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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영화 <남한산성>과 사실 관계: 인조, 최명길, 김상헌 누구도 죽지 않았다.

 
비루하게 살아 남은 왕...   인조,  명색이 충신  김상헌과  최명길.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이 땅의 민중들과 같은 고통을 받았을까?

모진 목숨을 구걸해 비굴하게 살아남은 그들과 달리
민초들은 정말 죽지 못해 살거나, 정말로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훈의 소설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은 누가 정말로 고통의 당사자였는지에 답해야 한다.
저 벼슬아치들인가? 아니면 백성들인가?  
최명길이나 김상헌이나 모두 살아 남아,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죽어 나간  민중과는 다른 삶을 온전히(?) 살았기에. 누가 더 그럴사한지 따지는 게  도토리 키재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얼굴이 뜨뜻해질 뿐이다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였던 최명길, 이조판서였던 김상헌은 전쟁 후에도 별로 손해 본 것은 없었다.  국제정치에서 줄타기라도 할 줄 알았던 광해군을 반란으로 몰아내고  그보다 훨씬 한심한 인조를 군주로 내세웠던 인조반정의 공신, 최와 김. 이 반란군의 핵심세력들은 그렇게 끝까지 부귀영화와 가까이 있었다.

호란 후, 최명길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자살로 묘사된 김상헌 역시 좌의정이 되어 천수를 누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에 침이 고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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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강간당한 50만은 어디에남한산성이 거세한 것들        2017-10-19

[한겨레21]   인조가 민중의 삶 건지려 치욕 감수했다는 김훈식 남성 서사
정치적 무능과 무책임으로 민중 고통에 빠뜨린 왕과 지배층에 면죄부 줄 위험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소설가 김훈이 2007년 써낸 이 문장이 아닐까 한다. 김훈은 이 문장 뒤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탰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소설 남한산성을 최대한 영상으로 옮기려 했다. 영화를 만든 황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남한산성 소설 속 장면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치더라.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로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처절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그 논쟁에 매료돼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남한산성의 흠결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백성 아닌 명나라 생각한 김상헌

소설과 동명의 영화 남한산성은 모두 병자호란이 진행된 47일간의 기록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1636년 병자년 1214, 열흘여 만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질주해온 청의 기마부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고립과 추위와 패배의 시간을 견디다 이듬해 130일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였다.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 문서와 함께 성에서 나와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이 과정에서 , 생존, 종사의 유지를 위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론자 최명길과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며 청과의 결전을 주장한 척화론자 김상헌이 치열한 말의 대결을 펼친다. 영화는 두 인물의 말의 대결로 시종일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산성병자호란을 다뤄온 기존 작품들과 가장 다른 점은 김상헌과 왕 인조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론자(청과의 화친을 주장)를 현실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 인물들로 높게 평가했다. 반면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론자는 명나라와 맺은 군신관계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명분주의자라고 인식해왔다.

김훈은 소설에서 척화론자 김상헌에게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김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 김상헌은 책상머리에서 책이나 읽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충절이라는 가치를 중히 여기면서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강직하고 곧은 사대부이다. 이런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뱃사공의 손녀 나루와 신분은 낮지만 지혜로운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역)가 투입된다. 김상헌은 왕을 따라 뒤늦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가난한 뱃사공의 목을 단칼에 벤다. 향후 그가 청나라 군대에 언 강의 길을 안내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 칼질에는 비장미가 서려 있다. 병사들의 추위를 걱정해 가마니를 사용하게 하고, 신분은 낮지만 현명한 날쇠를 신뢰하고 그에게 중책을 맡긴다. 김상헌의 비장미는 왕이 청에 항복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면서 완성된다.

(그러나 실제 김상헌은 자결로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 적과 싸우자며 모두의 죽음을 부추기던 김상헌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냈고, 한발 더 나아가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이 되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던 셈이다.)

죽고 강간당한 50만 조선 피로인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성실하게 스크린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역사에서 여성과 민중의 피해는 거세했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판타지에 불과하다. 김상헌은 왕이 항복을 약속할 때 6일 동안 곡기를 끊은 뒤 자살을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칼로 배를 찌르는 할복이 아닌, 옆에 사람을 두고 목을 매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자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상헌은 명분과 죽음을 바꾸지 않았다.

<병자호란;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등을 쓴 한명기 명지대 교수(국사학)김상헌은 김훈 소설에서와 달리 비쩍 마른 사람으로 추정된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 인조의 모습 역시 실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인조는 실패한 왕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왕이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조는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왕이 버리고 떠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모두 불타 성하지 않았다. 또 거리 이곳저곳에서 주검이 나뒹굴었다. 특히 병자호란의 가장 큰 비극은 청으로 끌려간 50~60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로인(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의 존재였다. 청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탈출하다 붙잡히면, 죽이거나 발뒤꿈치를 잘랐다.<병자록>을 쓴 나만갑은 조선인 피로인이 무언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다고 썼다. 여성 피로인의 고통은 더했다. 사로잡힌 뒤 강간당했고, 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 청군 장수에게 사로잡힌 여성 피로인은 장수의 계급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윤간을 당했다.

 이런 고통을 유발한 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인조였다. 한명기 교수는 인조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여러 번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도성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면 빨리 해야 했는데 미적대다 원래 가려던 강화도에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을 겪어놓고도 정권 보위에 급급해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고 지적했다.

이에 견줘 영화 남한산성은 인조의 고통을 받아안으려는 작품이다.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마지막 장에서 인조가 항복 절차인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은 처절하고도 우아하게 그려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영화를 본 뒤 이토록 우아한 패배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왕이 무릎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흙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왕의 고통을 느낀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도 김훈 작가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순간 백성들이 도열해서 울 때 어버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우리가 왜 민중을 고통에 빠뜨린 왕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라며 비판했다.

인조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



영화 남한산성은 실패한 왕 인조에 대해서도 그가 겪은 인간적 고뇌를 설명하려 한다.

김훈은 그동안 패배한 남성들에게 비장한 역사적 서사를 부여해왔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책 <그런 남성은 없다>에 실은 글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에서 '공터에서' 같은 김훈의 장편 남성 서사를 분석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등장한 장편 남성 서사는 역사의 피해자라는 운명의 형식을 불가피하면서도 특권적인 것으로 승인·정당화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의 정치적 욕망 및 무의식을 반영한 역사적 장르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남성 주체에게 역사적 맥락을 부여해온 것이 김훈의 <공터에서> 같은 장편소설이다.

남한산성도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김훈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 역사를 만들어온 남성 주체들조차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 고뇌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비볐음을 강조한다. 하지만..이에 대해 류진희 성균관대 강사(한국학)전쟁 이후 50만 명이 넘는 민중이 피로인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한산성은 그런 내용을 거세한 채, 척화파로 대표되는 김상헌의 충절과 고뇌를 생각하게 한다. 실패한 왕 인조에게도 민중의 삶을 건지기 위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감수했다는 서사를 부여한다. 모든 남성 역사 주체에게 그럴 만했다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실로 고통받은 자 누구인가

김훈은 소설에서 나는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병자호란 이후 진실로 고통받은 자는 누구였는가. 왕 인조인가, 아니면 인조의 무수한 정치적 실패와 무책임으로 인해 전쟁 중 죽고 청에 끌려가 고통당한 민중인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참고 문헌: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푸른역사(2013). 허태구(2013),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한국사연구> 162호 오수창(2017),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의 왜곡과 그 현재적 의미, <역사와 현실> 104.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15150.html#csidx0df6f81de8989aea1c188e6a6da8d17





[영화] 남한산성, 300, 광주 그리고 북한
정의로운 죽음은 비루한 목숨 위에서 빛난다.               유원진   2017.10.18
사진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조선의 왕은 앞으로 나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라"
막상 인조가 그 짓(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을 하기 전까지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제단 위에 청나라 황제가 앉아있고 위에는 의기양양한 청나라의 대신들이, 아래에는 고개를 숙인 조선의 대신들이 늘어섰다.
인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명치끝이 아파왔다.
  
검은 상복을 입은 남루한 왕은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었다. 그냥 절하다가 머리가 땅에 닿은 것이 아니라 땅에 짓이기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카메라는 왕이 머리를 찧을 때마다 묻어 올라오는 흙가루까지 잡아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그 모든 시간들은 끝나지 않을 영원 같았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토감이 올라왔다. 저렇게까지 해서 비루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가...
페르시아 백만 대군이 스파르타를 침공했을 때 스파르타의 왕은 전사 300명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용사들이여, 노예로 치욕스럽게 사느니 자유인으로 명예롭게 죽자.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스파르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우다 죽어갔는지를 기억해 줄 것 이다."
페르시아 대군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쉽게 이기지 못하고 수만의 병사들을 잃은 뒤에야 스파르타를 함락하게 된다. 그 뒤 스파르타는 역사에 남을 용맹함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바쳤는지, 그 수호정신을 인류에게 선사하였다. 희생 없는 자유는 없다고...
  
왜 인조는 그렇게 죽지 못하였는가. 만약 인조가 갑옷을 입고 말위에 높이 앉아 죽기를 각오하고 맨 앞에 나서서 싸웠다면그리하여 스파르타의 왕처럼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어져 처절하게 죽었다면우리는 훗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감히 그 누가 왕부터 어린아이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려는 나라를 빼앗으려 할 것인가...
왕은 아니었으되 스파르타의 왕처럼 말한 이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이 도청에서 죽지만 훗날 역사는 광주를 기억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땅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용기를 내고 독재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정말 그랬다. 그들은 죽어서 이 땅에 빛나는 민주주의 별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국민들은 광주를 불러냈고 그들에게 의지했으며 그들과 함께 울고 희망을 노래했다. 지난겨울 그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광주는 늘 광화문 광장에서 국민들과 함께 있었다.

것은 윤상원 열사가 불의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살기보다 정의로운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인조같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짓찧었으면, 신군부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았으면, 이 땅의 광주는 남루하고 비루하게 잊혔을 것이었다.
영화에서 역적 최명길은 스스로 역적의 이름을 얻을망정 임금과 백성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충성스러운 신하로 비추어진다.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으되 아마도 생각할 여백을 남겨둔 듯 하다. 그러나 이완용도 최명길과 같은 논리로 조선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나라를 넘겼다고 했다. 그러한 논리라면 세상은 오직 하나의 강대국과 조각난 식민지들만 남았어야 한다. 진정한 충신이라면 왕의 유한한 육신보다는 영원한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목숨으로 충성을 바쳤어야 했다. 그 이름으로 민초들이 힘을 얻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우리는 저 불한당 같은 미 제국주의 책동에 절대로 굴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엄과 자주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남한산성이다. 그들이 독재 권력이든 미치광이 정권이든, 강대국에 굴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는 자존심만은 존엄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기야 그 가난하고 병든 나라, 북한의 동토에서 독재를 하지 않고, 혹은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저 하늘 아래 유일 강대국인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아마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객들은 북한을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와 김일성 두 독재자가 오랜 시간 우리를 세뇌시켰던 그 치졸한 역사 속에서 우리 남북한 민중들이 얼마나 비루하고 남루하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며 힘들어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나 누구라도 꼭 봐야할 영화임에는 틀림 없으니... 아마도 이 모순은 남한산성이 이 땅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인조가 되지 말고, 최명길이 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말하던 예판 김상헌이 한번쯤은 되어보자고 말하고 싶다.

(편주: 하기사 최명길이나 김상헌이나 모두 살아 남아,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죽어 나간 민중과는 다른 삶을 온전히(?) 살았기에. 누가 그럴사한지 따지는 게 도토리 키재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얼굴이 뜨뜻해질 뿐이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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