단속을 강화했다.
“국민의
안녕”을 위한
‘사회정화
사업’은 치적으로
홍보됐다.
형제복지원엔
기회였다.
정부가 알아서
강제노역시킬 수 있는 인력을 공급해주는 셈이었다.
수용자들을 동원해
기업체와 손잡고 수익사업을 벌였다.
정부로서는 값비싼
복지 확대 대신 싼 값에 취약계층을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넣을 수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지만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다.
1986년 말만 따져도
부랑인 시설 36개소에
1만6천명이
수용됐다.
(김일환
<복지는 어떻게
사업이 되는가:
사회복지법인의
역사로 본 형제복지원>,
‘배제에서
포용으로:
형제복지원의
사회사와 소수자 과거청산의 과제’
토론회
자료,
2018년
11월.
등
참고.)
2012년 종선씨는 국회 앞에서1인 시위를 시작했다.모두 지나쳤다.전규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만 멈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제가 전규찬 교수님을 못 만났다면,지금 전화로 인터뷰하고 있는 당신도 부랑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기사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요. 1년 일인 시위 해보고 안 되면 대형교회부터 폭파하려고 했어요.원망이 너무 컸어요.박인근 원장이 장로였거든요.하나님 이름 팔아서 사람을 감금하고 때려죽였어요.”그는 전규찬,박래군과 함께 책<살아남은 아이: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을 썼다.대책위가 꾸려지고 긴 싸움의 시작됐다.피해생존자들은 특별법과 과거사정리법 통과를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400일 넘게 천막농성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과거사위원회가
피해 사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진상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사과하고 피해배상 해야죠.
용서를 하려면
가해자가 진심을 다해 사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런
사과를 보지 못했어요.”
그의 바람은 이런
날이 오는 것이다.
“누나,
이제 집에
가자.”
김소민 자유기고가monduck2019@gmail.com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1020581.html#csidxf5165311ca0659083ffbaf8dc127416
지금도 그를 감싸고 도는 무리들은 천벌을 각오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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