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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4

아름다운 걸림돌 : 나찌의 만행을 결코 잊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림돌’     등록   2017-08-13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여기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 살았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유태인을 숨겨줬던 가수이자 배우 에르네스티나 갈라르도(1912~1982)를 추모하며”. 이번 여름 독일 베를린에 묵었던 집의 현관 복도에 놓인 작은 액자에 담긴 글귀다.  역사학자 이동기 교수가 알려준 독일의 새로운 기억문화는 충격적이었다.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자 바로 문 앞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황동판 세 개가 눈에 잡혔다.
 
이 집에 1943519일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송되어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게르트루트 카우프만(1887년생)이 살았다.”
이 집에 194333일 이송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율리우스 바어(1899년생)가 살았다.”
이 집에 194333일 이송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한 에르네스티네 바어(1895년생)가 살았다.”
 
추모액자와 황동판은 하나의 서사를 전하고 있었다.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 8번지에서만 세 명의 유태인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한 명의 의인이 목숨을 걸고 유태인을 숨겨줬던 것이다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는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어퓌어스텐담과 맞닿아 있는 중산층 거주지역이다. 100미터 남짓한 이 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거리에 황동판을 심는 일을 시작한 이는 군터 뎀니히라는 예술가다. 그의 목적은 번호로 불리며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자유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거처에 그들의 이름을 되돌려놓는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 10센티미터의 돌 위에 황동판을 붙여놓은 이 작은 추모석을 그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는 걸림돌이다. 아직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사람은 없다. 땅을 파고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독일인도 없으리라. 그들의 끔직한 과거를 매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걸림돌을 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름답지 않아요? 이렇게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더욱이 희생자의 과거를 잊지 않고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홀로코스트의 비극적 과거를 떠올리는 일을 그녀는 아름답다고 했다. 생뚱맞다 싶었지만, 한편으론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헤겔은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으로 표현된 이념이라고 했다.이 조그마한 돌덩이가 우리의 눈과 가슴에 닿아 인류 평화와 인간 존엄의 이념을 환기시킨다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 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걸림돌은 이제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65천개 넘게 심어졌다. 공적 역사에 묻혀온 개인적 역사가 집 앞에 되살아나고, 익명의 희생자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있다. 독일인들은 아침마다 과거의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릴 테지만, 바로 그렇게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결국 과거를 넘어설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6614.html#csidx70c881065e20649880a47900c82ea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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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아 헤매다    등록 2017-07-25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아주 쉬운 역사 퀴즈. 이스라엘 건국 전까지 세계에서 유대인이 제일 오래, 제일 많이 살았던 나라는? 유대인이 스스로 가장 좋다고 평가했던 나라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트레블린카, 헤움노, 벨제크(베우제츠) 등 나치의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가 모여 있던 나라는? 홀로코스트로 죽어 간 육백만 유대인 중 절반이 나온 나라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나라는? 나치와 소련의 박해를 받았으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도 한 복잡한 과거사를 지닌 나라는? 정답은 물론 폴란드이다.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 최근 건립된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건물의 위치도 상징적이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하여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을 찾아 무릎을 꿇었던 사진을 기억할 것이다. 박물관은 그 탑을 마주보고 서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고가 무슨 뜻인지 이곳에 와 보면 알 것도 같다.
 
폴란드의 유대인 역사는 흔히 천년 세월로 친다. 중세가 되면 이미 폴란드 전역의 도시와 타운에 유대인 거주지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전에 이미 계몽주의적 평등과 관용의 풍토를 가진 나라였다. 유대인들 자신이 폴란드를 유대인의 낙원’(파라디수스 유대오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톨릭교회가 종종 박해를 하고 군주가 재정상의 이유로 유대인을 감싸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어쨌든 당시 유럽 기준으로는 양호한 거주조건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전반에 전세계에 유대인이 약 120만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75만명이 폴란드에 살았다는 연구도 있다.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 유대인에게 말 그대로 제2의 고향이 된 나라였다. 그러나 폴란드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된 뒤 유대인의 생활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한 뒤에는 국제연맹의 소수민족 보호규정과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통합정책에 따라 유대인의 지위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 직전 폴란드 정치가 우경화되고 반유대주의 선동이 일면서 유대인에게 불안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 공간에서 유대 학생용 자리를 따로 분리시켜 지정할 정도였다. 폴란드 정부는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내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나치는 19399월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 직후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합병한다. 그다음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역사다. 전쟁 직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에 347만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홀로코스트로 약 300만명 이상, 90%가 희생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민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오늘날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나치 점령군은 유럽을 통틀어 유독 폴란드에서 가장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유대인을 조금만 도와도 무조건 사형, 그것도 연좌제를 적용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사람이 유대인을 돕는 것은 전 집안, 온 동네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을 도왔던 영웅적인 이방의 의인들이 다수 나왔다. 이스라엘의 보훈청 야드바솀의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의인은 국제적으로 모두 26120, 그중에서 폴란드 출신이 6620명으로서 단연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나치에 부역하여 유대인을 추방하고 밀고한 폴란드 사람이 많았고, 직접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건도 23건이나 된다. 나치의 강요와 반유대주의 정서 탓이 컸고, 유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도 한몫을 했다. 소련이 합병한 동부에서 일부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을 색출하는 데 앞장선 것이 폴란드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의 동부가 소련 영토로 영구 편입되는 바람에 그곳 출신의 유대인이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 자신의 집과 재산이 모두 파괴된데다 타인이 점거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가 일시에 난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정권이 싫기도 했고, 일가친척이 사라진 저주의 땅에서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다. 2차 대전 직후의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수십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에 잠시 개방화 물결이 일었을 때에도 대규모 이주가 일어났다.
 
오늘날 폴란드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다. 자신을 종교적 의미에서 유대인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1~2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뿌리를 밝히지 않고 사는 유대계를 다 합쳐도 그 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작은 기적이자 역설이라 할 만하다.
현재 폴란드의 정세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우파 포퓰리즘의 법과 정의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권위주의적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역사 연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폴란드의 나치 부역행위를 연구하는 학자는 반국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폴란드 수용소라고 부르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발의되어 있다. 폴란드 국민이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건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얀 그로스 교수는 국가모독죄로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조치를 적극적 역사정책이라고 되레 강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집권여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유럽연합(EU)은 만일 이 법이 제정되면 유럽연합에서 폴란드의 투표권을 박탈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글을 쓰던 중 바르샤바대학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유럽연합 깃발과 촛불을 들고 집회를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인으로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적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역사 왜곡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건강성을 회복하는 지속적 과정 속에서, 그리고 민주체제 내에서 조금씩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달한 개방적 역사관도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순식간에 무너지곤 한다. 요즘 폴란드는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헝가리와 함께 문제아 형제 비슷한 존재로 찍힌 상태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기생충과 전염병이 퍼진다고 집권여당 대표가 공공연하게 막말을 하는 외국인 혐오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대인 역사에 대한 폴란드 국민의 인식이 제대로 정립될지 우려와 회의가 든다. 결국 역사를 직시하고 정직하게 기억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준만큼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긴 호흡에서 폴란드의 희망을 본다. 나치 폭정과 공산 독재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무쇠 같은 의지, 코페르니쿠스의 후예다운 인본주의적 지성, 깊은 신앙심으로 인도되는 내면의 확신,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일궈본 독립인의 특징인 침착한 긍지를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날, 폴란드 역사의 새로운 르네상스가 열릴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4260.html#csidx474130e3e5e605284c72bfcf5046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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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관계의 헤르츨 효과’     등록 2017-07-25    고명섭  논설위원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즘을 한꺼번에 탄생시킨 곳이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이 정치운동들의 탄생 과정은 작용과 반작용의 정치적 역학관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이 시민권을 얻었다. 오랫동안 억눌려 살던 유대인은 학문과 산업 분야에 맹렬하게 진출했다. 유대인이 사회 곳곳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이 흐름에 대한 반동, 곧 반유대주의 정치운동이 즉각 나타났다. 1890년대 중반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건 카를 루에거가 빈의 시장으로 선출됐다. 젊은 히틀러는 빈에서 살던 시절에 루에거의 반유대주의 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아 후에 나치즘을 일으켰다. 유대인은 독일 문화에 동화하기를 열망했지만, 유대인의 동화 욕구가 커질수록 반유대주의는 강도를 더해갔다.
 
이 시기에 빈에서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시오니즘을 정치운동으로 조직했다. 헤르츨은 1891년부터 1895년까지 빈의 일간 <신자유신문> 파리 특파원을 지냈다. 1894년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는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이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헤르츨은 유대인이 유럽의 일원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접고 <유대 국가>라는 책을 써 시오니즘의 깃발을 올렸다. 유대인이 박해받지 않고 살려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었다. 헤르츨은 1904년에 세상을 떴지만, 시오니즘 운동은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귀결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헤르츨은 자신의 구상에 따라 태어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비극을 낳으리라는 것을 예감하지 못했다.
 
1948514, 텔아비브 박물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이스라엘 건국의 주역들. 초상화 속 인물이 <유대 국가>로 국가이념의 틀을 제시한 테오도어 헤르츨이다.
 
유럽이 유대인의 동화 욕구를 수용했다면 오늘의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땅의 전쟁과 참상도 없었을 것이다.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사이 작용-반작용 역학은 다른 여러 정치적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압박과 반발이 교차상승하면서 적대감과 증오심이 쌓인다. ‘헤르츨 효과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다.
 
-미 관계는 이런 작용-반작용 역학의 또 다른 전형을 보여준다. 북한은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이후로 줄곧 북-미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평화협정을 통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20006·15정상회담 때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털어놓은 비밀이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1992김정일의 특사로 미국 워싱턴에 간 노동당 비서 김용순이 미군이 계속 남아서 남과 북이 전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화해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드러낸 일화다.
 
그러나 북-미 관계는 그 뒤로도 긴장과 위기를 반복했다. 불신과 적대를 키우는 작용-반작용의 정치적 역학이 관계 개선의 계기들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다. 지난 10여 년 사이 북한은 다섯 차례 핵실험을 벌이고 급기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까지 감행했다. 위기를 증폭시키는 이런 악무한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은 저 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쟁과 참화를 낳았지만, -미 사이 충돌은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 미국을 모두 설득해 두 나라의 불신과 적대를 풀어내는 조정자 구실을 해야 한다. 남북 대화의 통로를 다시 여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난마의 한복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괴로운 일이지만 다른 길이 없다.
michae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4262.html#csidx846a47cd66e8c23b0d198464309b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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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해외여행..공장식 밀집사육..여객기 비지니스 클래스의 꿈.


해외여행..공장식 밀집사육의 체험.

 닭은 A4 용지 절반 넓이의 공간을 배정받은 채 자고 먹고 싸다가 50일 정도 지나면 능지처참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최소 생존환경에서 사람도 살 수 있을까? 뜬금없이 여객기 이코노미 석이 생각 납니다. 열댓시간씩 무릎조차 제대로 뻗을 수 없는 공간, 그 자리에 꼼짝말고 앉아 주는대로 먹고, 앉아서 졸며 7인치 화면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저 비참한 닭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태라고 하면 과장일까요.

고압전류에 감전되 최후를 맞는 닭과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이코노미 석 승객은 이런 상황에서 버티다 보면 나름의 새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같은 비행기를 탔다고, 모두가 이런 치킨용 닭과 유사한 상태인 것은 아닙니다. 다리를 원없이 주욱 뻗는 것은 기본이고, 안방처럼 편히 누워서 자다가 내릴 때가 되면 상냥한 목소리로 깨워주는 사람도 있는 공간이, 이 양계장 닮은 공간의 커튼 너머에 있습니다. 이코노미 석은 이전에는 3등석으로 불렸던 하층 계급용 명칭에서 유래한 자리이고, 다른 좌석은 일등석, 아니면 이등석이라 불렸던 비지니스 클래스 이상의 좌석입니다. 본디 급이 다른 게지요.

궁금증이 피어납니다. 대체 3등석에 타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능력과 재산이 많아서 적게 잡아도 백만원이 더 드는 그런 자리를 차지했을까? 혹시 나머지 사람들은 - 자신들은 안 그런 줄 알지만 - 저 닭과 다름없이 사육되며 뜯기다가 결국 공포 속에 최후를 맞는 닭장 속 닭 처지일 뿐이고, 그 나머지 사람들이 이름 그대로 치킨을 밤낮없이 뜯으며 사는 진정한 인간, 호모사피엔스, 아니 호모치킨먹기스는 아닐까?
 
 우리 모두가 저 소수의 인간들처럼 비지니스석 정도의 환경에서 10 시간을 여행하게되는 그런 세상은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해외 골프 여행 길이라며 비지니스 석에 앉은 저 젊은이는 과연 무슨 경력이 있어서일까? 연수입이 수십억이 넘고 집이 6채씩 된다는 한국 사회의 1% 층이 과연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뛰어난 능력이 재산축적과는 무관하게 순수한 명예와 책임감의 원천이 되고, 대단한 노력은 인간성의 승리와 자존심의 근거가 될 뿐, 이런 능력과 노력으로 인류가 이룩한 사회적 부는 가능한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다면, 굳이 필요없는 부귀와 생존을 위한 다툼과 전쟁, 시기심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까? 잘 달리는 사람이 경주 능력에만 자부심을 갖고, 머리 좋은 사람이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에만 긍지를 느끼는 그런 세상은 불가능할까 궁금해집니다. 혹시 스칸디나비아 어느 두메쯤에서 그 실마리가 보일 듯도 합니다만.


꼼짝말고 앉아 있으라는 듯한 3등석의 밀착 구조..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7인치 모니터 화면. 앞사람이 의자를 눕히면 모니터는 내 코 앞까지 다가오고,  뒷 사람이 내 의자를 발로 차면 다툼이 나기 딱 좋은 구조. 옆 사람이 비대하면 함께 쓰는 팔걸이 싸움은 백전백패. 창문 커튼은  최소한 세 사람이 동의해야 열거나 닫을 수 있을 터이고, 그 마저도 승무원이 닫으라면 닫아야 할 수밖에...






나름대로 사생활이 존중되고,  침대를 꺼내면 제대로 발뻗고  누워서 잠들 수 있는 2등석, 비지니스 클래스.  19인치 모니터와  창가의 경우, 창문 가림막을 개인적으로 여닫을 수 있는 구조. (1등석과 차별적인 단어를 미화해 보려고 요즘은 비지니스란 표현 대신 '프레스티지'란 모호한 표현이 유행중)




완벽한 격리 공간.  웬만한 1인 침대의 가로 규격을 능가하는 점유 면적의 1등석,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누워도 괜찮더라는 소문의 코스모 스위트 클래스. 예전에 그저 '스위트'라 부르던 것이 이름까지 격상된 느낌.  24인치 TV 모니터. 창문 두개가 할당된 여유로움. 복도와 차단되는 문은  항공사에 따라서는 완전한 격실 구조인 경우도 있음. 그마저도 싫은 사람은 - 아예 옆 자리 포함 - 좌석 두 개를 혼자 몫으로 신청해서 타고 다닌다는 설.. 모 항공사에서 있었던 땅콩 갑질 사건 조 모씨처럼.





1층 앞쪽 4줄 자리가 1등석,
2층 앞쪽 6줄 자리가 2등석,  1등석과 2등석이 공유하는 칵테일 바를 배타적으로 이용 가능.

 나머지 공간은 밀집식 사육장을 연상시키는3등석.
- 앞 좌석과 공간이 좁은 데다.. 10줄씩 자리하여 두 사람이 비켜가기에도 좁은 3등석의 복도.  그나마 복도 옆은 양반이고, 다른 좌석에 앉은 사람은, 옆 사람의 배려 없이는 복도로 나올 수도 없는 구조. 화장실을 가려해도  틈새시간을 노리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화장실 분포:
1등석:  2개 /   12명   (휠체어용 화장실 1개)
2등석:  5개 /   94명   (휠체어용 화장실 1개)
3등석:  5개 / 301명   (휠체어용 화장실 없음)

이런 공간에서 몇시간을 앉은 자세로 버티다가  발작하는 병이 소위 이코노미 좌석 증후군 (economy class syndrome)이라 불리는 혈전 발생으로 인한 급성혈관장애.
매년 항공기 내에서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은 응급상황에 처하게 되는 질환.

확실히 구분된 공간.  어쩌다 사람들은 이런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밀집형 닭장과 여객기 좌석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  "닭은 닭이고,  3등석은 3등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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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기 좌석 관련, 더 많은 구구절절 이야기는 아래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401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