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장 속 해골 skeleton in the cupboard
집이 있으면 사람이 머물 듯, 사람이 있는 곳에는 비밀이 머무는 법입니다. 비밀 하나없이 살면 좀 좋겠습니까만은, 그건 희귀하게 팔자 좋은 이들의 호사이고, 살다보면 온갖 일이 복선으로 얽히며 비밀이 또아리를 틀게 마련. 그런데 대개의 가정사가 사실은 팔자 복잡한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 한순간도 비켜가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일 수 있습니다.
놀러 나섰다 비명횡사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가 배후였으며, 술고래 남편 가정폭력과 반지하 물난리는 따져보니 IMF에 선이 닿고, 돌연 끌려가 사라진, 제삿날짜도 알 수 없던 사람도 결국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이란 역사의 한 축.
그러고보니 우리 집만의 비밀이라 숨기고 싶었던 가족의 해골 family skeleton 은, 톺아보면 거의 모두가 우리 시대의 굴곡과 연결되나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서로가 이웃하고 의지하면서 존재한다는 인드라망 그물을 떠올립니다. 우린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571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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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유물론자’
아버지는
휴머니스트였다네 등록
:2022-09-02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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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장례 소재
혁명가임에도
사람을 앞세웠던 아버지의
숨은 면모 알아가는 딸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장례식 사흘을 그린 소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였다”고
소설에 썼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l 창비 l 1만5000원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그의
첫 장편 <빨치산의
딸>(1990)의 아버지와
동일인일 것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소설 화자
‘아리’의 이름 역시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가져온
작가 이름의 변형이라 해야 하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장례를 치르는 사흘 간을 배경으로 삼는다.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에 친척들과 지인들이 모이고,
그들의 회고와
증언을 통해 아버지의 지난 삶이 풀려나온다.
딸이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뼛속까지
사회주의자”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고지식할
정도로 진지하고 반듯한 아버지의 언행은 그러나 세속의 기준으로 보자면 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가령 차를 놓쳐
겨울밤에 한뎃잠을 자게 된 낯선 방물장수를 데려와 딸의 방에서 재우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아내를 그는 이렇게
꾸짖는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빨치산 투쟁
시절은 물론 마지막으로 옥에서 나온 뒤로도 수십 년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아버지에게 혁명과
민중은 여전히 현재형의 가치요 목표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꽉 막힌 이념과 목적의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장례가 진행되는
사흘 동안 빈소에는 온갖 신분과 이력을 지닌 이들이 조문을 오는데,
그 이념의
스펙트럼인즉 가히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좌에서 우까지 너른 폭을 지닌다.
아버지에게는
이념보다 인간이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소설은 빈소를
찾은 이들과 아버지의 지난 사연을 들려주는 가운데 조각보를 이어 붙이듯 아버지의 진짜 면모를 그려 보인다.
미처 부고를
돌리기도 전에 일착으로 장례식장에 나타난 이는 아버지의 국민학교 동기인 박한우 선생.
아버지와 그는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를 같이 취급하는 신문보급소에서 새벽마다 마주쳤는데,
아버지는
한겨레신문을 구독하고 박 선생은 조선일보 독자였다.
서로의 신문을
가리켜 “뽈갱이
신문”,
“반동
신문”이라 욕하고
사사건건 토닥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평생 교유를 이어 왔다.
까닭을 묻는
딸에게 아버지가 들려준 대답은 이러하다.
“그래도 사람은
갸가 젤 낫아야.”
이념보다는
사람을 앞세웠던 아버지의 태도를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순겡은 사람
아니다냐?”
사상범 출신인
자신을 감시하는 정보과 형사와 농을 주고받고 술잔을 나누는 모습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딸에게 아버지가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빨치산 시절
아버지는 식량 보급투쟁을 나섰던 마을에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젊은 순경을 발견하고도 “순겡을 그만둔다고
허먼 살레줄라요”라
제안하고,
순경이 그 제안에
응하자 동료들에게 순경의 존재를 숨기고 현장을 떠났다.
그다음날
파출소에 사표를 낸 순경이 빨치산을 돕겠다며 산으로 올라오자 아버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는데,
출옥 뒤에 만난
그가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아버지는 누군가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지만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남로당 전남도당
위원장의 지시로 전쟁 중에 위장 자수를 하는 바람에 산에서 죽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고,
국민학교 은사와
그 아들의 꾸준한 보살핌으로 결혼을 하고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구례 오거리슈퍼의
손녀라는 “노란 머리
여자아이”는 아마도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은 문상객들 가운데 가장 이채로운 존재일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묻는 화자에게 아이는 담배 친구라는 생각도 못할 답을 내놓는데,
베트남 출신
어머니를 둔 이 아이는 내처 아버지에 얽힌 이런 추억을 들려준다.
“할배가
그랬어라.
엄마 나라는
전세계에서 미국을 이긴 유일한 나라라고.
긍게
자랑스러워해야 헌다고.
애들은 천날만날
놀리기만 했는디….”
친구들의 놀림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학교를 그만둔 아이와 담배를 나누면서 아버지는 아이에게 검정고시 대비 공부를 채근했고 시험에 붙으면 술을
사주겠노라 약속도 했던 터였다.
평소 짐작도
못했던 아버지의 인간관계와 일화들을 접하면서 화자는 자신에게도 생소한 아버지의 감추어진 면모를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빨치산 출신
동지들에서부터 베트남전 상이용사까지,
아버지의 첫 결혼
상대자의 여동생에서부터 어머니의 옛 시동생 식구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장례식장을 찾지만,
고인의 유일한
형제인 작은아버지만은 부고 전화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고 빈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빨치산 형
때문에 집안이 망했고 아버지도 군인의 총에 죽었다며 평생 형을 원수 취급했던 작은아버지에게는 그런데 화자조차도 알지 못하는 아픈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
기간 사흘은 작은아버지의 아픔을 비롯해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을 확인하고
긍정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최재봉 선임기자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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