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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4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아기 예수의 메시지: 차별금지법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한 외아들을 보내 평화를 독려하며, 사이좋게 살아야 그게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건만,
여전히 세상은 반목과 질시, 차별짓기로 살벌합니다.
부디 종교인들이나마 이런 부조리에서 깨어나라고 오늘 성탄일에 빌어 봅니다.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 내려와 저렇게 따스한 웃음을 짓고 있는 예수.
저 아기 예수가 주님, 우리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가장 앞장서서 세상에 차별을 없애자는 차별금지법을 하늘처럼 받들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홍세화 칼럼] 응답하라, 차별금지법!       등록 :2021-10-28

촛불은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불온한 나는 현 국회의원들에 의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꿈을 꾼다.
실패의 역사를 통해 배울 줄 알아야 하는 만큼 다음 촛불을 전망하면서 추첨제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꿈을 꾼다.
추첨제로 의원을 선출하면 여성 50%, 비정규직 노동자 30%, 20~30대 청년 20%, 장애인 5%가 나라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홍세화ㅣ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대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헌법 111항이다. 그러나 이 헌법 조항은 선언적 명제에 머물러 있다. 모든 국민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게 할 평등법이나 차별금지법이 오이시디(OECD) 국가들 중 유일하게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에 민의의 전당이라기보다 권위주의의 성채처럼 육중하게 자리잡은 국회의사당에서 차별금지법안은 2007년에 처음 제출된 이래 일곱차례나 거듭해 무산되었다. 발의자가 혐오 조장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법안을 자진 철회했거나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되었던 것이다. 다시 21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된 지 14개월이 지났다. 국민동의청원이 국회에 제출된 지도 3개월을 넘겼는데 또 60일을 미루어 1110일에 법안을 논의하겠다고 한다. 그날 국회에 도착할 예정으로 두명의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1010일 도보행진에 나섰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을 향한 두 사람의 발걸음에 연일 시민들이 합류하여 함께 걷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제인권사회가 권고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 국민이 찬동하는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는 스캔들감인데 스캔들로 느끼는 의원은 많지 않다. 고 노회찬 의원의 사자후를 빌려 만인이 아닌 만명만 평등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만명에 속하는 국회의원들이기에 차별당할 일이 없어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적 합의를 방패처럼 내세우고 그 뒤에 숨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사회적 합의란 이웃들과 차별 없이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민망하게도 작고한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말한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아는 정치지도자가 아쉽다는 말을 다시 꺼낸다.

지난 107일 법원은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한 강제 전역 조치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항소 의사를 밝혔던 육군이 법무부의 항소 포기 지휘에 굴복함에 따라 변 하사는 강제 전역에서 643일 만에 정상 전역을 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늦었다! “변 하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문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나중에!’ 연호에서 깨어나 시대의 기후에 관해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최고 군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입했더라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한숨을 토로했던 게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문의 탓일까, 변 하사의 죽음 앞에서 문 대통령이 회한의 뜻을 표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노태우의 죽음 앞에서는 과오가 적지 않지만 () 성과도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김부겸 총리의 제안을 수용하여 국가장을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정치권력을 향유한 강자들 사이에도 유유상종, 동병상련의 양상으로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면서 도보행진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정치인들이 내란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인 노태우의 죽음 앞에서는 설왕설래하고 조문 행렬에도 나서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서생은 이따금 톨레랑스의 전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소개해야겠다.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올바른 정치는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소명에 속하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의 집권 사회당은 동성애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연대계약(PACS)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낙태 자유화 이후 가장 위대한 개혁이라고 말했다.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타락한 정치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그들이지만 정치나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 인민은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 정치는 현금의 대통령 선거 국면이 보여주듯이 거대 보수 양당의 정권 쟁취 경쟁에 수렴된다. 그들이 전통시장에서 오뎅을 먹는 날은 며칠 동안이며, 집권은 정치철학이나 정책을 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하여 국민의힘이 ‘4대강’ ‘국정농단’ ‘사법농단’ ‘사찰’ ‘블랙리스트하면 안 될 행위를 주로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다. 그래도 후자가 전자보다는 낫다고 하겠지만, 170석에 가까운 그들 중에는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세우는 인물도 적지 않은데 차별금지법에는 공수처법에 비해 십분의 일 크기의 의지나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차별금지법은 이미 제정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세상은 온통 인종주의 언행으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세상은 온통 차별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차별의 근거가 되는 목록을 옮겨본다. 성별, 장애, 나이언어, 출신국,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학력,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이다. 차별금지법은 이상의 사유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고용, 재화와 용역의 이용 공급, 교육, 행정서비스의 네가지 영역에 적용된다. 강조하건대, 차별금지법은 처벌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법이 아니다. 차별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떻게 차별행위를 중단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법이다. 학교나 일터에서 차별금지와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을 교육, 환기하고 차별 예방에 나서도록 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16~17년의 촛불은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불온한 나는 현 국회의원들에 의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꿈을 꾼다. 실패의 역사를 통해 배울 줄 알아야 하는 만큼 다음 촛불을 전망하면서 추첨제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꿈을 꾼다. 추첨제로 의원을 선출하면 여성 50%, 비정규직 노동자 30%, 20~30대 청년 20%, 장애인 5%가 나라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구성만으로도 다른 세상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모든 특권은 사라지는 한편, 차별금지법 같은 법안은 폐기되는 대신 화기애애한 숙의 끝에 제정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7096.html#csidxff1a3cc0243757daa3427307aa9b721 tmpAF56


 

밤하늘에 뜬 별, 그 색에 담긴 이야기  등록 :2021-10-28

색으로 대별되는 차이와 다름에는 안정과 불안정이 공존한다.
다름이 주는 불안정과 다름을 지적할 때 주는 찰나의 안정에 집중하기보다는 차이를 수용할 때 얻는 폭넓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심채경ㅣ천문학자

지구 밖 천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그래프를 그리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분석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프 하나에 여러 선을 겹쳐 그려야 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학술지에 발표할 논문에 들어갈 그래프다. 프린터와 복사기가 대부분 흑백이던 시절에는 실선과 점선, 짧은 실선, 혹은 짧은 실선과 점선이 반복되는 선 따위로 구분해야 했다. 그러자면 그래프가 되도록이면 간단한 편이 좋았다. 여러 선이 겹쳐 있으면 알아보기 어려우니까. 컬러프린터와 컬러복사기의 사용이 많아진 뒤로는 여러가지 색의 선을 겹쳐 그리는 복잡한 그래프나 컬러 사진이 논문에 자주 등장한다.

복잡한 그래프나 사진 자료를 만들려면 비슷한 계열의 색을 여럿 쓸 수밖에 없다. 파란색이라면 명도와 채도를 달리해 하늘색과 민트색과 남색 등을 사용하며 독자가 각각의 선을 구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독자의 모니터는 내 모니터의 색 설정과 다를 수 있다. 프린터로 인쇄를 하면 또 다른 색이 되어버린다. 이쯤 고민하다 보면, 그래프 하나에 너무 많은 정보를 집어넣지 않도록 그래프를 다시 설계하는 게 어떨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오컴의 면도날을 들고 복잡한 그래프 속 선을 가지 쳐야 한다.

그래프를 좀 더 간결하게 다듬어야 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선이 두개만 들어 있어도 알아보기 어려운 그래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느 학술지의 논문 제출 안내서에서 배웠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도 있으니 하나의 그래프에 빨간색 계열과 초록색 계열의 색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빨강과 초록을 둘 다 써야 한다면 빨강 실선과 초록 점선 등으로 구분하라는 대안도 적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생을 배운 느낌이었다.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많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만을 탐구하는 과학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천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두 파장에서의 밝기 차이를 색 지수, 줄여서 색이라고 부른다. 파랑 혹은 빨강이 아니라 파랑과 빨강의 차이를 주목하는 것이다. 두 파장에서의 밝기를 측정해 구한 별의 색으로부터 별의 온도를 알 수 있고, 그로부터 별의 진화 단계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요한 양이다.

그런데 천문학 말고도 색이라는 말로 어떤 차이를 대변하는 경우가 있다. 지역색, 정치색 같은 말이 그렇다. 이런 말은 어떤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 나와 너의 차이, 우리와 너희의 차이를 지목할 때 더 자주 쓰인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차이가 실제보다 더 과장되기도 한다. 너는 나와 다를 것이라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색안경을 끼고 있을 때 그렇다.

밤하늘에 뜬 별의 색을 측정하는 것은 그 별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지금까지 어떤 일생을 보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에 어떤 사건을 차례로 맞이하게 될지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의 색은 누군가를 대상화할 때 쓰인다. 그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는 개별성을 무시하고 그 대상을 몇개의 짧은 단어로 단순화해 라벨링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쓰인다.

때로는 자신에게 스스로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별자리나 혈액형, 성격 유형 분류법에 따라 스스로가 왜 어떻게 남들과 다른지 확인한다. 나와 남의 차이는 내가 뭘 잘못했거나 나만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원래 그런 특성을 타고났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지구상에 특정 비율만큼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내게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 너는 왜 나와 다르냐고 의구심을 표현하더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색으로 대별되는 차이와 다름에는 안정과 불안정이 공존한다. 다름이 주는 불안정과 다름을 지적할 때 주는 찰나의 안정에 집중하기보다는 차이를 수용할 때 얻는 폭넓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물론, 빨강과 초록이 한데 난무하는 그래프를 무심코 그려왔던 과거의 나와 논문 제출 안내서에서 가르침을 얻은 지금의 나 사이의 차이는 오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7099.html#csidx75b5ccce7b165f6932d468e2fc47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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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6

지우개와 인드라망- 전두환을 지울 수 있을까

30년을 함께 했던 고무 지우개.. 연필 쓸 일이 많지 않다보니 긴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쓸만하지만, 지우개를 싸고 있던 보호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갑니다. 어느 가난한 프랑스 유학생이 귀국 길에 선물로 전한 것입니다. 이역만리에서 고국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주머니를 가늠했을 그 모습이 문득 어른거립니다. 몽블랑 만년필은 아니었지만, 삼척안두를 굳건히 지키는 인드라망의 징표입니다.

인간관계도 사연을 쓰고 지우고, 애증을 주고 받으며, 닳고 닳다가.. 언젠가는 지우개처럼 사라질 터이고, 결국에는 피안을 찾아 공수래공수거로 그렇게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곁을 지켜주고 도움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고, 알게 모르게 부담이 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죄책감의 피해자가 되었을 이들에게는 사죄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끝까지 죄를 안고 버티며 지우개 하나 챙길 줄 모르던 귀태.
사람같지 않은 언행을 고집하다 참회의 기회도 놓친 채 지옥문을 들어설
어떤 중생의 임종이 더욱 안타까운 소이입니다
.



2021-10-22

도리도리 윤석열에게 이 나라를 쥐어줄텐가?.

 

대한민국의 유사 이래 이런 물건은 없었다.
이런 쓰레기, 아니 괴물을 대통령으로 뽑게 되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볼 것도 없이 그 나라는 망조가 들 터이다.
가히 이명박과 박근혜를 초월하고, 전두환을 찜쪄먹을 수준의 저질의 귀태..

2019년 12월 독일 총리 메르켈은 처음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아 연설했다.

“우리는 믿음과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편견을 조장하고
분노를 선동하는 이들에 맞서야 합니다...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린 이런 수준의 지도자 한번 가질 수 없는가?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016184.html#csidx830472e3153e8aaa1b560f7be1da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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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 
호남 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꽤 있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이 분(전두환)은 군에서 조직 관리를 해봤기 때문에 (전문가들에게) 맡긴 것"이라고 덧붙이며
"최고의 전문가들을 뽑아서 적재적소에 두고 전 시스템 관리나 하면서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소통하고 아젠다만 챙기겠다"며

"시스템이 알아서 하는 거지 제가 일부러 (세부 업무를) 안 해도 되고
그거 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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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발언이 알려지고 나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지만,
사과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마지못해 사과랍시고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이 댓구..
자신의 돌사진을 올리며 어려서부터 사과에는 전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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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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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온 국민을 조롱하는 기막힌 대답을 보고 세상이 분노로 들끓자
이번에는 아예 온 국민을 상대로 엿을 먹입니다.
소위 '사과는 개한테' 한다는 사진..

그런데 이 사진 옆에는 아무리 쓰레기라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역겨운
지역 비하 발언이 숨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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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속 해시 태그 # 옆에 달린 단어들..

”#나랜데예
...” 어쩌고란 과연 무슨 뜻인지 해설이 좀 필요할 듯 합니다.


알고보니 기가막힌 비하..
과연 이런 물건이 대통령 후보와 선거 참모라면 이 나라가 운명이 어찌될지..
캄캄할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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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거기서 거기라며 외면하는 국민을,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은,
단 한 사람 이 쓰레기 미숙아 만은 안된다고 
온국민이 각성하여 눈 부릅뜨고 살펴야 할 때입니다.

여차했다간 지금까지 이룩한 이 대단한 나라,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
죽쒀서 개주는 망국의 길로 접어들 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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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구설→찔금 사과→개 사과…윤석열 해명조차 ‘오락가락’
등록 :2021-10-22 22 김미나 기자

‘전두환 옹호’ 발언 사과 얼마 뒤 사진과 함께 ‘너희나 먹어라’ 글
이준석 대표도 “상식 초월” 비판…“관리 못한 후보 책임” 지적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반려견 토리 인스타그램은,
현재는 계정 자체가 없어진 상태다.)

‘전두환 옹호’ 발언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번엔 공식 에스엔에스(SNS)에 반려견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려 논란에 휩싸였다. 전날 윤 전 총장이 ‘전두환 미화 망언’에 대해 “송구하다”고 밝혔으나, 이날 밤 ‘사과는 개나 줘라’로 해석되는 조롱성 사진을 올리면서 사과의 진정성은 물론 대선 후보로서 자질까지 의심받고 있다.

‘개 사과’ 논란…돌잡이 이어 또 구설

22일 0시10분께 윤 전 총장의 반려견 ‘토리’의 사진을 모아둔 ‘토리스타그램’ 계정에는 누군가 토리에게 사과를 주는 모습과 함께 “오늘 또 아빠가 나무에서 인도사과 따왔나봐오! 톨이는 아빠 닮아서 인도사과 좋아해오 오우오우워”라는 글이 게시됐다. 여기엔 “#우리집괭이들은_인도사과안묵어예”, “#느그는추루무라!”라는 해시태그가 달렸다. 경상도 사투리와 인터넷 은어로 ‘우리 집 고양이들은 사과 안 먹는다’, ‘너희나 먹어라’라고 쓴 것이다.
지역감정에 기댄 조롱까지 담은 이 사진은 국민적 분노에 밀려 ‘전두환 망언’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윤 전 총장이, 마지못해 사과는 했지만, 실제로는 사과 요구에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을 불러왔다. 논란이 가열되자 1시간여 뒤에 사진을 삭제했고, 파장이 더욱 커지자 계정을 아예 삭제했다. 윤석열 캠프는 앞서 지난 20일에도 윤 전 총장의 돌잔치 사진을 에스엔에스에 올리며 “석열이 형은 지금도 과일 중에 사과를 가장 좋아한다”고 적어, ‘1차 사과’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밤늦게 사무실서 촬영”…이상한 해명

사진을 찍고 게시하는 과정에서 윤 전 총장과 캠프의 오락가락 해명은 논란을 키우고 있다. 사진이 올라온 뒤 누리꾼들은 반려견의 눈동자를 확대해 보면 다리를 벌리고 앉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의 모습이 비친다며 윤 전 총장과 부인 김건희씨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캠프 관계자는 “해당 사진은 20일 밤 11시께 촬영했고, 촬영 장소도 집이 아닌 인근 사무실”이라며 “윤 전 총장은 지역 일정 중”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윤 전 총장 반려견을 20일 밤늦게 사무실로 데려와 촬영했다는 이런 주장을 두고 논란이 거듭됐다.

결국 윤 전 총장은 이날 오후 서울 마포구 와이티엔(YTN) 사옥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맞수토론’에서 “제가 승인했으니 관련된 모든 불찰과 책임은 제가 지는 게 맞다. 제가 기획자다”라며 “먹는 사과와 가족 같은 강아지 사진을 보고 ‘사과를 개나 줘라’라고 해석하실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해명했다. 윤 전 총장은 또 “반려견을 (사무실에) 데리고 간 것은 제 처 같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사진을 찍은 것은 캠프 직원”이고 “(사과를 준 사람도) 에스엔에스 담당 직원으로 안다”고 말했다. 아내 김건희씨가 개를 데려갔을 뿐 자신과 아내가 사진 촬영과 배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해명인 셈이다.

하지만 윤석열 캠프의 윤희석 공보특보는 이날 <한국방송>(KBS) 라디오에서 “실무진이 촬영했다”면서도 “그걸(사진을) 찍으려면 집에 가야 되는 건 당연하지 않나”라고 되물어 또 다른 의문을 촉발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윤 특보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번 사진에 특정한 게 아니고, 이전에 토리를 찍은 게 많으니까 직원이 집에 드나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일반적으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망언→찔끔 사과→개 사과’ 치명타

윤 전 총장 캠프 관계자는 ‘사과 사진’을 잇따라 게시한 것에 대해선 “사과가 가을 특산물이기 때문에 주제로 사진을 찍어 게시한 것”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하지만 당내에서도 도를 넘어섰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준석 대표는 이날 오전 페이스북에 “상식을 초월한다”며 “착잡하다”고 글을 올렸다. 홍준표 의원 등 대선주자들도 “부적 선거에 이어 ‘개 사과’까지, 갈 데까지 간 야당 경선”이라며 질타를 쏟아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겨레>에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진위가 왜곡됐다’는 반응이 먼저 나오는 것은 지도자의 기초적 소양인 ‘성찰’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실무자의 실수라 하더라도 그걸 관리하지 못한 시스템 부재는 후보가 책임질 문제”라고 짚었다. 김미나 기자min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016299.html#csidxf32803c0c53df23a0225b2527a765b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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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5

하..... 그림자가 없다.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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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라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격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 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은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 그림자가 없다

…… 그렇다 ……

…… 그렇지 ……

아암 그렇구말구 …… 그렇지 그래……

응응…… ……?

아 그래……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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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19혁명 이후에 김수영은 '피 냄새 나는 자유와 고독한 혁명가'를 노래하는 낭만주의적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김수영 시인이 보인 태도는 그 이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생각을 스스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은 한 명의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제거하기만 하면 민주주의가 곧바로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지적처럼 이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오랜 동안 길들여져 왔다면, 시인을 포함한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를 두려워하는 수동적 주체로 구성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우리에게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싸워야만 한다고 그토록 역설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싸움은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는 '그림자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분명 김수영은 푸코적인 통찰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인의 통찰은 이성적인 것이었을 뿐 내면 깊숙이 파고든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삶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싸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른 뒤 시인은 "…… 그렇다 ……/…… 그렇지

……"라고 길게 탄식을 내뱉습니다. 이런 주저하는 듯한 긍정만으로는 자신의 통찰을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기 어렵겠지요.
시인의 이런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4·19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곧 낭만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히고 마는 아쉬움을 어느 정도 예감합니다. (재야 철학자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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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투루는 한시도 무심코 지낼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차라리 이런 형벌을 치워달라고, 차라리 족쇄의 평안을 다시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정도 고통이야 지금 누리는 이 자유를 위해서라면
온 영혼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며 떨쳐 일어나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