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유신의 ‘입틀막’ 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그렇게 우린 아침이슬을 먹고 살았다. 김민기가 만든 노래로 허기를 달래며 견뎠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아닐까.
학전 이끈 ‘아침이슬’
김민기
별세…향년 73..
위암 투병하다 21일 눈 감아
기자 서정민 수정 2024-07-23
09:19
김민기 학전 대표.
한겨레
자료사진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 이슬’의 마지막
가사처럼,
그는 서러움
모두 버리고 저 너머로 훌쩍 갔다.
김민기 학전 대표가
21일 별세했다.
향년
73.
고인은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그가 운영해온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은 창립 33돌을 맞은 지난 3월15일 문을 닫았다.
재정난이
이어진데다 건강 문제까지 겹치자 김 대표는 결단을 내렸다.
김 대표는
학전의 레퍼토리를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로 투병해왔다고 학전 쪽은 전했다.
고인은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 때 고교·대학교 동창 김영세와 함께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회관의
‘청개구리의 집’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났고,
이때
‘아침 이슬’을
만들었다.
가수 양희은이
1971년 9월 ‘아침 이슬’을 담은 데뷔 앨범을
발표했고,
김민기도 같은
해 10월 ‘아침 이슬’
‘친구’
등을 담은 데뷔
앨범을 내놓았다.
‘아침 이슬’은 당시 유신 정권 반대 시위에서 널리
불렸다.
정권은 이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이후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도 금지곡
목록에 올렸다.
그는 1991년 3월15일 소극장 학전을 세우고
1994년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예술가들의
디딤돌 구실을 하고자 했다.
동물원·들국화·장필순·박학기·권진원·유리상자 등이 여기서
노래했고,
김광석은
1천회 공연을 했다.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장기 공연을
하면서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 등 여러 배우들이 거쳐
갔다.
학전 폐관을
앞두고 열린 ‘학전 어게인
콘서트’에는 이런 가수·배우·예술가 50여명이 참여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미영씨와 두 아들이
있다.
빈소는 서울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들 [김영희 칼럼]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기자 김영희 수정 2024-07-22
15:10
지난달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미리엘이라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홍세화 친척의 요청으로 성공회
이대용 신부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를 찾았다.
세례를 받겠냐는
물음에 한참 망설이던 홍세화는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을
감쌌던 미리엘 주교의 관용의 정신이 자신을 이끈 신념이었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영구 목사 또한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않던 시절,
자수성가한
서울대 출신 사업가로 출장이 잦던 그는 친구 박호성(전 서강대 교수)으로부터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를 한번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86년
센강변에서의 “운명적 만남”
이후 그는
평생의 벗이 됐다.
홍세화가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1979년 10월 내무부가 발표한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객이 된 뒤 생계를 위해 야간 택시운전을 할 때,
이영구 부부는
해마다 두차례씩 한국 음식을 싸들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홍세화 가족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오는 데는
임진택·유홍준 같은 벗들의 권유와 출간 알선과
함께,
몇년간 운전을
멈추고 글을 쓰도록 생활비를 대준 이영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런 이영구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도,
자신의 신앙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발인날 아침
가족과 몇몇 지인에게 이 신부를 소개하며 그는 “수십년을 곁에 있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한번도 종교를 권하지 못했는데”라며
웃었다.
이영구는
40대 후반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 살아오고 있다.
홍세화 가족이 망명객 생활을 하던
당시,
이영구 목사
부부가 파리를 찾으면 택시운전을 멈추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 이영구 목사 아내
임경자,
홍세화 아내
박일선,
홍세화(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사진.
뒤에 홍세화가
몰던 택시가 보인다. 이영구 목사
제공
1970년대 홍세화 부부의 집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엔 김민기도 있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뒷것’들을 떠올렸다.
홍세화도,
이영구도 그런
존재이리라.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은 행진곡풍의
‘전투적’
민중가요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왠지 난
‘이 세상 어딘가에’
‘강변에서’
같은 노래가
좋았다.
김민기 노래는
당시 민중가요와 다른 결이 있었다.
다큐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한 그는 권력에겐 ‘반정부 좌익’이었지만 그 바탕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2015년
이진순과 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서
‘죽도록’
맞던
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운동권
후배들에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게 된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다큐를 통해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적잖다.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나던
날,
그는 달동네
아이들의 공공어린이집 설립 모금공연을 위해 정권의 탄압 속에 아예 몇년간 손에서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았다.
암울했던
1978년 송창식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
녹음실을 빌려주고 녹음까지
해줬다는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과로에
연탄가스중독 사고로 숨졌던 전남대 학생 박기순의 영결식에 김민기가 나타나 ‘상록수’를 불렀다는 것도
그랬다.
나중에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했던 윤상원은 서울에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위해 내려와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박기순도,
오월 광주 당시
죽음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대변인 윤상원도 편하게 사는 ‘앞것’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뒷것’이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
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90년대 이후
학전의 실험을 통해선 연극을 하거나 인디음악을 하면 밥굶는 게 당연시되던 시스템을 바꿔냈다.
가수,
배우뿐
아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은 “90년대 운동판에서 내 강연을 다 헐값이나
공짜로 불러댈 때 처음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정산을 해준 게 김민기”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김민기는
2008년 장기흥행 중이던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중단하고
아동극을 시작한 이유를 “돈되는 일만 하다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많은 자료영상을 사용한 다큐인데도 그의
최근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는 끝까지
뒷것이다.
편집인dora@hani.co.kr
아침이슬,
그 사람 이진순의 열림, 김민기 (상)
이진순이 만난 학전 대표 김민기..
속마음 털어놓은 최초의
인터뷰 수정 2024-07-22
1970~80년대 청년 문화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자
노래와 연극,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 지평을 연 르네상스적 인간.
나이 만 스물에
지은 ‘아침이슬’이 평생 꼬리표가 된
사내.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그가 지나온 험한 세월만큼이나 많다.
1991년 개관한 소극장 학전은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를 배출한 한국 문화계의 산실이자 가수 김광석이 숨지기 전 1000회 공연을 한
곳이다.
김 대표가 직접 연출한
<지하철1호선>은 2008년 종연 때까지 15년간 71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으며
4000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
됐다.
지난
10여년간 고집스레 청소년극과 아동극에
공을 들이고 있는 김 대표는 공연 홍보 등을 제외하곤 속내를 털어놓는 긴 인터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겨레>
토요판 인터뷰
코너 ‘이진순의 열림’의 초대에 응한 그는 네 차례에 걸쳐
무려 15시간 동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가장 강조한 말은 ‘돈 안 되는 일’이었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첫 인터뷰 때의
모습이며,
다음주에는
제2회가 실린다.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
후줄근한 점퍼
차림에,
고개를 푹
수그린 사내가 벌서러 교무실 끌려오는 소년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막걸리
세 통이 든 비닐봉지가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내가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못할 것
같아서….”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그가 씩
웃었다.
공연물의
홍보를 위해 기자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옛날 얘기”를 듣겠다고 청해 오는 인터뷰는 번번이
사양을 해왔는데,
어쩌다 술김에
하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며 그가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20년 넘게
극단 학전을 이끌어온 대표이자,
15년 롱런의
경이적 기록을 세운 <지하철1호선>의 연출가.
그러나 그는
상업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대중적으로 나서는 일을 여전히 병적으로 혐오하는 듯했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원형질을 제공한
국내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콘서트 한번 안
했는데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의 노래가 불린 사람,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그 스스로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되었던
사람,
미술에서
시작해서 노래와 연극과 문학을 아우르며 한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사람.
김민기(64),
그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도 밀도 높은 삶을 살아왔다.
‘아침이슬’이 담긴 데뷔앨범을 낸 게 그의 나이
만 스무 살 때이니,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지나온 삶의 아픔과 갈등,
회한과 소망을
담담히 들려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험한
시대를 가장 뜨겁게 겪어냈으면서도,
가시 돋친
공격성이라곤 없이 유순하고 담담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뭔지,
어떻게 이 남자는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나도 그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을 받았다.
음반 팔아 마련한 배우들의
못자리,
학전
그가 가장 덜 부담스러워할
질문,
학전에서 최근
준비 중인 인문학 강좌에 대한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스신화에 대한 강좌가 곧 시작될
거라던데.
“학전 문예 강좌를 시작한 게
94년인데,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교수
같은 분들 모시고 한국학 관련된 걸 주로 하다가 이번에 11번째로 잡은 주제가
그리스신화다.
서양에서
인문학의 원조라면 그리스신화인데,
유재원
교수(한국외대 그리스학)가 내가 알기론 이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보물이다.
3년 동안 총
30강 계획으로 학문적인 총정리를 해보려
한다.”
-인문학 강좌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정작 당신은 왜 강의를 한번도 안 했나?
“난 ‘쟁이’지,
평론가나
정치가가 아니거든.
내가 추상화를
걸었는데 누가 와서 이게 뭘 의미하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어.
작품을
말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그리는 시늉 하며)
직접 만드는
팔자가 있는 거니깐.
그걸 설명할
재주가 있었다면 그림을 안 그리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제야 그와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내친김에 나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그간 하신 인터뷰를 찾아 읽어봤는데 좀
아쉬운 점이 느껴졌다.
김민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형화된 선입관을 깨겠다는 마음에서 그랬을 테지만,
어떤 대답은
너무 무성의하고 위악적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 공장
가고 탄광 간 것 물어볼 때마다 ‘아무 뜻 없고,
그냥 먹고살려고
간 거다’라고
답한다든지,
정치적인 질문에
대해서 ‘난 그런 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정말 그게
다인가?
대한민국 평균
시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쭉 그렇게
답해왔다.
그동안은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자고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건 들을 생각 안 하고 다른 얘기,
‘너 어떤
사람이야?’
자꾸 이런 걸
물으니까…
난 그저
‘몰라.
그거 얘기할
준비도 안 돼 있어’라고 말하려던
건데.
나중에 그게
인용이 되면 또 다르게 비치기도 하고…
나도 이번엔
에잇,
‘발가벗으라면
벗자’
하는 심정으로
나왔다.”
-감사드린다.(웃음)
젊은 시절의
김민기를 우상화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을 폄하하지도 마시고,
균형 잡힌
회고를 해주셨으면 한다.
오늘은
‘그간 무엇을
하셨는가?’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여쭙겠다.
“완전 보안사
취조실이네.
‘너 왜
그랬어?’
하는….(웃음)”
-학전 얘기부터.
학전은 어떻게
오픈하게 된 건가?
돈도 별로
없으셨을 것 같은데.
“연우무대라는 극단이
있었다.
내
친구,
선후배들이 하는
극단이어서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랬는데,
내
지인이던 지금의 건물주가 ‘연우무대가 온다면 소극장을
지어주겠다’
한
거야.
난 연극인도
아니고 중간다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됐지.
근데 돈이
있나?
그래서 대형
음반사를 찾아갔다.
선불금을
5천만원 해줄 수 있냐고 하니까 당장
해주겠다고 그러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떨이로 음반 넉 장을 낸 거지.
노래할 생각이
조금치도 없었는데.”
그때 나온 음반이
<김민기 전집>(1993)이다.
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그 돈으로
91년 학전이
개관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들을 배출해낸
연기사관학교로 불린다.
황정민,
조승우,
김윤석,
설경구,
방은진
같은 이들이 모두 학전 출신이니.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그 말대로 되었다.
학전에서 자란
연기자들이 한국 문화계 주역이 되었으니.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배우를 캐스팅할 때 뭘 제일 중요하게
보시나?
“학전 오픈할 때,
내가 연극이나
뮤지컬에 대해서 미리 배워놓은 게 없으니까 뭘 가르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백지(白紙)니까 배우를 캐스팅할 때도 백지인
애들을 뽑은 것 같다.
이미 어디서 뭘
배워 온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쿠세’(굳어진 습관)랄까,
‘쪼’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컨트롤할 능력도
없고.
나처럼 백지
입장에서 같이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얘길…”
막걸리 세 통
들고 나타난 그
자신 드러내길 병적으로 혐오해온
학전 대표,
<지하철1호선>
연출가
그가 발가벗는 심정으로 나왔다.
15년간 관객 71만명 끌며 매표수입 100억 넘긴 <지하철1호선> 4000회 끝으로 돌연 중단
선언... 대신
10년째 청소년·아동극에 공.. “세상엔 돈 안돼도 해야 할 일
많아”
김광석과 유재하를 먼저
보내고…
-학전 입구에 김광석 노래비가
있던데,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이 있는가 보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는데,
처음 만난
게 84년도던가?
광석이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김광석이 노래를
못한다고?
“비틀스가 그렇게 유명하지만 비틀스도
노래는 잘 못하지.
테크니컬한
측면에서는.”
-(갸우뚱)
일단,
그렇다
치고….
“학전 오픈하고 몇 개월 만에 빚이
한없이 늘었다.
100퍼센트
대관이 된다고 해도 계속 적자….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을 정도였다.
-노래를 못하는 애라고
하셨는데.(웃음)
“그래도 광석이의 미덕이 하나
있다.
젊은애들이
딴따라를 하게 되면 대개 싱어송라이터를 하고 싶어 한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 이거지.
근데
싱어송라이터들은 자기 곡만 줄기차게 부르려고 해.
광석이는
지가 만든 곡이 여럿 있지만 다른 좋은 노래를 계속 찾아다니면서 부른 거야.
그러기 쉽지
않은데 큰 미덕이지.”
‘이등병의 편지’(원곡 전인권)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원곡 김목경)도 그렇게 리메이크된
곡들이다.
그러던 김광석이
96년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런 인연으로 김광석 추모사업회장을
맡으셨나?
“내 팔자에 어쩌다가 먼저 죽은 후배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는지…
유재하도 비슷한
케이슨데,
걔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재하가 죽기
일주일 전 날 찾아왔어.
내가 그때 그
녀석한테 준 선물이 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박봉술 선생의 흥보가였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박봉술 선생의 창법은 당시까지는
‘썩은 목’이라고 불리던
건데,
‘한국말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텁텁하게 할 수 있는지’
공부하라고 준
거지.
재하 창법이
판소리에서 말하는 ‘노랑목’이어서.
근데 아마 그
녀석,
안 들었을
거야.(피식 웃음)
재하 사십구재
공연도 내가 연출해서 했고,
작년부터 재하네
그룹이 학전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어.
어쩌다 보니
광석이,
재하 요 두
라인이 학전 팔자에 이상하게 끼어 들어와 있네.”
-김광석이나 유재하는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블루칩’
같은
존잰데,
그걸로 돈을
만들어서 ‘뭔가 더 의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쓰겠다’
이런 식으로
가는 게 경영자 마인드 아닌가?
“그렇게 나온 대형 뮤지컬도 몇 편
있다.
<그날들>이라든가 <디셈버>….
근데 난 그걸
못하겠다.”
-왜?
“인터뷰 못하는 거랑
똑같다.
그냥 체질에 안
맞는 것.”
-돈이 싫은가?
“아우,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학전에 지금
빚이 몇 억인지.
요새 계산도 안
돼.”
-<김광석 다시
부르기>
콘서트도 관객이
몰리니까 학전에서 하던 걸 바깥의 대형극장으로 내보내고.
오는 돈도
마다하시는 판국이다.
“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지,
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야.”
-정 그러면 대본이나 연출 이외의
업무들,
기획이나 제작
같은 비즈니스는 누구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게 고용이
되거든.
그러면
그쪽에서도 돈의 논리 때문에 나한테 (상업성 있는)
작품 내용을
요구하게 된다고.
근데 나는
그 돈 벌겠다고 내용을 그렇게 바꾸고 싶지가 않은 거지.”
‘쟁이’가 뭐냐고?
병이지,
결벽증
같은…
91년 이래 적자 누적으로 폐관 위기에
놓였던 학전에 극적 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94년 초연된 뮤지컬
<지하철1호선>이었다.
독일
그립스극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지만,
김민기의 거듭된
수정 번안을 통해 완전히 한국의 뮤지컬로 재창조된 작품이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전국순회공연과
해외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친 <지하철1호선>은 그러나
2008년 4천회 공연을 끝으로 돌연
중단을 선언했다.
-15년간 관객 71만명을 끌어들인 작품인데 왜 공연을
중단했나?
“그게 아마 매표수입이
100억원을 넘겼을
건데.”
-저런!
계속했으면
‘창조경제’의 모범이
되었겠다.(웃음)
“중단한 이유?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 이런
걸까.
더 뭐를
물어봐야 할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면…
어,
저,
관객수가 줄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고,
그냥
‘끊은’
거다.
장기공연으로 가다 보니까 배우들의
체력이나 감성을 고려해서 1년에 2팀이 돌아가며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완전히 부속품이 되더라고.
나 이러자고
세상 사는 거 아닌데,
내 나이도
낼모레 환갑이고 이 짓 하다가 죽을 거냐 싶더라.
그래서 딱
끊었다.”
-‘끊었다’고 표현하신다!
“어차피 난 돈 되는 거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내가 해야 할 일,
내 나이에 맞는 걸
해야지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직원을 보며)
대번에 고개
끄덕거리는 것 좀 봐.(웃음)”
돈 되는 <지하철1호선>
대신,
자신이 할
일이라고 여기며 김민기가 10여년째 공을 들이는 건
청소년,
아동극이다.
‘학전
청소년무대’
시리즈로
<굿모닝 학교>
<복서와
소년>을,
‘학전
어린이무대’
시리즈로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무적의
삼총사>
등을 잇따라
선보였다.
어린이물은 방학
중에만 올리고 평상시엔 성인물을 올리는 게 연극계의 상례인데,
학기 중에도
어린이,
청소년극에
전력투구하고 있으니 공연을 할수록 적자만 느는 게 당연하다.
작년부터 어린이정가를
1만8000원에서 1만2000원으로 바꾸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소득수준이 낮은
가정의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자는 김민기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턴가?
“아주…
오래전부터.
71, 72년에
양희은이랑 판 낼 때도 애들 노래는 꼭 들어갔다.
그냥 왠지
애들에 대해서 늘 관심이 가더라고.
동학에서
최시형이 ‘애 때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꾸 마음에
맴돌고.
쟁이라는 게
‘어떻게 계산하면 돈이
될지’는 따지지
않으면서,
자기가 딱 꽂히면 거기서 피할 수가
없다.
그게 쟁이의
속성이다.”
-‘쟁이’의 정의가 뭔가?
“어이쿠,
뭐 그런 어려운
질문을…
병이지,
뭐 결벽증
같은.”
-그래도 계속 적자를 보면서 할 수는
없지 않나?
“(언성 높이며)
내 목표는 더
이상 빚낼 수 없어서 문 닫을 때까지 그 짓을 하는 거다.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는 거지.
이건 피할 수
없는 내 팔자야.
그래도 이런 것
정도는 우리한테 있어야 된다고!
논리를
떠나서!
낫살 먹은 놈이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이지.”
따박따박 돈 얘기만 물고 늘어지는 데
그는 부아가 난 모양이었다.
최소 경상지출만 한달에
4천~5천만원인데 그는 어떻게든 빚을 내서
직원들 월급을 밀린 적은 없다고 했다.
아이엠에프(IMF)
때 딱 한번
빼고는.
작곡·작사가로서 그간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가
재정적 도움이 되나 궁금해 물으니 “월 백만원대”란다.
100여곡에
달하는 노래를 만든 사람의 저작권료로는 믿어지지 않는 액수다.
그래서 이번에
저작권 신탁관리를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새로 생긴 ‘함께하는
음악저작인협회’로 옮긴다고
했지만,
돈의 액수
때문이라기보다는 투명성에 대한 불신 때문인 듯했다.
문둥이 아이를
받아내던 산파 어머니
김민기는 1951년 전쟁통에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민군에 학살당해 돌아가시고 과부가 된 어머니가 유복자인 민기를 낳았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나오고 연희전문 1기로 입학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출생부터
파란만장하시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기적이지.
어머니는 늘
바쁘시고 형제들은 학교 가고 혼자 놀면서 컸는데,
어려서 제일
무서운 게 뭐였는지 알아?
아이고,
근데 내가
취했다.
자꾸
반말을….”
-편하게 말씀하셔도
된다.(웃음)
제일 무서운
게…?
“제일 무서운 게 문둥이하고 팔다리 잘린
상이군인들이었다.
근데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형,
누나들이 온다고
해서 역에 마중 나가는데,
역에서 그
무시무시한 문둥이들이 우릴 보고 막 다가오는 거야.
굉장히
무서웠다.
근데
그놈들이 어머니한테 인사를 굽실하고…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정 때부터 받아준 놈들이야.
어머니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겠어?
내 말은 세상에
돈 되는 일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그
전쟁통에 그 아이들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야?
돈이 안 돼도 사람이
해야 되는 일은 해야 된다.
내가 아동극을
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서울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을 거쳐 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말할
만큼.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았나?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그럼 뭘 그리나?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
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그리는
시늉)
단지 붓이
아니고….”
-음악으로 그렸다?
“노래로 그린 거지.
<지하철1호선>도 사실은
풍속화야.”
김민기는
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그에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재동국민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전의 인터뷰
보니,
‘아침이슬’이나 ‘상록수’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시던데 왜 그러나?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87년 시청앞 광장에서 이한열 노제가
벌어질 때 어디 계셨나?
“나,
거기
있었다.”
-어떠셨나?
“앗,
뜨!
뭐 그런
느낌…
백만명이
부르는데,
그
백만명이 다 각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부르는데 내가 그걸 뭐라고 감히 말하겠나?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건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71년 발표된 ‘아침이슬’은 그의 험난한 인생의
출발점이었지만,
처음엔 누구도
그 노래의 장대한 후폭풍을 예감하지 못했다.
김민기
1집에 실린 곡 중 제일 먼저 방송금지된
것은 ‘꽃 피우는 아이’.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가사가
화근이었다.
72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김민기가 이 노래를 부른 것 때문에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고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다.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고,
수시로
체포,
고문,
취조받는 일상이
이어졌다.
‘아침이슬’은 그 와중에도 은밀한
바람처럼,
소리 없는
잉걸불처럼 퍼져나갔다.
결국
75년엔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채
금지곡이 되었다.
“내 몸서 나간 ‘아침이슬’
‘상록수’..
나간 것 백배가
돼 돌아와 버거워
1987년 시청앞 이한열 노제때
백만명 부르는데
앗,
뜨 그런
느낌
아,
이제 내 노래가
아니구나”
“우리말의 생동성 처음 깨우쳐준
김지하에게
무한한 고마움 가져
그러나 정치적 입장에는
전혀…나와 무관하고 영향 준 바도 없어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나를 죽이던
사람들,
나 때문에 죄를
짓는구나
-몇 번이나
잡혀갔나?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던가?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미안했다고?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게,
몇 살
때인가?
“스물서너살?
그러고
풀려났는데 그때 한참 해방신학이 뜰 때였지.
누가 그러데.
본회퍼 목사가
‘히틀러는 총으로 쏴서 죽여야
된다’고 했다고.
근데
나는,
죽어가면서 나를
고문한 놈들한테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했다.
그래서 본회퍼
식의 해방신학은 아닌 것 같다 그랬지.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그거였을까?
괴물과 싸우면서도 괴물을 닮지
않고,
유순한 소년의 마음을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것이 복받쳐 올라 얼른 막걸리 잔을 비웠다.
-71년 얘기로
돌아가자.
김지하를 그
무렵 처음 만났다고 하던데,
당시로선 하늘
같은 선배였겠다.
“아니,
그러진
않았고…
미대 선배가
소개를 해줬는데,
혜화동
명륜다방에서 처음 만났지.
그때가 지하
형이 <오적>을 쓰고 도피할 때였는데 만나는 순간
느낌이 별로였다.”
-왜?
“수배 중이었는데 굉장히 럭셔리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거든.(웃음)
그 이후로 일을
참 많이 같이 했지.
친동생
이상이었어.”
그는 “지하 형”과의 관계를 과거형으로
말했다.
오랜 기간
김지하와 나눈 인간적 우애에도 불구하고,
지난 대선기간에
김지하가 보인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일’
이후로 다시
만나지도,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셨으니 그분이 왜
그랬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나?
“예전에도 문화운동 쪽에서는 김지하 옆에
내 이름이 늘 따라붙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꼭 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김지하한테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는 건,
내게 우리말의
생동성을 처음 깨우쳐준 선배라는 점.
문자에 갇혀
있지 않고 살아 있는 말의 생동성.
그게
판소리하고도 통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학전 배우들한테도 유난히 강조했던 게,
배우는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이었다.
그 점에 있어선
여전히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난
그 양반의 사상적인,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고 영향을 준 바도 없어.
최근 몇 년
동안 그 양반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난 뭐 코멘트 할 게 없지.
그건 그 양반
생각이고.”
-화제를 좀
바꿔보겠다.
그렇게 많은
노래를 지었으면서 왜 변변한 연애 노래는 없나?
연애 안 해
보셨나?(웃음)
“하고 싶었지.
왜 그
나이에.
20대 초반에
연애를 안 하고 싶었겠어?”
-게다가 기타 잘 치는 남자는 인기도
많은데.
“내가 지금은 얼굴이 시커멓지만 그때는
아이돌이었어.(웃음)”
-그런데 왜 연애 노래가
없으시냐고?
“(답답하다는 듯)
내
뒤에 항상 기관원들이 따라붙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나?
친한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나도 모른 척하고 다니던 땐데.”
-남들은 도망 다니면서 연애만
잘하던데.(웃음)
“연애는 숨어서 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래를 만들기까지는 숙성이 돼야 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숙성을
시킬 여유가 없었어.”
-안타까운 일이네.
“내 가사 중에 사랑이란 낱말이 뭐냐고
물어보는 노래가 하나 있어.
‘두리번거린다’에서….”
그의 얘길 듣고 노랫말을 나직이 읊조려
보았다.
“헐벗은 내 몸이 뒤안에서 떠는
것은/
사랑과 미움과 배움의
참(眞)을/
너로부터 가르쳐 받지 못한
탓이나/
하여 나는 바람 부는 처음을 알고 파서
두리번거린다/
말없이 찾아온 친구
곁에서/
교정 뒤안의
황무지에서.”(‘두리번거린다’
1972년
작)
외로운 스물한살 청년의 프로필이 머리
희끗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밤은 깊어가고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
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1951년 3월31일
전북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가
인민군에 피살당해 유복자로 태어남.
1963년
서울로 이사.
재동국민학교(현 재동초)
졸업.
경기중 입학해
미술반 활동.
1966년
경기고 입학.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 선물 받고 독학으로 연습.
‘친구’
작곡.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미대 동기이자
고교 동창인 김영세와 듀오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활동.
1985년 결혼식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서울 구기동 ‘서울미술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8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사설미술관인
서울미술관은 당대 전위미술을 이끈 곳으로 평가된 곳입니다.
1970년
양희은 만남.
‘아침이슬’
작곡해 양희은
통해 발표.
1971년
<오적>
쓰고 도피 중인
김지하 만남.
‘민중 주체의
민족문화운동’(김지하)
지향하는 모임
‘폰트라’(쓰레기 더미 위의
시)
참가.
신정동 야학,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아침이슬’,
‘친구’
등 담긴 음반
<김민기>
출시.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금지곡
지정된 ‘꽃 피우는 아이’
불렀다 음반
전량 압수,
동대문경찰서
연행.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
참가.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
작곡.
1974년
70년대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마당극 <아구>
제작
참여.
10월 카투사로
군 입대.
1975년
보안부대 소환된 뒤 최전방으로
배치.
군 생활 동안
‘식구 생각’,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작곡.
‘아침이슬’
금지곡
지정.
1977년
5월 제대.
인천 부평
봉제공장 취직.
동료
공장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
작곡.
공장 생활 중
대학 졸업장과 중등교사 자격증 받음.
1978년
‘상록수’,
‘밤뱃놀이’,
‘천릿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김민기
노래로만 채워진 양희은 공식 음반 출시.
노래굿 ‘공장의 불빛’
제작.
중앙정보부 연행
뒤 훈방.
고향 전북
익산으로 내려감.
1979년
10·26
뒤 전북 김제로
거처 옮겨 소작농 생활.
1991년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한겨레신문사가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을 맡아
엔딩곡으로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1981년
황석영 주도로 만들어진 극단
‘광대’
창립
기념공연.
김제·전주지역 연극패들과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
창작.
경기 전곡에서 참깨
농사,
충남 보령에서
탄광 일.
1983년
농촌 생활 접고 서울로
돌아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연출.
1984년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1>
제작.
1985년
아동 뮤지컬 작업 같이 한 인연으로
만난 이미영과 결혼.
서울 불광동 두 칸 전세방에서 어머니와
두 조카와 함께 살림 시작.
당시 나이
서른다섯.
1987년
‘6월 항쟁’으로 금지곡 일부
해제.
탄광촌 이야기
담은 아동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
발표.
1989년
한살림모임 창립해 초대 사무국장
지냄.
김지하 시인(오른쪽)과 함께 술자리를 하던
모습입니다.
좌측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
1991년
한민족의 노래를 발굴해 보급하자는
취지로 제작된 음반 <겨레의 노래>
총감독,
학전 소극장
개관.
1993년
직접 부른 39곡 수록된 음반 <김민기 전집>
발표.
1994년
5월 국내 최장수 기록 가진 뮤지컬
<지하철1호선>
공연
시작.
1995년
록 오페라 <개똥이>
공연.
1997년
록 뮤지컬 <모스키토>
공연.
1999년
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
포크음악
30주년 기념한 김민기 헌정 공연에
불참.
2007년 괴테 메달 수상 독일 정부가 세계적
예술가나 학자에게 수여하는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2001년
37회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 및
연출상 수상.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
수상.
2008년
<지하철1호선>
종연.
15년 동안
4천회 공연,
71만명
관람.
2011년 학전 20주년 1991년 3월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을 개관하면서 설립된 극단 학전이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날 함께해준 이들만으로도
200석 극장을 꽉 채우고도
넘쳤습니다.
‘아침이슬’
김민기 “세월호,
나는 그 죽음을 묘사할 자격이
없다”..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 (하)
첫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후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가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내 관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어색해 미치겠으니 빨리 끝내
달라”며 사진기자를
독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중정에서
원하는 노래 안 만들어 영창으로
-사무실에 기타가 안
보인다.
기타 안
치시나?
“미쳤어?”
그가 짐짓 퉁명스럽게 질문을
걷어냈다.
다시 둘러보아도
기타나 키보드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기타도 없고,
노래도 안
만드시고….
“학전 열고 지금까지 해온
(뮤지컬 번안곡)
작업들이 다
노래하고 관련된 건데 뭐.”
-왜 대중가요는 더 이상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으시나?
다방 같은
데서라도 당신 노래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간다는 일화가 있던데.
노래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단 말이야.”
-당신 노래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에겐
각별한 추억이 담긴 곡들이다.
“다시 ‘쟁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쟁이는 어제 했던 작업을 부정해야 해.
안 그러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꼭 그래야 하나?
화가 중에도
물방울이나 꽃 그림만 연작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
판소리 오래
하시는 분 중에도 주요 레퍼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도 있지만 난 그런 데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아.
계속 더
찾아보고 싶어,
새로운
걸.”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것
아닌가?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그렇게 살았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기타 싱어송
라이터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71년 이후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김영동,
이애주,
김석만 등을
만나면서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1974.
대본
김민기)를 만들었고
78년에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곡,
제작했다.
90년에는
상업적 음악유통망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민족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발굴 수집하는 <겨레의 노래>(주최 한겨레신문)
사업을 감독했고
91년 학전 설립 이후에는 록
오페라,
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음악적인 실험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그의 삶이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저항가요의 상징이 된 것은 그걸
지은 사람이 김민기였기 때문이고,
김민기 스스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깨치고
나가”는 삶이 무언지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2년 그의
앨범이 압수되고 그의 노래가 금지되었을 때 김민기의 나이 고작 이십대 초반,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였다.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통기타 친구들은 주류 문화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던 “미대 형”이 선택한 길은 그러나
무대도,
화단(畵壇)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김민기는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71년에 음반을 낼 때는 전업가수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 아닌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하려고 했어.
근데 그
71년 판이 압수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학벌 좋고 인맥 좋아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소시민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텐데.
“소시민적으로
살았지.”
-교사자격증도 있었지
않나?
정보기관에
찍혀서 취직이 어렵다 해도 미술학원 강사나 반주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래
만들어라’
했을 때 내가
응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길로 풀렸을 거야.
당시에 난 제법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이 있다.”
74년 카투사로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75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나게 된다.
중정의 학원
담당이라는 자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노래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들면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 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압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식구생각’이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
(‘식구생각’,
1975년
작)
-중정요원이
황당했겠다!
“군대에 있는데 내가 뭐 거부를 할 수
있나?
만들라 하니
만든 거지.
근데 아무리
걔들이 요구해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그거밖에 안 되는데 어쩌라고?”
김민기는 곧바로 사단 영창에 보내졌고
최전방부대로 재배치되었다.
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가 취직한 곳은 부평의 한 봉제 공장이었다.
동료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고,
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때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호 얘기 무지 하고
싶지만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아니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
누군가 세월호 영화 주제가 요청..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
쓰라
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노래 ‘친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런데 조사만 받고 구속이 안
되었다.
“어차피 완전 포획돼 있는데 차라리 날
좀 구속해줬으면 좋겠더라구.
근데 나도
나중에 안 거지만,
‘저 새끼 잡아
놓으면 영웅 된다’고,
그래 가지고 안
잡아넣고 고사(枯死)시킬 작정을 한
거야.
‘좋다.
니들이 나를
밑바닥이라 하니 그럼 난 내가 좋아하는 밑바닥으로 들어갈게’
그렇게 맘먹고
전라도에서부터 (농사일을)
시작한
거지.”
김민기는 고향인 익산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농사일을 배우다가 김제를 거쳐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천평 쌀농사를
지었다.
마을의 청년들과
합세해서 거기서 생산된 쌀을 도농직거래로 팔아 마을기금으로 쓰기도 했다.
시인 황명걸은
당시 김민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친구,
쌀장수
김민기/
영롱한 아침이슬 잔뜩 구두에
묻히고서/
그가 오고 있다…”(‘쌀장수 김민기’
중에서
1984)
-10·26이 나고 유신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계속
농사만 지었다.
‘이제 좀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해지겠구나’
다시 음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
“(고개를 절레절레)
아예 농촌
내려갈 때 노래를 잊어버리려고 했지.
아침에
무슨 노래 하나 생각나서 하루 종일 따라붙으면 짜증나잖아.
그런 게 난
얼마나 많았겠어?
기타를 치는
사람,
현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 끝이 무지하게 귀해.
그런데 농사를
딱 시작하는 순간 이게 다 망가지는 거지.
그렇게 지워
버리려고 하다 보니까 지워지더라고 노래에 대한 기억이.”
-김제에서 농사지을 때
5·18이 일어났다.
들불야학이나
광주의 문화운동패하고도 평소에 교분이 있었다고 하던데,
광주항쟁에 대한
노래나 공연물을 만든 건 없다.
“없지.”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두가지 다….
왜냐면,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 세월호 아이들에 대해서 노래를
못 만드시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더
기억하게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자꾸 세월호 얘기를 물어서
죄송한데….
“세월호 얘기,
난 무지하게
많이 하고 싶어.”
-세월호가 우리 밑바닥을 다 드러낸
사건이었지 않나?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효용으로 환산한 우리의 밑바닥.
이런 셈법으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데.
“똑같은 생각이다.
세월호
이후에 어떤 영화감독들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보고 주제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야!
나 박정희가
시켜도 나 그런 거 안 했어.
왜 니들이 날
시켜?’
그래놓고는
안쓰러워서 내가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라는 노래가 있으니 그걸
쓰라고 했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하는 그
노래!
“거기가 북평이었는데 지금은
동해시인가?
그때 난
고3이었는데 학교에서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이랑 야영을 갔다가 후배 하나가 죽었어.
그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려고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느낀 걸 노래로 만든 거야.
누가 그렇게
썼더라고.
1절하고
2절 가사가 뉘앙스가 너무
다르다고.
1절의 가사는 ‘검푸른 바닷가에…’
어쩌고
서정적으로 가다가 2절은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이렇게
나간다고.
그 1절하고 2절의 간극이
뭐였냐면…
그 집행부
새끼들!
다
어른들이지.
너무 억울했어.
내가 만약에
후배 집으로 연락하러 오지 않았다면 난 그 어른들하고 붙들고 싸웠을 거야.
그 당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강재훈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저 양반처럼
이렇게 찍은 거야.
그걸 제품이라고
만든 게 아냐.
차고 넘쳐서
흘러나오는 흔적이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된 거지.”
-다른 사람들 회고에
따르면,
‘김민기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명곡 한 곡을 써내는 천재’라고
하던데.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원주로 공연 가는 버스 안에서
지었고,
술자리에서,
결혼 축가로
즉석에서 곡을 뽑아내는….
“아니 그럴 수가
없어.
주변에서 자꾸
그렇게 구술을 하는 거지.
실제 작업하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지가 않다고.
원래 그런
게 속에 있었으니까 긴 시간 숙성이 되가지고 나오는 거지,
라면
300원에 사듯이 그렇게 되는 게 창작이
아니잖아.”
허문도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간다”며
거절
그는 노래가 군중을 각성시키거나
일깨우는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래로 군중을 기만하는 건 더 큰 죄라고 여겼다.
광주학살로
집권한 5공화국 신군부는 1981년 ‘국풍81’이란 대형 문화축제를
기획했다.
훗날 공개된
정부 기밀문서에는 “학원문제를 국풍으로 유도해 축제 속에
매몰시킨다”는 국풍81의 목적이 전두환,
허문도의
친필서명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문도를 직접
만나셨나?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아,
그 말로만 듣던
백지수표?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고
했지.”
그에게 “왜 받지 않았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 유혹을 물리친 사람한테나 적절한 질문이다.
김민기에겐
애당초 받을 이유가 없었을 뿐,
받지 않을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80년대는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전두환 독재에 대항해서 시국선언이나 서명운동을 맹렬히 벌이던 때다.
70년대 당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들이 그 핵심에 있었는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활동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난 민예총에도 가입 안
했어.”
-왜 안 하셨나?
“그분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현실 참여의 문법이 다른
거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거야.
누군가는
그러지.
‘넌
사람들이 말하는 스타의 자질도 있는데 왜 안 하냐?
너 잘난 척하는
거냐?’
근데 그런 게
아니라니깐.
나는 한없이 힘들게 내 일을 하고
있는데.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들이
아티스트를 인정해준다면,
샤갈의 그림 한
폭에 모든 우주의 얘기가 다 들어 있는 거야.
그 그림에
정치건 뭐건 다 있다고.
근데
왜!
난…
억울한
거지.
아이쿠,
내 목소리가
이상해졌네.
허허.”
김민기는 이 대목에서 격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도
80년대는 쓰라린 기억인
듯했다.
-1984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제작 발매해서 노래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셨다.
그런데 그 후
노래운동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걸로 안다.
“노래라는 게 ‘말’(言)하고 ‘음’(音)하고의 조합인데,
그 조합관계에서
난 아직도 해결 못한 숙제가 많다고.
근데 어떤 애들은 그걸 뛰어넘어서
다 해결한 것처럼 군다 말이야.
한자말이거나
관제화된 말을 막 쓰면서 거기다 음악을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김민기 음악은
70년대 통기타 음악하고도
다르고,
80년대
노래운동 계열하고도 다른,
단독
카테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건
아니고…
난 미술을 한
사람인데,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고.
에잇…
이제
(인터뷰어의)
고문 취조가
막바지까지 가네.(웃음)”
극단 학전 사무실 한편의
풍경.
김민기 대표가 사용하는 책상과 책상
밑에 이동식으로 마련된 침대가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하 2㎞
막장에서 만난
것
사람들 뇌리 속에 김민기는 저항가요의
전설이었지만 그는 사실 투쟁가를 목청 높이 외쳐 부르게 하는 전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부를 때나 탁자가 부서져라 군창을 할 때에도,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를 수리해서 땅을 일구고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충청도 탄광에 가서 광부 일을 하거나 목포 앞 김 양식장에 가서 일당 잡부를 하기도 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농사를 짓던 때가 제일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한 글을 읽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농사도
그렇고 탄광도 그렇고 모든 게 배움이었으니까.
그때 내가 하나
깨달은 게 있는데,
내 식으로
속담을 만들었어.
‘사람은
웬만해선 안 죽는다’고.
내가 지하
2킬로미터 탄광에 들어가서 뭘 봤는지
알아?”
-뭘 보셨나?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감을 못 잡을
거야.
지하
2킬로라는 막장이 어떤
의미인지.
거기에 연탄가루
같은 게 기다리고 있질 않아.
어마어마한
바윗덩어리들만 있을 뿐이야.
광부들이 삽을
들고 퍼내는 식으로 묘사하는 그림이나 영화는 다 가짜라구.
까만
1톤 탄차가 기다리고
있으면,
거기서부터
(머리 위를
가리키며)
대각선 위로
뚫고 올라가는 거야.
그걸 폭파시켜서
탄차에 쏟아 넣는다고.
들어가지고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런 줄
몰랐다.
“긴 다이너마이트 줄에다가 불을 붙여놓고
이~만큼 떨어져 나와서 담배를
피우지.
불빛이라곤
깐데라(칸테라:
광부 안전모에
달린 휴대용 전등)
불빛밖에는
없어.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멀리서 ‘음~’
하는 소리가
나고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서 10센티까지밖에 안
보여.”
-폭발하는데
깜깜해진다고?
“이렇게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고.
상상이 안 되는
거지.
뭐가 보인다는
건,
피사체가 있고
발광체가 있어야 할 것 아냐.
근데 먼지가 쫙
몰려오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지.
근데,
어느
날,
(코앞을
가리키며)
먼지가 서서히
걷히는데 딱 여기에 나비가 딱 나타난 거야.
어마어마하게 큰
나비가.”
-지하 2킬로 깊이의
갱도에?
환상이
아니고?
“가만히 보니 그게 나비가 아니라
모기야.
나비만큼 엄청
큰 모기.
광부들이
‘동바리’(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괴는
나무기둥)를 하나씩 메고
들어가는데,
그 목재에 알로
묻어 들어온 놈이 거기서 부화를 한 거지.
빛을 못
봤으니까 이놈이 길어진 거고.
내 눈에
나비처럼 보일 만큼.
그때 코앞의
그놈한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나?
“너,
더 살 수
있을래?”
지하 막장 깊은 곳 어둠에서 만난 모기
한 마리에게 건넨 반가운 인사.
“너 더 살아주겠니?”라는 그의 말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선 김민기 자신과 막장 인생들에게 건네는 뜨거운 격려와 감사의 말이 아니었을까.
너,
더,
살
수,
있을래?
“나 더 얘기해도
돼?”
가만히 생각에만 잠겨 있는 나에게 그가
말을 건넸다.
-물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가지고
원양어선을 타려고 했는데 내 신분 때문에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무슨 북한
간첩이라고,
나쁜
자식들!
그래서 간 데가
목포에서 배로 네 시간 떨어진 하의도인데 김 양식장에 가서 품팔이를 했어.
김은 한겨울에
만월이 되었을 때 배가 떠야 뜯을 수 있지.
난
농사지으면서도 달력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못했는데,
바닷물이라는 게
그렇더라구.
잔잔한 겨울
바다에 대보름달이 떠 있고 거기 배를 타고 들어가.
처음엔
무서웠지.
손이 들어가면
너무 차가울까봐.
근데 딱
들어가니까 물이 따뜻한 거야.
쿨렁쿨렁하는 배
위에서 빨랫줄같이 걸린 것들을 (아래를 보며)
이렇게 건져내야
해.
근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얘길….”
-보는 각도에 대한
얘기?
“맞다,
그
얘기!
미술이건
예술이건 중요한 건 ‘시각의 변화’야.
수평으로만 보는
게 아니고 대각선 위를 앙각으로 보기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내가 아동극에
자꾸 매달리는 것도 같은 이유야.
세상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보면 어떨까.”
선문답 같은 그의 얘기는 탄광의
모기에서,
겨울 바다의 김
따기,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김민기에게는 소년의
순수와 노년의 달관이 공존한다.
20대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부드러웠고 60대의 그는 수줍은 소년처럼
정직하다.
변한 것은
김민기가 아니라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편협하게 굳어져 간 시선의 각도이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요
다시 ‘쟁이’
얘길 하자면
쟁이는 어제의
작업 부정해야 해. 안 그럼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쉼표’가 아니라 ‘숨표’야.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1/16은 15/16랑 등가라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야..
아,
근데 말이
길다,
취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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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를 만든 시간들
2
무명 무실 무감한
인생,
지녀볼래
세월이 흘렀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아이엠에프(IMF)
공익광고에서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빛내주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던
방송 장면에 깔렸으며,
‘내 나라 내
겨레’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불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같은 노래가
2009년 시청 앞 노제에서 양희은의 노래로
그의 영전에 헌사 되었다.
김민기와 함께했던 통기타 가수들은
중간중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쎄시봉의 추억담을
전해 줬고,
그와 함께
문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다수는 정계에서 대학에서 각종 문화예술단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의도
밤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이 들고 남을 거듭하는 중에도 김민기는 그저 울렁이는 쪽배에 올라 보름달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한결같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
데고 찔린 자국이 흠집으로 남아서 오래된 고향집 흙집처럼 파이고 쓸렸다.
그래도 한참을
잊고 달리다 돌아본 자리,
거기 그대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그런 거 없어.
날 고문한
놈들한테 내가 미안하다 생각 들었던 것,
그게
분기점이었던 것 같애.
뭐,
함께하자고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으로,
정계로 떠나갈
때는 좀 선선하긴 했지.
나 혼자
남겨놓고 월급 받으러 가는구나 싶어서….(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요즘은 안 보고 산 지 좀 되었지만
4년 전인가 (김)지하 형이 박경리씨
<토지>를 뮤지컬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적단 말이야.
상황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걸 다른 장르로 넘기는 순간 그 작가의 필력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디오북’인데,
원작을 가장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지.”
-그 뒤로 진척이
없나?
“더 진행하지
못했는데.
이거 할 수
있는 데가 학전밖에는 없거든.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명이 넘는데.
비록 학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신세지만 그동안 돈 안 되는 거 알면서 같이 일해 왔던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최상일이라고 십년 넘게 노동요를 채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노래들을
거기 집어넣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거기에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그런 대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텐데.
“학전 초기에 더러 친구들이 굉장히
진화된 방법인 양 ‘주식회사를 왜 안
만드냐?’고 그러던데,
주식회사를
만들면 주주들한테 배당이 가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은
후원회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걸 마구잡이로 하면…
좀 자존심
상하지.
회원 가입하면
얼마 디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으면.”
-이건 어떤가?
‘돈 안 되는
일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줄,
철없는
사람들’
구함!
“그거야 뭐….(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은 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아,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김민기와 헤어져 돌아오는 대학로 골목에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날렸다.
지난 몇 주
내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다시 입가에 맴돌았다.
한대수가 지은
곡을 그가 불러 1집에 넣은 노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
(김민기 노래 ‘바람과 나’
1971)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