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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4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들

[아침이슬 같았던 이가 떠났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 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그렇게 우린 아침이슬을 먹고 살았다. 김민기가 만든 노래로 허기를 달래며 견뎠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학전 이끈 아침이슬김민기 별세향년 73..  위암 투병하다 21일 눈 감아

 

기자 서정민     수정  2024-07-23 09:19



김민기 학전 대표
. 한겨레 자료사진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 이슬의 마지막 가사처럼, 그는 서러움 모두 버리고 저 너머로 훌쩍 갔다.

김민기 학전 대표가 21일 별세했다. 향년 73.

 

고인은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그가 운영해온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은 창립 33돌을 맞은 지난 315일 문을 닫았다. 재정난이 이어진데다 건강 문제까지 겹치자 김 대표는 결단을 내렸다. 김 대표는 학전의 레퍼토리를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로 투병해왔다고 학전 쪽은 전했다.

고인은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고교·대학교 동창 김영세와 함께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의 청개구리의 집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고, 이때 아침 이슬을 만들었다.




가수 양희은이 19719아침 이슬을 담은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김민기도 같은 해 10아침 이슬’ ‘친구등을 담은 데뷔 앨범을 내놓았다.아침 이슬은 당시 유신 정권 반대 시위에서 널리 불렸다. 정권은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이후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등도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


그는
1991315일 소극장 학전을 세우고 1994년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고자 했다. 동물원·들국화·장필순·박학기·권진원·유리상자 등이 여기서 노래했고, 김광석은 1천회 공연을 했다.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장기 공연을 하면서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여러 배우들이 거쳐 갔다. 학전 폐관을 앞두고 열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는 이런 가수·배우·예술가 50여명이 참여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미영씨와 두 아들이 있다. 빈소는 서울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김영희 칼럼]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기자 김영희  수정  2024-07-22 15:10


지난달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미리엘이라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홍세화 친척의 요청으로 성공회 이대용 신부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를 찾았다. 세례를 받겠냐는 물음에 한참 망설이던 홍세화는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을 감쌌던 미리엘 주교의 관용의 정신이 자신을 이끈 신념이었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영구 목사 또한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않던 시절, 자수성가한 서울대 출신 사업가로 출장이 잦던 그는 친구 박호성(전 서강대 교수)으로부터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를 한번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86년 센강변에서의 운명적 만남이후 그는 평생의 벗이 됐다.

홍세화가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197910월 내무부가 발표한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객이 된 뒤 생계를 위해 야간 택시운전을 할 때, 이영구 부부는 해마다 두차례씩 한국 음식을 싸들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홍세화 가족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오는 데는 임진택·유홍준 같은 벗들의 권유와 출간 알선과 함께, 몇년간 운전을 멈추고 글을 쓰도록 생활비를 대준 이영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런 이영구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도, 자신의 신앙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발인날 아침 가족과 몇몇 지인에게 이 신부를 소개하며 그는 수십년을 곁에 있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한번도 종교를 권하지 못했는데라며 웃었다. 이영구는 40대 후반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 살아오고 있다.



홍세화 가족이 망명객 생활을 하던 당시
, 이영구 목사 부부가 파리를 찾으면 택시운전을 멈추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이영구 목사 아내 임경자, 홍세화 아내 박일선, 홍세화(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사진. 뒤에 홍세화가 몰던 택시가 보인다
이영구 목사 제공

 

1970년대 홍세화 부부의 집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엔 김민기도 있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뒷것들을 떠올렸다. 홍세화도, 이영구도 그런 존재이리라.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은 행진곡풍의 전투적민중가요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왠지 난 이 세상 어딘가에’ ‘강변에서같은 노래가 좋았다. 김민기 노래는 당시 민중가요와 다른 결이 있었다. 다큐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한 그는 권력에겐 반정부 좌익이었지만 그 바탕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2015년 이진순과 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서 죽도록맞던 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말한다. 나중에 운동권 후배들에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게 된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다큐를 통해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적잖다.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나던 날, 그는 달동네 아이들의 공공어린이집 설립 모금공연을 위해 정권의 탄압 속에 아예 몇년간 손에서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았다. 암울했던 1978년 송창식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녹음실을 빌려주고 녹음까지 해줬다는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과로에 연탄가스중독 사고로 숨졌던 전남대 학생 박기순의 영결식에 김민기가 나타나 상록수를 불렀다는 것도 그랬다. 나중에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했던 윤상원은 서울에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위해 내려와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박기순도, 오월 광주 당시 죽음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대변인 윤상원도 편하게 사는 앞것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뒷것이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90년대 이후 학전의 실험을 통해선 연극을 하거나 인디음악을 하면 밥굶는 게 당연시되던 시스템을 바꿔냈다. 가수, 배우뿐 아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90년대 운동판에서 내 강연을 다 헐값이나 공짜로 불러댈 때 처음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정산을 해준 게 김민기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김민기는 2008년 장기흥행 중이던 지하철 1호선공연을 중단하고 아동극을 시작한 이유를 돈되는 일만 하다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많은 자료영상을 사용한 다큐인데도 그의 최근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는 끝까지 뒷것이다.

 

편집인dora@hani.co.kr

 


 

아침이슬, 그 사람                이진순의 열림,    김민기 ()

이진순이 만난 학전 대표 김민기.. 속마음 털어놓은 최초의 인터뷰 
수정  2024-07-22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쟁이,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
그간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김민기 전집>(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막걸리 세 통 들고 나타난 그
자신 드러내길 병적으로 혐오해온 
학전 대표, <지하철1호선> 연출가
그가 발가벗는 심정으로 나왔다.  
15년간 관객 71만명 끌며  매표수입 100억 넘긴 <지하철1호선4000회 끝으로 돌연 중단 선언... 대신 10년째 청소년·아동극에 공.. 세상엔 돈 안돼도 해야 할 일 많아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그랬는데.”

 

-김광석이 노래를 못한다고?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갸우뚱) 일단, 그렇다 치고.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그날들>이라든가 <디셈버>.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돈이 싫은가?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지하철1호선>은 그러나 2008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신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지하철1호선>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시리즈로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 ‘학전 어린이무대시리즈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8000원에서 1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쟁이의 정의가 뭔가?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아침이슬이나 상록수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 ! 뭐 그런 느낌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내 몸서 나간 아침이슬’ ‘상록수’.. 나간 것 백배가 돼 돌아와 버거워
1987년 시청앞 이한열 노제때 백만명 부르는데 앗, 뜨 그런 느낌
,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말의 생동성 처음 깨우쳐준 김지하에게 무한한 고마움 가져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는 전혀나와 무관하고 영향 준 바도 없어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오적>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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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1951331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가 인민군에 피살당해 유복자로 태어남.


 

1963서울로 이사. 재동국민학교(현 재동초) 졸업. 경기중 입학해 미술반 활동.
1966경기고 입학.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 선물 받고 독학으로 연습. ‘친구작곡.
1969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미대 동기이자 고교 동창인 김영세와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활동.

 


1985
년 결혼식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서울 구기동 서울미술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8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사설미술관인 서울미술관은 당대 전위미술을 이끈 곳으로 평가된 곳입니다.

 

1970양희은 만남. ‘아침이슬작곡해 양희은 통해 발표.
1971<오적> 쓰고 도피 중인 김지하 만남.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운동’(김지하) 지향하는 모임 폰트라’(쓰레기 더미 위의 시) 참가.

신정동 야학,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아침이슬’, ‘친구등 담긴 음반 <김민기> 출시.


1972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금지곡 지정된 꽃 피우는 아이불렀다 음반 전량 압수, 동대문경찰서 연행.
1973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 참가.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작곡.


1974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 제작 참여. 10월 카투사로 군 입대.
1975보안부대 소환된 뒤 최전방으로 배치. 군 생활 동안 식구 생각’, ‘늙은 군인의 노래등 작곡. ‘아침이슬금지곡 지정.


19775월 제대.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 동료 공장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작곡. 공장 생활 중 대학 졸업장과 중등교사 자격증 받음.
1978상록수’, ‘밤뱃놀이’, ‘천릿길’, ‘늙은 군인의 노래등 김민기 노래로만 채워진 양희은 공식 음반 출시.

노래굿 공장의 불빛제작. 중앙정보부 연행 뒤 훈방.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감.
197910·26 뒤 전북 김제로 거처 옮겨 소작농 생활.

 


1991년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한겨레신문사가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을 맡아 엔딩곡으로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1981황석영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 광대창립 기념공연. 김제·전주지역 연극패들과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경기 전곡에서 참깨 농사, 충남 보령에서 탄광 일.


1983농촌 생활 접고 서울로 돌아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4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제작.


1985아동 뮤지컬 작업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난 이미영과 결혼.

서울 불광동 두 칸 전세방에서 어머니와 두 조카와 함께 살림 시작. 당시 나이 서른다섯.
1987‘6월 항쟁으로 금지곡 일부 해제. 탄광촌 이야기 담은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1989한살림모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 지냄.

 


김지하 시인(오른쪽)과 함께 술자리를 하던 모습입니다.  좌측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

 

1991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학전 소극장 개관.
1993직접 부른 39곡 수록된 음반 <김민기 전집> 발표.
19945월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1995록 오페라 <개똥이> 공연.
1997록 뮤지컬 <모스키토> 공연.
1999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 포크음악 30주년 기념한 김민기 헌정 공연에 불참.

 


2007년 괴테 메달 수상 독일 정부가 세계적 예술가나 학자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2001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및 연출상 수상.
2007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 수상.
2008<지하철1호선> 종연. 15년 동안 4천회 공연, 71만명 관람.

 


2011년 학전 20주년 19913월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면서 설립된 극단 학전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날 함께해준 이들만으로도 200석 극장을 꽉 채우고도 넘쳤습니다.

 


 

아침이슬김민기 세월호, 나는 그 죽음을 묘사할 자격이 없다”..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김민기 ()



첫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후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가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내 관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어색해 미치겠으니 빨리 끝내 달라며 사진기자를 독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중정에서 원하는 노래 안 만들어 영창으로

 

-사무실에 기타가 안 보인다. 기타 안 치시나?

미쳤어?”

 

그가 짐짓 퉁명스럽게 질문을 걷어냈다. 다시 둘러보아도 기타나 키보드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기타도 없고, 노래도 안 만드시고.

 학전 열고 지금까지 해온 (뮤지컬 번안곡) 작업들이 다 노래하고 관련된 건데 뭐.”


-
왜 대중가요는 더 이상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으시나? 다방 같은 데서라도 당신 노래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간다는 일화가 있던데. 노래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단 말이야.”

 

-당신 노래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에겐 각별한 추억이 담긴 곡들이다.

다시 쟁이얘길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쟁이는 어제 했던 작업을 부정해야 해. 안 그러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꼭 그래야 하나? 화가 중에도 물방울이나 꽃 그림만 연작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 판소리 오래 하시는 분 중에도 주요 레퍼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도 있지만 난 그런 데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아. 계속 더 찾아보고 싶어, 새로운 걸.”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것 아닌가?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그렇게 살았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기타 싱어송 라이터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71년 이후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김영동, 이애주, 김석만 등을 만나면서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1974. 대본 김민기)를 만들었고 78년에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곡, 제작했다. 90년에는 상업적 음악유통망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민족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발굴 수집하는 <겨레의 노래>(주최 한겨레신문) 사업을 감독했고 91년 학전 설립 이후에는 록 오페라, 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음악적인 실험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그의 삶이었다. 아침이슬상록수가 저항가요의 상징이 된 것은 그걸 지은 사람이 김민기였기 때문이고, 김민기 스스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깨치고 나가는 삶이 무언지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2년 그의 앨범이 압수되고 그의 노래가 금지되었을 때 김민기의 나이 고작 이십대 초반,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였다.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통기타 친구들은 주류 문화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던 미대 형이 선택한 길은 그러나 무대도, 화단(畵壇)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김민기는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71년에 음반을 낼 때는 전업가수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 아닌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하려고 했어. 근데 그 71년 판이 압수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학벌 좋고 인맥 좋아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소시민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텐데.

소시민적으로 살았지.”

 

-교사자격증도 있었지 않나? 정보기관에 찍혀서 취직이 어렵다 해도 미술학원 강사나 반주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래 만들어라했을 때 내가 응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길로 풀렸을 거야. 당시에 난 제법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이 있다.”

 

74년 카투사로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75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나게 된다. 중정의 학원 담당이라는 자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노래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들면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 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압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식구생각이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  (‘식구생각’, 1975년 작)

 

-중정요원이 황당했겠다!

군대에 있는데 내가 뭐 거부를 할 수 있나? 만들라 하니 만든 거지. 근데 아무리 걔들이 요구해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그거밖에 안 되는데 어쩌라고?”

 

김민기는 곧바로 사단 영창에 보내졌고 최전방부대로 재배치되었다. 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가 취직한 곳은 부평의 한 봉제 공장이었다. 동료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고, 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때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장의 불빛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호 얘기 무지 하고 싶지만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아니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


누군가 세월호 영화 주제가 요청..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
쓰라 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노래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런데 조사만 받고 구속이 안 되었다.

어차피 완전 포획돼 있는데 차라리 날 좀 구속해줬으면 좋겠더라구. 근데 나도 나중에 안 거지만, ‘저 새끼 잡아 놓으면 영웅 된다, 그래 가지고 안 잡아넣고 고사(枯死)시킬 작정을 한 거야. ‘좋다. 니들이 나를 밑바닥이라 하니 그럼 난 내가 좋아하는 밑바닥으로 들어갈게그렇게 맘먹고 전라도에서부터 (농사일을) 시작한 거지.”

 

김민기는 고향인 익산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배우다가 김제를 거쳐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천평 쌀농사를 지었다. 마을의 청년들과 합세해서 거기서 생산된 쌀을 도농직거래로 팔아 마을기금으로 쓰기도 했다. 시인 황명걸은 당시 김민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친구, 쌀장수 김민기/

영롱한 아침이슬 잔뜩 구두에 묻히고서/

그가 오고 있다”(‘쌀장수 김민기중에서 1984)

 

-10·26이 나고 유신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계속 농사만 지었다. ‘이제 좀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해지겠구나다시 음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아예 농촌 내려갈 때 노래를 잊어버리려고 했지. 아침에 무슨 노래 하나 생각나서 하루 종일 따라붙으면 짜증나잖아. 그런 게 난 얼마나 많았겠어? 기타를 치는 사람, 현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 끝이 무지하게 귀해. 그런데 농사를 딱 시작하는 순간 이게 다 망가지는 거지. 그렇게 지워 버리려고 하다 보니까 지워지더라고 노래에 대한 기억이.”

 

-김제에서 농사지을 때 5·18이 일어났다. 들불야학이나 광주의 문화운동패하고도 평소에 교분이 있었다고 하던데, 광주항쟁에 대한 노래나 공연물을 만든 건 없다.

없지.”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두가지 다. 왜냐면,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 세월호 아이들에 대해서 노래를 못 만드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더 기억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자꾸 세월호 얘기를 물어서 죄송한데.

세월호 얘기, 난 무지하게 많이 하고 싶어.”

 

-세월호가 우리 밑바닥을 다 드러낸 사건이었지 않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효용으로 환산한 우리의 밑바닥. 이런 셈법으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똑같은 생각이다. 세월호 이후에 어떤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보고 주제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 나 박정희가 시켜도 나 그런 거 안 했어. 왜 니들이 날 시켜?’ 그래놓고는 안쓰러워서 내가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라는 노래가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하는 그 노래!

 

거기가 북평이었는데 지금은 동해시인가? 그때 난 고3이었는데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랑 야영을 갔다가 후배 하나가 죽었어. 그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걸 노래로 만든 거야.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 1절하고 2절 가사가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고.

 

1절의 가사는 검푸른 바닷가에어쩌고 서정적으로 가다가 2절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이렇게 나간다고.

1절하고 2절의 간극이 뭐였냐면그 집행부 새끼들! 다 어른들이지.

 

너무 억울했어. 내가 만약에 후배 집으로 연락하러 오지 않았다면 난 그 어른들하고 붙들고 싸웠을 거야. 그 당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강재훈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처럼 이렇게 찍은 거야. 그걸 제품이라고 만든 게 아냐.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 거지.”

 

-다른 사람들 회고에 따르면, ‘김민기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명곡 한 곡을 써내는 천재라고 하던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원주로 공연 가는 버스 안에서 지었고, 술자리에서, 결혼 축가로 즉석에서 곡을 뽑아내는.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구술을 하는 거지. 실제 작업하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지가 않다고. 원래 그런 게 속에 있었으니까 긴 시간 숙성이 되가지고 나오는 거지, 라면 300원에 사듯이 그렇게 되는 게 창작이 아니잖아.”

 

허문도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간다며 거절

 

그는 노래가 군중을 각성시키거나 일깨우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래로 군중을 기만하는 건 더 큰 죄라고 여겼다. 광주학살로 집권한 5공화국 신군부는 1981국풍81’이란 대형 문화축제를 기획했다. 훗날 공개된 정부 기밀문서에는 학원문제를 국풍으로 유도해 축제 속에 매몰시킨다는 국풍81의 목적이 전두환, 허문도의 친필서명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문도를 직접 만나셨나?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 그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고 했지.”

 

그에게 왜 받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 유혹을 물리친 사람한테나 적절한 질문이다. 김민기에겐 애당초 받을 이유가 없었을 뿐, 받지 않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80년대는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전두환 독재에 대항해서 시국선언이나 서명운동을 맹렬히 벌이던 때다. 70년대 당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들이 그 핵심에 있었는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활동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난 민예총에도 가입 안 했어.”

 

-왜 안 하셨나?

그분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현실 참여의 문법이 다른 거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거야. 누군가는 그러지. ‘넌 사람들이 말하는 스타의 자질도 있는데 왜 안 하냐? 너 잘난 척하는 거냐?’ 근데 그런 게 아니라니깐. 나는 한없이 힘들게 내 일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들이 아티스트를 인정해준다면, 샤갈의 그림 한 폭에 모든 우주의 얘기가 다 들어 있는 거야. 그 그림에 정치건 뭐건 다 있다고. 근데 왜! 억울한 거지. 아이쿠, 내 목소리가 이상해졌네. 허허.”

 

김민기는 이 대목에서 격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도 80년대는 쓰라린 기억인 듯했다.

 

-1984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제작 발매해서 노래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런데 그 후 노래운동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노래라는 게 ’()하고 ’()하고의 조합인데, 그 조합관계에서 난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가 많다고. 근데 어떤 애들은 그걸 뛰어넘어서 다 해결한 것처럼 군다 말이야. 한자말이거나 관제화된 말을 막 쓰면서 거기다 음악을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김민기 음악은 70년대 통기타 음악하고도 다르고, 80년대 노래운동 계열하고도 다른, 단독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건 아니고난 미술을 한 사람인데,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고. 에잇이제 (인터뷰어의) 고문 취조가 막바지까지 가네.(웃음)”

 


극단 학전 사무실 한편의 풍경.

김민기 대표가 사용하는 책상과 책상 밑에 이동식으로 마련된 침대가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하 2막장에서 만난 것

 

사람들 뇌리 속에 김민기는 저항가요의 전설이었지만 그는 사실 투쟁가를 목청 높이 외쳐 부르게 하는 전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부를 때나 탁자가 부서져라 군창을 할 때에도,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를 수리해서 땅을 일구고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충청도 탄광에 가서 광부 일을 하거나 목포 앞 김 양식장에 가서 일당 잡부를 하기도 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농사를 짓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한 글을 읽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농사도 그렇고 탄광도 그렇고 모든 게 배움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내 식으로 속담을 만들었어. ‘사람은 웬만해선 안 죽는다. 내가 지하 2킬로미터 탄광에 들어가서 뭘 봤는지 알아?”

 

-뭘 보셨나?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감을 못 잡을 거야. 지하 2킬로라는 막장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연탄가루 같은 게 기다리고 있질 않아.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들만 있을 뿐이야. 광부들이 삽을 들고 퍼내는 식으로 묘사하는 그림이나 영화는 다 가짜라구. 까만 1톤 탄차가 기다리고 있으면, 거기서부터 (머리 위를 가리키며) 대각선 위로 뚫고 올라가는 거야. 그걸 폭파시켜서 탄차에 쏟아 넣는다고. 들어가지고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그런 줄 몰랐다.

긴 다이너마이트 줄에다가 불을 붙여놓고 이~만큼 떨어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지. 불빛이라곤 깐데라(칸테라: 광부 안전모에 달린 휴대용 전등) 불빛밖에는 없어.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멀리서 ~’ 하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서 10센티까지밖에 안 보여.”

 

-폭발하는데 깜깜해진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상상이 안 되는 거지. 뭐가 보인다는 건, 피사체가 있고 발광체가 있어야 할 것 아냐. 근데 먼지가 쫙 몰려오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지. 근데, 어느 날, (코앞을 가리키며) 먼지가 서서히 걷히는데 딱 여기에 나비가 딱 나타난 거야. 어마어마하게 큰 나비가.”

 

-지하 2킬로 깊이의 갱도에? 환상이 아니고?

가만히 보니 그게 나비가 아니라 모기야. 나비만큼 엄청 큰 모기. 광부들이 동바리’(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괴는 나무기둥)를 하나씩 메고 들어가는데, 그 목재에 알로 묻어 들어온 놈이 거기서 부화를 한 거지. 빛을 못 봤으니까 이놈이 길어진 거고. 내 눈에 나비처럼 보일 만큼. 그때 코앞의 그놈한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나?

, 더 살 수 있을래?”

 

지하 막장 깊은 곳 어둠에서 만난 모기 한 마리에게 건넨 반가운 인사. 너 더 살아주겠니?”라는 그의 말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김민기 자신과 막장 인생들에게 건네는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말이 아니었을까. , , 살 수, 있을래?

나 더 얘기해도 돼?”

 

가만히 생각에만 잠겨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물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가지고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는데 내 신분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무슨 북한 간첩이라고, 나쁜 자식들! 그래서 간 데가 목포에서 배로 네 시간 떨어진 하의도인데 김 양식장에 가서 품팔이를 했어. 김은 한겨울에 만월이 되었을 때 배가 떠야 뜯을 수 있지. 난 농사지으면서도 달력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못했는데, 바닷물이라는 게 그렇더라구. 잔잔한 겨울 바다에 대보름달이 떠 있고 거기 배를 타고 들어가. 처음엔 무서웠지. 손이 들어가면 너무 차가울까봐. 근데 딱 들어가니까 물이 따뜻한 거야. 쿨렁쿨렁하는 배 위에서 빨랫줄같이 걸린 것들을 (아래를 보며) 이렇게 건져내야 해.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얘길.”

 

-보는 각도에 대한 얘기?

맞다, 그 얘기! 미술이건 예술이건 중요한 건 시각의 변화. 수평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대각선 위를 앙각으로 보기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내가 아동극에 자꾸 매달리는 것도 같은 이유야. 세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까.”

 

선문답 같은 그의 얘기는 탄광의 모기에서, 겨울 바다의 김 따기,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김민기에게는 소년의 순수와 노년의 달관이 공존한다. 20대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부드러웠고 60대의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정직하다. 변한 것은 김민기가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편협하게 굳어져 간 시선의 각도이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요
다시 쟁이얘길 하자면  쟁이는 어제의 작업 부정해야 해.   안 그럼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쉼표가 아니라 숨표야.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1/1615/16랑 등가라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야..  , 근데 말이 길다, 취했네

 

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2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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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2

 

무명 무실 무감한 인생, 지녀볼래

 

세월이 흘렀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아이엠에프(IMF) 공익광고에서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빛내주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던 방송 장면에 깔렸으며, ‘내 나라 내 겨레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불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같은 노래가 2009년 시청 앞 노제에서 양희은의 노래로 그의 영전에 헌사 되었다.

 

김민기와 함께했던 통기타 가수들은 중간중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쎄시봉의 추억담을 전해 줬고, 그와 함께 문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다수는 정계에서 대학에서 각종 문화예술단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의도 밤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이 들고 남을 거듭하는 중에도 김민기는 그저 울렁이는 쪽배에 올라 보름달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한결같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 데고 찔린 자국이 흠집으로 남아서 오래된 고향집 흙집처럼 파이고 쓸렸다. 그래도 한참을 잊고 달리다 돌아본 자리, 거기 그대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그런 거 없어. 날 고문한 놈들한테 내가 미안하다 생각 들었던 것, 그게 분기점이었던 것 같애. , 함께하자고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으로, 정계로 떠나갈 때는 좀 선선하긴 했지. 나 혼자 남겨놓고 월급 받으러 가는구나 싶어서.(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요즘은 안 보고 산 지 좀 되었지만 4년 전인가 ()지하 형이 박경리씨 <토지>를 뮤지컬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적단 말이야. 상황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걸 다른 장르로 넘기는 순간 그 작가의 필력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디오북인데, 원작을 가장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지.”

 

-그 뒤로 진척이 없나?

더 진행하지 못했는데. 이거 할 수 있는 데가 학전밖에는 없거든.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명이 넘는데. 비록 학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신세지만 그동안 돈 안 되는 거 알면서 같이 일해 왔던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최상일이라고 십년 넘게 노동요를 채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노래들을 거기 집어넣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거기에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그런 대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텐데.

학전 초기에 더러 친구들이 굉장히 진화된 방법인 양 주식회사를 왜 안 만드냐?’고 그러던데, 주식회사를 만들면 주주들한테 배당이 가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은 후원회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걸 마구잡이로 하면좀 자존심 상하지. 회원 가입하면 얼마 디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으면.”

 

-이건 어떤가? ‘돈 안 되는 일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줄, 철없는 사람들구함!

그거야 뭐.(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김민기와 헤어져 돌아오는 대학로 골목에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날렸다. 지난 몇 주 내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다시 입가에 맴돌았다. 한대수가 지은 곡을 그가 불러 1집에 넣은 노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김민기 노래 바람과 나’ 1971)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2024-07-11

읽씹..읽고나서 조용히 씹어먹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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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모님은 종종 저를 ‘뉴스요약 AI’처럼 “요새 그거는 무슨 얘기냐?”하고 물으십니다.
‘읽씹’..“한동훈이가 문자 씹었다는 건 대체 무슨 얘기냐?”하셨는 데..

 지난 1월에 김건희씨가 명품가방 논란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며 비대위원장이었던 한동훈씨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한씨가 이를 읽고 무시했다..국민의힘 당 대표를 뽑는 중에 문자가 공개되 파문이 이는 중이라고 했더니..

이걸 다 읽어달라시니..그래서 장문을 낭독하다가.. 블랙코미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여당대표를 뽑는 선거 쟁점이 아젠다가 아니고, 문자 무시 논란이라. 애초에 가방 받은 게 문제고, 영부인이 대국민 사과 논의를 비대위원장과 문자로 한다는 것도 문제고, 문자 답장 못 받았다며 대국민 사과를 안한 것도 문제고..

‘뭣이 중헌디’? 우리 계속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걸까요?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zNIeW1HqpyJIv5k8X4XHJmtctWmFZ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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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씹..읽고나서 조용히 씹어먹은 죄. 
문자를 받았으면 이모지라도 하나 보내는 게 예의건만
아무런 응대없이 상대를 무시하는 건 욕먹기 십상.

어불성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적어 놓았다면
그런 문자에 대응을 하면 똑같은 인간이 되고 말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최 말 같지 않은 문자라 해도
최소한 예의를 차린 응답은 이 시대의 상식.

그런데 하늘같은 형수, 그것도 여왕마마한테서 온 문자를
두목의 똘만이가 아무런 응대를 안했다면
그건 이미 그 조직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흔한 조폭 영화라면 바로 다음에 두목이 살해되는 게 정석이다.

그렇다고 똘만이가 다시 두목이 되는 것은 대개 아니고
유혈 낭자한 피칠갑 현장이
축구의 극장꼴처럼 기다리기 십상이다. 

영화 끝날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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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씹으로 화제가 된 대머리 똥훈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성형괴물 거니가
야밤에 대화로 풀자며 불러냈다면,
과연 어떤 광경이 벌어질까?

완전군장 때문에 생때같은 사람이 죽은 뒤이니
이번에는 홀딱 벗긴 상태로 얼차려를 시키고 있지 않을까?

야심한 용산 잔디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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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 중인 내가 보낸 문자를 감히 똘만이가 무시해?

누..누가?
누군데? 갸가 미친나?
대체 누구야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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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씹한 똥훈이 잡으려다
내가 죽게 생겼어?
당신 알기나 해?

언제부터 똘만이들이 이렇게 날뛰는거야?
지금 술이 목에 넘어가?
지금 내가 쇼핑 다니게 생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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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이 온다. 
개같지 않은 개는 잡아먹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세상을 위해 마지막 기여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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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사건을 속시원히 교통정리 해주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녀와 함께 주식사기 사건을 주도했던 이종호 (투자회사 블랙펄인베스트의 사장)
그는 현재의 모든 정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그녀가 그렇게 구해 내려던 해병대 별 하나 사단장은..
그녀와 어울리던 골프 친구였고,
그런 만남 속에서 그녀는
그 사단장을 어떻게든 최고의 지위까지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소원을 품게 되었고,
그 소원을 하나씩 이뤄나가던 중에 발생한 돌발사고 (채 해병 사고사)를 만났지만,
그 통에도 그녀의 꿈을 악착같이 현실화시키려다..
그만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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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보다 센 신공이 나타났다

수정
2024-07-11 김종대 |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윤석열 정부의 국정을 예견하는 천공 스승의 신공을 접할 때마다 감탄이 나오곤 했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부터 동해 석유 매장설까지 천공의 예측력은 평범한 사람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는 이종호씨다.

하나씩 살펴보자. 작년 7월 중순의 통화 녹취록에서 이씨는 국방부 장관이 곧 교체될 것임을 확신하며 이번에 국방 장관을 추천했는데 우리 것이 될 거야라고 말한다. 이 예언은 곧바로 적중했다. 9월 초에 이종섭 국방부 장관 교체가 검토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고 9월 말에 실제로 이 장관은 경질된다. 어떻게 이씨는 언론보다 빨리 장관 교체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신공은 계속 이어진다.

7월의 녹취록에서 이씨는 이번에 아마 내년쯤에 발표할 거거든. 해병대 별 4개를 만들 거거든이라고 말한 데 이어 8월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현재 군사 제도상으로는 해병대에서 4성 장군이 배출돼 진출할 수 있는 직위는 합동참모본부 차장밖에 없다. 군 대장은 8명으로 정원이 제한되어 있으니 해병대가 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육군 몫의 대장 1명을 줄여야 한다. 이걸 육군이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으니 해병 4성 장군은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올해 4월에 대통령실은 현 정부 임기 후반부인 2026년 군 정기 인사에서 해병 4성 장군을 만들기로 하고 군의 의견을 수렴 중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씨는 대통령실이 올해 발표할 내용을 어떻게 작년에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군사 문제를 30년 이상 다뤄온 필자도 범접하기 어려운 능력이다. 

적어도 용산의 실력자가 제공한 정보가 아니라면 민간인이 이런 말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국방이 돌아가는 판을 정확히 읽고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4성 장군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설정하는 담대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이씨는 작년 5월에 해병대 예비역들의 카톡방에서 삼부 내일 체크하고라는 말을 남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지만 막상 이씨의 9월 녹취록에는 삼부토건이라는 업체명이 정확히 언급된다. 이씨의 카톡방 언급이 있고 나서 이틀 후에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 부인이 한국을 방문하고 다시 이틀 뒤인 517일에 정부는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지원 계획을 발표한다삼부토건의 주가는 정부 발표 직후부터 7월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아 8월에는 5월에 비해 4배 가까이 상승한다. 이 상황을 관리하기에 바쁜 이씨의 사정 때문에 5월의 1사단 골프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씨의 정보력이라면 굳이 과거처럼 주가조작을 할 이유도 없다. 정부가 뭘 할지 사전에 알고 주식을 사두기만 하면 차액이 저절로 수익으로 굴러 들어온다. 이런 추론에 대해 이씨는 아직 설득력 있는 반론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필자는 그의 답변을 기다린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이씨는 허풍쟁이나 몽상가가 아니다. 판단이 매우 치밀하고 정확하며 은밀하고 신속하다. 천공이 양지의 요란한 신공이라면 이씨는 음지의 조용한 내공이다. 특히 임 전 사단장을 향한 이씨의 구명 노력은 그 스스로의 표현대로 브이아이피(VIP)를 향하고 있다. 여러 통화 녹취 중에 임 전 사단장을 향한 이씨의 작년 8월과 올해 4월의 언급에는 사실관계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발견되지 않는다.

 작년 5월 골프 모임의 취지와 목적, 그리고 임 전 사단장에 대한 단계별 구명 노력과 뜻하지 않은 언론 보도로 인한 역풍, 자신의 구명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어지는 녹취 내용은 일관되고 논리적이어서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제보자의 거듭된 브이아이피 개입 확인에 대한 이씨의 확고한 대답은 허구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씨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바로 이 구명 로비가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이첩과 이첩 서류 회수, 박정훈 대령에 대한 항명죄 적용, 경북경찰청의 이상한 수사 발표 등 일련의 단계마다 드러나는 권력의 비정상적인 사건 개입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신속한 수사로 국민의 물음에 응답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진상 규명의 기회는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487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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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2

Everyday is a new beginning.

 헛되고 헛되도다.

하늘을 찌를듯하던 권력이
허장성세가 되어 무너져 내립니다.
 
대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며
지난 과거를 반성하며 미래를 다짐하는
새 지도자가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만
그런 상식이 아니라면 과감히 이별해야 합니다.
 
헛되고도 헛되도다.
이별이 헛되다지만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라는 희망으로
모든 낡고 썩은 것들에 대해
이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매일이 새로운 아침이라고
매일 아침을 감사하게 살라고
그렇게 다시 새 아침을 새깁니다.
 
Every day is a new beginning.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별이 있다. 그중 그 어떤 이별도 다른 이별보다 수월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이별은 언제나,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 생살을 뜯어내는 듯한 통증과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우리는 한 번 마음에 담았던 사람을 잊지 못한다. 마음에 담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환해 그리워한다. 그러니 이별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도 높은 극기훈련이라 하리라

2024-02-26

의사와 의새 - 사람과 동물 사이

[의사와 의새]

범인을 잡으러 다니니 잡새라 불리다가 그만 강세가 붙어, 경찰이 짭새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 그후 등장한 개새는, 개의 새끼라는 말에서 를 뺀 조어인데 흐름을 잘타서 개새 피규어까지 등장합니다. 한번 봇물이 터지자, 잇속과 패거리 문화 속에 불의한 판검사를 이르는 검새, 판새가 나오고, 말이 씨가 된다고 요즘은 검새 판새의 전성시대입니다.

드디어 의새 등장. 환자를 버려두고 병원을 나가버리는 의사를 사람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술 한번 받으려고 1년을 기다렸다는 사람도 많은 판에, 의사 수를 늘리면 의료체제가 붕괴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들이대고, 의사가 늘면 진료비가 늘어나 국민부담이 늘어난다는 기막힌 근거까지 만들었습니다. 의사 수가 많아지면 줄어드는 수입을 벌충하기 위해 환자에게 바가지를 씌우게 되니 그렇다는.. 제 얼굴에 똥칠하는 주장.

환자 곁을 떠난 의사가 사람일 리 없으니 의새가 맞다는 민심입니다. 이 난장판에서 환자 곁을 지키는 진짜 의사들은 밀려드는 환자에 쓰러질 지경입니다. 이 참에 의새, 개새ㄱㄱㅣ들은 모두 내쫓아 개구멍을 찾게 만들고, 진정한 의사만 병원에 남았으면 싶습니다.


개새. 영어로는 Dog bird 라고 한다.


의새라 불리는 무리들도 귀는 멀쩡하여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가 봅니다.
보사부 차관의 발언 중 중요한 내용은 쇠귀에 경읽기였겠지만, 실수로 나온 말은 제대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박민수 2차관은 지난 19일 정례브리핑에서 "독일·프랑스·일본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동안 '의새'들이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한 일은 없습니다"라며 '의사'를 '의새'로 발음했다. 
의사들은 해당 영상을 공유하는 한편, 온라인을 통해 '의새'를 활용한 각종 패러디를 쏟아내는 등 자조섞인 분노 표출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들이 나서서 자신들을 의새라 비꼬는 그림들..
   
   출처 : 의협신문(http://www.doctorsnews.co.kr)

미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냐”는 발언을 했다하여 영원한 구설수가 된 윤석열 대통령과는 다르게, 복지부 차관은 한발 물러섰습니다. 밤샘 근무를 하다가 나온 말 실수였다고 양해를 구하며 사과까지 했습니다만..

의새소리 듣기 딱 좋은 의새들은, 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의새 패러디로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정말 의사가 아닌 의새가 되고 싶은 걸까요. 의새란 말 조차도 아깝다는 민심이 대종인 데도, 저들은 과연 환자 곁을 떠난 만행이 가져올 댓가를 어찌 감당하려고 이 엄중한 사태를 농담처럼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동물 의새 아닌 
인간 의사들이
공감과 사랑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세상을 기다립니다.

God heals, physician thank.

하늘이 낫게 하시니, 의사는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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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4

[가상] 문재인 대통령 사과문 - 2023. 9.12

[팩트체크: ‘문재인 대통령 사과문’]

이 내용이 23.9.19일 자로 온라인에서 유통되었으나, 실제로는 시사평론가 김용민이 자신이 관리하는 홈피에 ‘가상’이란 표지를 달고 게재한 글이었기에 사실이 아님을 기록해둔다. 요즘 상황이 당시보다 훨씬 기막힌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듯도 하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즈음 문재인은 ‘잼버리 사태 관련해서, 유치 당시 대통령으로서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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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문재인 전 대통령 사과문

김용민 시사평론가    승인   2023. 9.12  13:39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전 대통령 문재인입니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한반도 평화와 외교, 민생 경제 또한 몰락하며, 언론자유는 파괴되고, 나아가 국민은 침수, 압사, 칼부림을 피할 최소한의 안전도 실종됐습니다.
누군가는 국가 부재를 이야기하고, 한편에서는 각자도생을 말합니다. 이 모든 고통 앞에서 제가 마음이 편할 리 없을 것입니다.

윤석열을 제가 키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결론부터 말씀드려 사과합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오판은 용서받을 여지가 없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 대통령 윤석열 씨를 그가 국민의힘 대선 주자로 나서기 직전까지 키웠습니다. 즉 5년 임기 중 4년을 검찰 최고위 책임자로 기용했습니다.

국민 특히 민주시민 사이에서 ‘누가 윤석열 검찰총장을 발탁했느냐’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는 줄 압니다. 실상을 말씀드리지요. 청와대 안에서 노영민 비서실장과 스스로 저의 ‘복심’임을 자처했던 양정철 씨 등이 천거했습니다.
물론 민정수석(조국)이나 공직기강비서관(최강욱)은 검찰 지상주의자의 발탁은 위험하다며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은 제가 했습니다. 저는 검찰 기능 즉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 검사 수사를 전담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설치면 충분히 제어될 수 있다고 믿었고, 이 일련의 검찰 개혁을 뒷받침하겠다고 공언한 윤석열 후보자를 또한 믿어서 그를 검찰총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럴 줄 몰랐습니다
. 검찰총장의 지휘권자인 법무부 장관 두 명을 그가 수사로 보복하고 축출하는 동안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스스로 부정한 것입니다.
그 사이 별건에 별건을 거듭해 윤석열 씨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멸문지화식 수사를 감행했고, 총선에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 고발 사주를 하는가 하면, 그 전말이 드러날까 두려워 수사에 개입했고, 관심 사안과 관련해 판사를 뒷조사하는 등 서울행정법원이 판시한 대로 ‘면직’ 처분에 모자람이 없는 행각을 벌여왔습니다. 많은 분은 왜 그때 사표를 받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를 발탁했고, 여러 차례 검찰총장 임기보장을 공언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신임 대통령 윤석열의 안내를 받는 문재인.
검찰총장에 임명되자마자 임명권자 대통령과 척을 지었던 윤.
얼결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나라를 두 동강내게 된다. 


그가 이럴 줄 몰랐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칼부림으로 그가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되리라는 상상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그가 분명히 우리에게 정치참여 의사가 없다는 점을 여러 차례 천명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에 속은 것입니다.

이를 내다보고 윤석열에게 징계로써 정치적 미래에 쐐기를 박으려 했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말을 듣지 않은 점, 뼈 아픕니다. ‘추윤 갈등’ 구도 속에서 윤석열 대신 그를 몰아낸 것도 ‘윤석열은 정치 안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된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윤석열은 문재인 정권의 검찰총장’이라는 말은 왜 했는지, 지금도 씁쓸하게 복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친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깊은 미안한 마음도 가졌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을 걸고 검찰 개혁을 반드시 관철하겠다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물러났다가 검사 집단으로부터 반격을 당해 끝내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지는 비극을 연출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서 지켜본 저는 현실 정치판에 불려 나올 때 일성으로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검찰을 개혁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래 놓고 집권한 저는, 지독한 검찰 지상주의자에게 개혁의 전권을 맡겼습니다. 그들에 대한 의심의 무장을 해제한 채 말입니다.

검찰 개혁에 있어 우리와 한편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윤석열 등에 대해 착시했습니다. 전임 이명박, 박근혜 정권 인사와 재벌 회장에 대한 적극적으로 주도한 적폐 청산 수사에 눈이 홀린 것입니다. 윤석열로 상징되는 검사는 박영수 특검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어오면서 전 정부 털기 수사에서 대단한 성과를 드러냈습니다. 그 수사는 지금 문재인 정부 인사들에게 하는 방식 그대로, 업무를 범죄로 가공하는 직권남용 혐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 옥석 그리고 시시비비를 가렸어야 했는데 우리는 덮어놓고 박수만 보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더불어민주당사 앞에서 압수수색 나온 호승진 검사가 “적폐 수사 사건을 할 때는 민주당 의원님들이 ‘그렇게 해라’. ‘적폐 수사 잘하고 있다’라고 하셨던 분들”이라며 우리를 조롱했습니다.
검찰 개혁 면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에 발맞출 수 있는 몇 안 되는 검사였고, 그의 부인 김건희 씨와는 2012년 코바나콘텐츠 행사에 동참하는 등 교분이 적지 않아 나와 그가 뜻과 정신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지금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나라는 두 쪽 났습니다. 정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대화와 타협은 사라졌습니다.
대통령은 야당 대표에게 1년이 다 돼가도록 먼지털기식 수사에 기소 또는 구속 협박으로 정치 파괴를 조장해 왔습니다. 여당 대 야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주 69시간이란 황당한 노동시간 개악을 추진하더니 노조를 조폭 카르텔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노조 대 반노조로 만들었습니다.
외교에서도 신냉전 구도 구축의 바람잡이 노릇 하더니 우리의 최대시장 중국을 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미·일 대 북·중·러로 만들었습니다. 극심한 편 가르기, 불통 독선 행보에 거침없는 윤석열 정권입니다. 열혈 지지층 결집이 유일한 민심 수습 대책입니다.

문재인 정부 성과가 모두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를 비롯해 역대 민주정권의 모든 정책 기조가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촛불 민주주의는 적폐 인사의 대거 복권 및 귀환으로 부정당하고 있고, 한일 과거사의 정의로운 문제 해결은 윤석열 정부의 굴욕스러운 배상안으로 표류하고 있습니다.
소득주도성장의 동반성장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자영업자 골탕 먹이는 사악한 정책으로 매도됐고,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은 더욱 확대되는 양상이며, 안전을 위한 노후 원전 폐기 및 원전 신설 중단은 탈원전으로 왜곡되고 있고, 포용적 복지국가의 이상은 증발했습니다.

아울러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미래 구상은 실종됐습니다. 이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을 가치로 못 박지 못한 저의 책임이 큽니다. 미국이 반대한다고 한반도 운전자석에서 내려왔습니다. 2018년 남북 정상 상봉으로 급진전하는 듯했던 남북 관계가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 결렬되자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로써 백두산 관광은 고사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중단된 금강산, 개성공단 사업의 재개는 아무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폭파된 개성공업지구 사무실은 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 정책의 상징이 됐습니다. 2018년 9월 19일 평양에서 호기롭게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라는 말은 왜 했는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다 만 것에는 문재인 정부의 중요한 과제였던 세월호 진상규명도 있었습니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이현주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검사, 대검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을 동원했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개별 수사에 대통령이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서 수사를 공안 권력 기구와 수사기구, 특별조사기구의 자율에 맡긴 것이 화근이 됐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진상규명을 진두지휘했다면 결과가 지금과 같을 수 있었을까 자성해 봅니다. 세월호 가족을 위해 한 것은 야당 국회의원 시절, 28일 단식한 것이 전부라는 비판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으니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검찰총장 임명식장의 윤석열.  뒤에서 윤의 부인 김건희가 웃고 있다.
오른쪽 뒤에는 조국, 당시 민정수석 또한 웃고 있다.
그 때만 해도 이 네 사람이 악연으로 얽힐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이재명 당선, 솔직히 관심 없었습니다.

결국 촛불의 여망은 모두 깨지고 수구 정권이 부활했습니다. 0.7%포인트 격차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고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어차피 내가 대선후보가 될 판이었는데도, 치고 올라오겠다는 후발주자들의 듣기 싫은 소리에 상심한 나머지, 5년 뒤 민주당 후보가 돼 나타난 이재명 씨의 당선이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절박하게 요구했던 재난 지원금 등을 정세균 국무총리와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앞세워 반대했습니다.
선제적 적극적 코로나19 대응 행정을 자랑했던 나는 이재명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대선 개입’이라는 구설에 오르는 게 싫었습니다. 인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돈이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석열이 집권하자마자 국채 없이 60조 추경을 세운 것을 보셨잖습니까? 결과적으로 이재명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두환도 노태우에게 “나를 밟고 가라”고 했건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재명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까 고민하다가 고배를 마셨습니다.

선의였다지만 윤석열을 발탁한 사람이 나고, 그의 검은 속을 다 봤음에도 크도록 방치한 사람이 나고, 대선까지 질주할 때 조국을 희생양 되게 만들고 추미애 또한 무릎 꿇리고 이재명마저 힘 못 쓰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대통령 되게 한 사람이 나였습니다.
그런 윤석열이 무슨 일만 터지면 제 책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없으면 어떻게 대통령 일을 할까요? 맞습니다. 그는 나 때문에 대통령이 됐습니다. 여러분, 나를 비난해주십시오. 다 내 과오입니다.

22대 총선이 코앞입니다. 제가 있었던 청와대 출신이 곳곳에서 배지를 달겠다고 하고 출사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고 그래서 국민에게 극한적 고통을 안겨준 전 정부 책임자 스태프의 간판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겠다고 하니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팬덤 기반으로 정치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요?
도올 김용옥 선생이 저를 비판하면서 했던 말을, 여전히 정치 일선에 남아있는 그들은 새겨들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씹어선 안 될 사람이다. 문재인의 문빠 정치가 진보세력을 망친 것이다. 문재인처럼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한마디도 못 한 정권은 없었다. 김대중 때도 내가 마음대로 이야기 다 했는데 문재인 때는 못 했다. 아무도 못 한다. 그러면서 당내에 건강한 토론 문화가 사라졌다.” 내용 없이 이미지로 경쟁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재명 대표도 마음에 새겨야 할 일입니다.

나 같은 불운한 민주당 대통령 없도록 합시다.

적어도 민주 정부 책임자라면 정권을 넘겨준다는 것이 국가의 미래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금융자본과 언론 권력을 저들이 독점하는 현실에서 민주 정부는 아주 취약합니다. 비정규직 권력입니다. 2020년 총선에서 180석을 얻었지만 2년 뒤 대선에서 질 수 있는 게 정치 현실입니다. 신임받았을 때는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국정의 고삐를 죄고 최선의 국정을 펼쳤어야 하는데, 우리는 ‘더 잘하라’라는 신호를 ‘아주 잘하고 있다’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저 이후로 ‘다음 정부는 누가 맡아도 상관없다’라는 안이한 사고가 사라지길 바랍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없도록 합시다.

(* 이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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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원문:
https://www.logos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6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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