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직장이나 학교에 새로 들어온
사람을 신참,
신입생,
심지어 병아리라고까지 하대하던
시절,
새로운
힘을 내는 일꾼으로 자리매겨 준 것도 그 사람이었습니다.
동아리.
서클이란 본디 소규모
정치조직,
특히 공산당 조직을 지칭하던 것이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대학생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쓰이고 있었던 말이었는 데,
세상의
해방을 위해 동아줄 꼰 것처럼 서로 모여 힘을 내자는 듯한 이름을 붙여준 것도 그 사람이었습니다.
모꼬지.
놀이 잔치 등의 모임을 갖추는
일이란 뜻을 되살려..
신입생은
미팅,
고학년은
파티,
영어 좀 한다면 게더링으로
제멋대로이던 울력에 멋진 이름을 준 것도 그 사람이었습니다.
장산곶매 백기완은
그렇게 우리 곁에 내려와 달동네를 품고,
새내기를
북돋우며, 동아리를 이끌면서, 온갖 모꼬지로 고단하고 억울한 이들과 함께 새벽을 기다리다
동이
틀무렵에 훨훨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장산곶매 같았던
백기완의 민주·통일
한평생 등록
:2021-02-15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9.
이날
오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황해도
장산곶 마을에 깃든 매 한마리.
약한
동물들 괴롭히지 않고,
한해
딱 두번 자기 둥지 부수고 대륙으로 사냥 나가던 장수매.
어느
날 대륙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자 장산곶매 날아올라 피투성이 되도록 싸웠다.
독수리를
물리치고 낙락장송 위에 앉은 장산곶매.
이번엔
큰 구렁이가 매를 노리고 나무를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리치며 기진맥진한 매를 깨우려 했다.
백기완
선생의 삶에는 동시대를 거친 누구나 마찬가지로 우리 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황해도가
고향인 선생은 해방 뒤 서울로 내려왔다가 남북이 갈리는 바람에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식민통치와
전쟁으로 얼룩진 유소년기에는 마땅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다.
선생의
삶이 남달랐던 것은 척박한 상황에서도 먼저 깨어나 앞서서 나갔기 때문이다.
이십대인
1950년대부터
야학운동,
도시빈민운동,
농민운동을
벌였고 4·19혁명과
한-일
협정 반대운동,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타도에 앞장섰다.
현대사를
옥죄었던 식민통치의 잔재와 분단,
독재,
산업화의
그늘에 맞서 몸을 던져 싸우는 게 선생의 운명 같은 날갯짓이었다.
‘장산곶매
이야기’와
‘임을
위한 행진곡’
등
글로 남긴 이야기만큼이나 수많은 거리에서 비분과 신명 서린 연설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한 선생은 민중의 이야기꾼이었다.
그
사자후는 노년에도 사그라들 줄 몰랐다.
이라크
파병,
용산
참사,
한진중
희망버스,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박근혜
탄핵 등 민중의 아픔과 희망이 분출하는 현장마다 백발성성한 선생의 모습은 나부끼는 깃발 같았다.
숱한
투옥과 고문으로 몸에 새겨진 상처보다 가슴속 뜻이 더 선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병상에서
마지막 남긴 글귀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응원하는 것이었다.
몸이
부서져라 살았지만 선생의 꿈을 이루기엔 여든아홉해의 생은 짧았던 것일까.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을 눈에 담지 못했고,
‘너도나도
일하면서 모두가 함께 잘살되 올바로 사는 노나메기 세상’도
성취보다는 지향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선생의 미완의 삶을 따르고자 함은 명예나 이름을 탐하지 않고 낮은 곳에 몸 던진 그의 함성 같은 한평생이 사람에게 귀한
까닭이다.
깨어난
장산곶매는 발과 부리로 구렁이를 쪼아 물리쳤다.
마을
사람들의 함성 속에 장산곶매는 동트는 하늘로 훨훨 날아올랐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983060.html#csidx8f330aac790abbeb2be12b96d11bb22
달동네·새내기·동아리·모꼬지…
백기완 선생이
처음 사랑한 우리말 등록
:2021-02-15
시집,
영화극본
출간에 직접 무대에 서기도
김지하·김민기부터
전인권·송경동까지..
문화예술인들이
그를 따르며 영감과 자극 얻어
2016년
2월
백기완 선생(왼쪽)과
송경동 시인이 영화 <동주>를
관람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백기완
선생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5·18
광주항쟁
이듬해인 1981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동료였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극 <넋풀이>에
삽입된 합창곡으로,
김종률이
작곡했고 소설가 황석영이 백 선생의 장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일부를
변형해서 가사로 썼다.
원작은
백 선생이 1982년에
비매품으로 냈던 첫 시집 <젊은
날>에
실려 있다.
백기완
선생은 <젊은
날>
말고도
<이제
때는 왔다>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의
시집과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부심이의
엄마 생각>
같은
산문집,
<장산곶매
이야기>
<따끔한
한모금>
<버선발
이야기>
같은
옛이야기책 등을 펴냈고,
2009년에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자전 산문집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어려서는
축구선수가 꿈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그는 <단돈
만원>
<대륙>
<쾌진아
칭칭 나네>
같은
영화극본 역시 책으로 내놓았다.
생전
백기완 선생 주변에는 통일·노동운동가들과
함께 문화예술인과 문화 분야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1960~70년대
서울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김지하와 미술사학자 유홍준,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가수
김민기를 비롯해 화가 신학철,
가수
정태춘·전인권
등에서부터 최근에는 영화인 양기환과 시인 송경동 같은 예술인들이 그를 따랐다.
문학을
비롯해 문화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있는 이 예술가들은 백 선생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과 자극을 얻었다.
그의
주변에 이처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든 까닭은 그가 설파하는 특유의 민족미학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학 일반에 관해서든 예술의 각 장르에 관해서든 나름의 미학을 지니고 있었고 그 핵심은 ‘조선
고유’의
양식으로 사회 변혁을 이끄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선생의 <장산곶매
이야기>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
서두를
장식하며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징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4년
한국작가회의 창립 40주년
기념식 때 그가 ‘작가의
벗’으로
꼽혀 감사패를 받은 배경에는 문학과 문화 전반에 관한 그의 이런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
사석에서도
이야기와 노래,
호통과
눈물을 곁들이며 공연에 가까운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는 했던 백기완 선생은 시와 노래,
이야기
등으로 몇 차례 정식 무대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모금>을
소극장에서 온몸으로 구연하는 ‘말림’(2007년),
흘러간
유행가를 직접 부르며 그에 얽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공연(2009년),
그리고
2013년에
있었던 ‘백기완의
시 낭송의 밤’
등이
대표적이다.
‘문화인
백기완’의
성취와 기여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이다.
그는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을 처음 만들어 쓴 것이 선생이었다.
그가
쓴 책들에는 이와 함께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같은
어여쁜 순우리말들이 가득한데,
그중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들한테서 들어 익힌 것도 있지만 그 스스로 애써 궁리해서 만든 것들이 적지 않다.
백기완
선생은 2016년
2월22일
사랑하는 후배 송경동 시인과 함께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영화감독이
된다면 가장 먼저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에게 송경동 시인이 말했다.
“영화
끝부분에서 윤동주가 창살 밖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특히 마음에 남았어요.
선생님과
함께 본 그 별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선생님을 그 별처럼 그리워할 때도 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지고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로부터
5년
뒤,
백기완
선생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고 남은 이들은 별을 보며 생전의 선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bong@hani.co.kr
화보보기89
[화보]
거리의
혁명가,
백기완
1933~2021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2977.html#csidx62179879c4f4fcbbfa7d0c67a901558
89년 땅불쑥한
삶…백기완,
통일 싸움꾼이자
이야기꾼 등록
:2021-02-15
60~80년대
본격 반독재 운동.. 13·14대
대선때는 민중후보로
2천년대
들어서도 세월호·탄핵…
늘
민중운동 현장 맨 앞에 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서울대학교 장례식장에서 15일
오후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백기완
선생은 과거 <한겨레>
‘길을
찾아서’
연재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땅불쑥했던’
89년의
삶은 부슬비가 내리던 15일
새벽 마침내 평탄해졌다.
계절이
갈지자 걸으며 봄으로 가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계절을 건너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선생은
계유년(1933년)
1월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자락에서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해방
뒤 1946년
어머니와 큰형,
누나를
북한에 두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선생 가족도 남북에 나뉘어 살게 됐고,
갈라진
집안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일제시대
때 독립군에 군자금을 지원하다 일본 경찰에 들켜 고문받고 옥사한 조부 백태주 선생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고 한다.
탈옥해
조부의 집에 피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가르침,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도 그를 자연스레 통일운동으로 이끌었다.
유년
시절 그는 식민지 시절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만
다니고 혼자 공부했음에도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줄줄 읽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해외유학장려회’
첫
수혜자로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지만 “조국을
두고 혼자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청년
시절인 1952년부터
10여년
동안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운영했고,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에
몸담았다.
선생은
이 무렵 농민운동가로 처음 언론에 이름을 올렸다.
<동아일보>는
1955년
7월19일치
신문 3면에서
“백기완
군외 31명의
학생들은 20일부터
하기방학을 이용하여 2주일간
강원도 일대의 벽촌 지방을 두루 순회하면서 문맹퇴치 등 각종 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순회반을 조직하였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1957년
평생 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선생은
1960년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한-일
협정에 반대하며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섰다가 투옥됐다.
1966년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반독재 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에는
“유신
철폐”를
외치며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를 받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1979년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
사건’(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을
주도했다가 보안사에 끌려가 감금·고문당했다.
2015년,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위한 한겨울 오체투지 행진 중 참가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눈물 흘리는 여든세 살 백기완. 이정용
촬영.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선생은
이때 10시간의
모진 고문을 받던 중 정신을 잃고 깨어나 쓴 시가 ‘묏비나리’라고
밝힌 바 있다.
1980년
옥중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옥고를 치르면서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황석영
작가는 묏비나리의 일부분을 따 5·18
광주
민주화 항쟁 희생자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썼다.
선생은
1986년
‘권인숙
부천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또 한번 옥고를 치렀고,
이듬해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열린 13대
대통령 선거에 학생·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도 민중후보로 추대됐으나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수차례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당해 병든 몸이었지만 선생은 노동자,
농민,
철거민
등 약자를 위한 집회 현장 맨 앞줄을 지켰다.
탁월한
문장가였던 그는 동시에 뛰어난 연설가였다.
새하얀
머리에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며 집회 현장 연단에 올라설 때마다 선생은 언제나 피를 토하듯 문장을 쏟아냈다.
백골단에
의해 목숨을 잃은 명지대생 강경대 추모 집회(1991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2003년),
용산참사
투쟁(2009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와 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 시국회의(2014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2015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2016~2017년)
등
민중운동 현장 앞에는 늘 그가 있었다.
묏비나리에서
“딱
한 발 띠기(발을
떼다)에
목숨을 걸어라”
했던
선생은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재호 기자ph@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83088.html#csidx7c87cb3b8de33ff8570e54526b3c2ed
낳아준 아버지를 미워하는 힘으로 벼텨야 했던 한 여성,
길에서 만난 낯선 이를 새 아버지로 삼아 그는 세로운 세상을 향해 온 몸을 투신했습니다.
그 길 위의 아버지 역시 하늘로 떠나기 전, 그를 아버지로 모시고 살았던 딸을 위해 한 줄 소원을 남겼습니다..
“김진숙 힘내라 ! ”
====================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 /
김진숙
등록
:2021-02-17
추모글
_
백기완
선생 별세
사진
_
정택용
사진가
‘아부지’를
미워하는 힘으로 버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미
‘쓸데도
없는’
딸이
셋이나 있던 아부지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넷째
딸.
아부지처럼
안 사는 게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나는 십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오로지 아부지를 미워하는 데 썼습니다.
중간에서
시달리다 못해 무당을 찾아간 엄마는 ‘둘이
한집에 살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박수의 점사를 들고 와선 연속극에서처럼 머리에 띠를 매고 앓아눕고 마침내 저의 가출을 묵인,
방조하게
됩니다.
엄마가
준 오천원을 들고 집을 나와 1600원짜리
부산행 기차표를 끊어 같은 한국이지만 말 한마디 못 알아듣는 부산에서의 노동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고단하고
서러워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천리타향 객지에서도 아부지가 그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의 아부지들은 내남없이 대부분 그 모양이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습니다.
우리
아부지만 날 미워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아부지만 아들을 물고 빨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연년생이었던 남동생의 완벽한 보호자로 신발을 잃어버려도 내가 찾으러 다니고,
가방이나
모자를 잃어버려도 온 학교,
온
동네를 헤집어서 찾아내야 하고,
동생의
몸에 멍이나 조그만 흉터가 있어도 “동생
안 보고 뭐 하간?”
불호령을
들어야 했습니다.
동생이
깬 재떨이 때문에 내가 맞은 날은 그 추운 강화도 송해 벌판을 울며 건너 눈물로 젖은 얼굴이 터지기도 했었죠.
학교를
오갈 때는 ‘가방모찌’로,
강화의
그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날 밤새 줄을 서서 중앙교회에서 수백명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크림빵을 타다가 냄새도 못 맡아보고 동생에게 상납해야 했던
‘빵
셔틀’로
넷째 딸의 ‘쓸데’를
한정했던 아부지.
집을
나오니 돈은 안 되고 몸은 고된 일들뿐이라 사는 건 고달파도 아부지를 안 보는 것만으로도 살 만했습니다.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온 후 아부지가 부산엘 왔었습니다.
안기부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었다며,
동네
부끄러워 못 살겠다며,
너
땜에 집안 다 망한다며,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갔다가 다쳤다는 다리를 끌며 다시 기차를 타러 가며 “돈도
번대민서 넌 아부지한테 짜장면 한 그릇 안 사주냐?”는
아부지,
아부지가
이북 사람이라서 온몸이 피떡이 되도록 맞았다는 말을 뜨거운 쇠구슬처럼 삼키던 날이 지금도 서럽습니다.
97년
노개투(노동법개정투쟁)
총파업의
와중에 돌아가셔서,
죽어도
왜 하필 이렇게 바쁠 때 죽냐는 원망을 애도 대신 들어야 했던 아부지.
상복도
입지 않고 눈물도 한 방울 안 흘리는 걸로 마지막 복수를 했던 아부지와의 기나긴 애증의 세월.
선생님의
부고를 듣던 날 밤.
단
한 장 남은 아부지의 옛날 사진을 찾아봤습니다.
앨범
속에 끼지도 못한 채 버려지지도 못한 채 떠돌던 사진.
사진으로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던 아부지.
명절이면
‘불효자는
웁니다’를
다 못 부르고 꺼이꺼이 울던 아부지는 북녘땅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찾아갔을까요.
아부지랑
같은 말투를 쓰는 같은 고향 사람이었지만 너무나 달랐던 분.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선생님의 책을 읽었을 때의 놀라움과 질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있다니.
이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니.
그
후 박창수 위원장의 장례 투쟁에서 동지를 사지로 밀어 넣은 듯한 죄책감에 숨죽여 울던 우리를 향해,
이
죽음은 안기부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고 국가폭력이라고 일갈하시던 말씀에 우린 죄책감에서 놓여날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을 거치며 운동권 절반이 ‘정권의
인사’가
되었을 때도 거친 거리마다 선생님은 여전히 계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요.
노무현
정권 시절 그야말로 재야가 사라지고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아 ‘철없는’
투쟁을
할 때도 선생님은 늘 맨 앞에서 정권을 향한 비수 같은 말씀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거의 유일한
어른이셨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외롭고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에서 선생님께서
문정현
신부님,
박창수
위원장 아버님,
박종철
열사 아버님과 함께 한진중공업 담을 넘으시던 그날의 감동을 표현할 말을
저는
10년이
넘도록 찾지 못했습니다.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도 가장 먼저 안아주시던 선생님.
병석에
누우셔서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열변이 “김진숙
힘내라”.
저의
복직투쟁도 그렇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도 그렇고,
노동자들은
기나긴 투쟁을 해야겠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고문,
대공분실,
국가폭력,
감옥.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이 많을수록,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그만큼 앞으로 간 것이겠지요.
다음
세대는 그런 단어들을 못 알아듣길,
검색을
해도 얼른 알아들을 수 없는 세상이길 바랍니다.
다행히
그런 세상이 그리 멀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민주노총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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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3406.html#csidxcfe5e6fc6c6affa8e8705ad2134e81a
백발의 전사에게 /
송경동
등록
:2021-02-16
-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송 경 동
제대로 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청와대
앞에서 47일의
단식을 하면서도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던
선생님은 제 곁에 내내 계셨죠
전사는 집이 없는 거라고
돌아갈
곳을 부수고 싸워야 한다고
전사의
집은 불의에 맞서는 거리며
광장이며
일터이며 감옥이며 법정이어야 한다고 하셨죠
선생님께
드리는 시는
동지에게
드리는 시는
이런 투쟁의 거리에서 쓰여져야 제맛이겠죠
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게
무산자들의
철학이라고 하셨죠
철이
들었다는 속배들이여
썩은
구정물이 너희들의 안방까지 들이닥치고 있구나 하셨죠
내
배지만 부르고 내 등만 따스하려 하면
몸뚱이의
키도,
마음의
키도 안 큰다 하셨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하느니
딱
한 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하셨죠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 하셨죠
저항은
어떤 잘난 이들이 대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린
풀들이 숲을 이뤄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세찬 바람에 맞서 한걸음씩 나아가는 거라 하셨죠
그런 선생님과 함께한
모든
고공의 날들이 단식의 날들이
삭발
농성 원정 점거 오체투지의 날들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관료적
질서와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
보이지 않는 투신으로
내일
무엇을 얻을 거라는 계산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의 사회적 진실과 신음에 연대해
몸부림치며
절규하던 날들
채증해!
고착해!
포위해!
연행해!
구속해!
십차
이십차 해산명령에도 물러서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노구의
당신과 함께 나아가던
지난 세월들이 눈물겹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어제의 높은 어른이 아니라
함께
어깨 걸고 걸어가는 지금의 친구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지나온 영웅이 아닌 오늘의 동지여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말과 훈계와 교훈이 아닌
온몸의
연대와 실천이어서 고마웠습니다
그
모든 길에
당신이 타협이 아닌 올곧음이어서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지금
나는,
우리는
누구에 기대
이
부정하고 얍삽한 세상을 건너갈까
어디에서
장산곶매의 기상을
함께 일하고 함께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길이
막히면 뚫고 길이 없으면
새길을
내서라도 주어진 판을 깨고
노동자민중의
새판을 열어야 한다는 새뚝이의 이야기를
제국주의와
자본에 맞서 이름없이 쓰러져갔던
옛
전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나도
선생처럼 영영 권력과 부유함과 나태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밑바닥 민중들과 연대하며
거리와
광장에서 싸우다 쓰러질 수 있을까
두렵고 외로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마저
전사들의
유산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끝없는 분노와 서러움마저
전사들의
긴요한 양식이라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새로운
인간해방의 밑거름이 되어
모든
생명들의 소외와 고통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저 낮은 거리와 광장에서 맺은
우정은
사랑은
결의는
끝내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마웠습니다.
백발의
동지!
적폐청산 현장에서 함께했던 백기완 선생을 포옹하던 맨발의 디바,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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