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
[홍세화
칼럼]
응답하라,
차별금지법!
등록
:2021-10-28
촛불은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불온한
나는 현 국회의원들에 의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꿈을 꾼다.
실패의
역사를 통해 배울 줄 알아야 하는 만큼 다음 촛불을 전망하면서 추첨제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꿈을 꾼다.
추첨제로
의원을 선출하면 여성 50%,
비정규직
노동자 30%,
20~30대
청년 20%,
장애인
5%가
나라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홍세화ㅣ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헌법 11조 1항이다. 그러나 이 헌법 조항은 선언적 명제에 머물러 있다. 모든 국민에게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누리게 할 평등법이나 차별금지법이 오이시디(OECD) 국가들 중 유일하게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 여의도에 민의의 전당이라기보다 권위주의의 성채처럼 육중하게 자리잡은 국회의사당에서 차별금지법안은 2007년에 처음 제출된 이래 일곱차례나 거듭해 무산되었다. 발의자가 혐오 조장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법안을 자진 철회했거나 회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되었던 것이다. 다시 21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된 지 1년4개월이 지났다. 국민동의청원이 국회에 제출된 지도 3개월을 넘겼는데 또 60일을 미루어 11월10일에 법안을 논의하겠다고 한다. 그날 국회에 도착할 예정으로 두명의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10월10일 도보행진에 나섰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을 향한 두 사람의 발걸음에 연일 시민들이 합류하여 함께 걷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제인권사회가 권고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 국민이 찬동하는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 국회의원들의 직무유기는 스캔들감인데 스캔들로 느끼는 의원은 많지 않다. 고 노회찬 의원의 사자후를 빌려 “만인이 아닌 만명만 평등”하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만명에 속하는 국회의원들이기에 차별당할 일이 없어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적 합의를 방패처럼 내세우고 그 뒤에 숨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기 때문인가. 하지만 사회적 합의란 이웃들과 차별 없이 더불어 살자는 것이다! 민망하게도 작고한 미국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말한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아는 정치지도자가 아쉽다는 말을 다시 꺼낸다.
지난 10월7일 법원은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한 강제 전역 조치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항소 의사를 밝혔던 육군이 법무부의 항소 포기 지휘에 굴복함에 따라 변 하사는 강제 전역에서 643일 만에 정상 전역을 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늦었다! “변 하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문 대통령이 지지자들의 ‘나중에!’ 연호에서 깨어나 시대의 기후에 관해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최고 군통수권자의 자격으로 개입했더라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한숨을 토로했던 게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문의 탓일까, 변 하사의 죽음 앞에서 문 대통령이 회한의 뜻을 표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노태우의 죽음 앞에서는 “과오가 적지 않지만 (…) 성과도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김부겸 총리의 제안을 수용하여 국가장을 치르기로 했다고 한다. 정치권력을 향유한 강자들 사이에도 유유상종, 동병상련의 양상으로 카르텔이 형성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촉구하면서 도보행진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정치인들이 내란 쿠데타와 학살의 주범인 노태우의 죽음 앞에서는 설왕설래하고 조문 행렬에도 나서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서생은 이따금 톨레랑스의 전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소개해야겠다.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올바른 정치는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는 국민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소명에 속하기 때문이다. 1998년 프랑스의 집권 사회당은 동성애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민연대계약(PACS)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낙태 자유화 이후 가장 위대한 개혁”이라고 말했다. 비판적 지식인들로부터 타락한 정치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던 그들이지만 정치나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 속에 인민은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 정치는 현금의 대통령 선거 국면이 보여주듯이 거대 보수 양당의 정권 쟁취 경쟁에 수렴된다. 그들이 전통시장에서 오뎅을 먹는 날은 며칠 동안이며, 집권은 정치철학이나 정책을 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하여 국민의힘이 ‘4대강’ ‘국정농단’ ‘사법농단’ ‘사찰’ ‘블랙리스트’ 등 “하면 안 될 행위를 주로 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더불어민주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다. 그래도 후자가 전자보다는 낫다고 하겠지만, 170석에 가까운 그들 중에는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세우는 인물도 적지 않은데 차별금지법에는 공수처법에 비해 십분의 일 크기의 의지나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차별금지법은 이미 제정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스스로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세상은 온통 인종주의 언행으로 가득 차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차별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세상은 온통 차별과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차별의 근거가 되는 목록을 옮겨본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고용 형태, 병력 또는 건강 상태, 사회적 신분 등이다. 차별금지법은 이상의 사유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고용, 재화와 용역의 이용 공급, 교육, 행정서비스의 네가지 영역에 적용된다. 강조하건대, 차별금지법은 처벌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법이 아니다. 차별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 어떻게 차별행위를 중단시키고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법이다. 학교나 일터에서 차별금지와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을 교육, 환기하고 차별 예방에 나서도록 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16~17년의 촛불은 여지없이 배반당했다. 불온한 나는 현 국회의원들에 의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기대하기보다 차라리 꿈을 꾼다. 실패의 역사를 통해 배울 줄 알아야 하는 만큼 다음 촛불을 전망하면서 추첨제로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꿈을 꾼다. 추첨제로 의원을 선출하면 여성 50%, 비정규직 노동자 30%, 20~30대 청년 20%, 장애인 5%가 나라의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구성만으로도 다른 세상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모든 특권은 사라지는 한편, 차별금지법 같은 법안은 폐기되는 대신 화기애애한 숙의 끝에 제정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7096.html#csidxff1a3cc0243757daa3427307aa9b721
밤하늘에
뜬 별,
그
색에 담긴 이야기 등록
:2021-10-28
색으로
대별되는 차이와 다름에는 안정과 불안정이 공존한다.
다름이
주는 불안정과 다름을 지적할 때 주는 찰나의 안정에 집중하기보다는 차이를 수용할 때 얻는 폭넓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심채경ㅣ천문학자
지구 밖 천체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그래프를 그리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분석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래프 하나에 여러 선을 겹쳐 그려야 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학술지에 발표할 논문에 들어갈 그래프다. 프린터와 복사기가 대부분 흑백이던 시절에는 실선과 점선, 짧은 실선, 혹은 짧은 실선과 점선이 반복되는 선 따위로 구분해야 했다. 그러자면 그래프가 되도록이면 간단한 편이 좋았다. 여러 선이 겹쳐 있으면 알아보기 어려우니까. 컬러프린터와 컬러복사기의 사용이 많아진 뒤로는 여러가지 색의 선을 겹쳐 그리는 복잡한 그래프나 컬러 사진이 논문에 자주 등장한다.
복잡한 그래프나 사진 자료를 만들려면 비슷한 계열의 색을 여럿 쓸 수밖에 없다. 파란색이라면 명도와 채도를 달리해 하늘색과 민트색과 남색 등을 사용하며 독자가 각각의 선을 구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독자의 모니터는 내 모니터의 색 설정과 다를 수 있다. 프린터로 인쇄를 하면 또 다른 색이 되어버린다. 이쯤 고민하다 보면, 그래프 하나에 너무 많은 정보를 집어넣지 않도록 그래프를 다시 설계하는 게 어떨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오컴의 면도날을 들고 복잡한 그래프 속 선을 가지 쳐야 한다.
그래프를 좀 더 간결하게 다듬어야 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선이 두개만 들어 있어도 알아보기 어려운 그래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느 학술지의 논문 제출 안내서에서 배웠다. 적색과 녹색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도 있으니 하나의 그래프에 빨간색 계열과 초록색 계열의 색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빨강과 초록을 둘 다 써야 한다면 빨강 실선과 초록 점선 등으로 구분하라는 대안도 적혀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생을 배운 느낌이었다.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많이 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만을 탐구하는 과학자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천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두 파장에서의 밝기 차이를 색 지수, 줄여서 색이라고 부른다. 파랑 혹은 빨강이 아니라 파랑과 빨강의 차이를 주목하는 것이다. 두 파장에서의 밝기를 측정해 구한 별의 색으로부터 별의 온도를 알 수 있고, 그로부터 별의 진화 단계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요한 양이다.
그런데 천문학 말고도 색이라는 말로 어떤 차이를 대변하는 경우가 있다. 지역색, 정치색 같은 말이 그렇다. 이런 말은 어떤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이것과 저것의 차이, 나와 너의 차이, 우리와 너희의 차이를 지목할 때 더 자주 쓰인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차이가 실제보다 더 과장되기도 한다. 너는 나와 다를 것이라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색안경을 끼고 있을 때 그렇다.
밤하늘에 뜬 별의 색을 측정하는 것은 그 별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지금까지 어떤 일생을 보내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에 어떤 사건을 차례로 맞이하게 될지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의 색은 누군가를 대상화할 때 쓰인다. 그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는 개별성을 무시하고 그 대상을 몇개의 짧은 단어로 단순화해 라벨링하는 데에 효과적으로 쓰인다.
때로는 자신에게 스스로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별자리나 혈액형, 성격 유형 분류법에 따라 스스로가 왜 어떻게 남들과 다른지 확인한다. 나와 남의 차이는 내가 뭘 잘못했거나 나만 이상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는 원래 그런 특성을 타고났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지구상에 특정 비율만큼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내게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면서 너는 왜 나와 다르냐고 의구심을 표현하더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색으로 대별되는 차이와 다름에는 안정과 불안정이 공존한다. 다름이 주는 불안정과 다름을 지적할 때 주는 찰나의 안정에 집중하기보다는 차이를 수용할 때 얻는 폭넓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물론, 빨강과 초록이 한데 난무하는 그래프를 무심코 그려왔던 과거의 나와 논문 제출 안내서에서 가르침을 얻은 지금의 나 사이의 차이는 오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17099.html#csidx75b5ccce7b165f6932d468e2fc47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