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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하다.. 겨울날 춥지 않은 사람도 위험하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위험하다."
  자신의 생각없이 무리 속에 섞여 따라가며 사는 일상이.. 진정한 삶과는 다른 길이라고 읽어 봅니다. 오늘도 혼자 벽을 오릅니다. 고독이 곧  삶인 것을 알기에.



 '추운 날 춥지 않은 사람은 위험합니다.'

 세상 모두가 추운 게 정상인 이런 날씨에 추운 줄 모르고 지낸다면 이상하지 않은지 반문할 일입니다. 이런 날 추위를 모른다면..집과 사무실에 난방이 과다하거나, 아이스크림이 생각날 정도로 후덥지근한 실내에만 머무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지 궁금해야 할 터입니다. 이 혹한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은 능력이 부족하고 게을러서 그럴 것이라는 선입감에 취해 자신의 처지가 당연하다 느낀다면 몹시 위험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직전,  귀족들이 궁 밖에서 들려오는 고난과 궁핍의 아우성을 흘려 들으면서도, 와인잔 부딪히며 여유롭던 바로 그런 자리에 앉아있던 그같은 폭풍 전야는 아닌지 의심해야 정상입니다. 그러기에 추운 날 춥지 않다면 이상한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추운 날은 모두가 추워야 정상입니다. 비록 따뜻한 실내와 승용차 사이를 잠시 뛰어 이동하며 선선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는 이라 할지라도.. 오늘 같은 날은 추워야 정상입니다.   제아무리 무서운 동장군 앞이라해도 서로 보듬고 함께 느끼는 추위는 무섭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추운 사람들, 청소, 배달, 영선, 경찰, 군인,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거리에서 부대끼고 있는 이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전합니다. 어둠 속 새벽이 그러하듯이 이 겨울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추운 날은 추워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봄날이 따뜻합니다.

2018-01-04

1987, 박종철, 이한열: 그 날은 꼭 오리라.

날이 간다 잊히랴
세월 간다 잊으랴
그대의 꿈, 민주주의.

 1987년 1월, 박종철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물고문 끝에.. 목졸려 죽었습니다. 그  해 7월, 박종철을 살려내라던 이한열은 최루탄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87년 6월항쟁의 발단과 전개가 되었습니다. 종철은 영남 출신, 한열은 호남 출신으로  어떤 이는 이제 민주주의의 제단 앞에서 지역감정의 망령은 사라졌다고 흐느꼈습니다. 

 그러나 속이구라 불렸던 노태우의 629 선언을 시작으로 김종필의 흑심에 김영삼의 야심이 더해지고, 김대중의 자만이 가세하면서 이 나라의 민주화는 멀어졌고 다시 젊은이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야합의 결실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급기야 1997년 IMF 사태를  불러왔고, 또 다시 우리는 나라꼴이 막장이란 것을 깨닫고 금반지를 모으며 수습에 나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김대중, 노무현정권에서도 민주주의는 공허한 구호 수준 에서 난무했을 뿐입니다. 결국, 이명박, 박근혜정권의 국정 농단, 그리고 지난 겨울  저 춥고도 막막했던 촛불시위를 거치고 나서야 실종된 민주주의를 다시 호명하고 있습 니다.

 1987년의 젊은 투사들의 목숨을 토대로 발아한 오늘의 민주주의에 작은 부채의식 이라도 잊지 않았다면, 잠시 관람석에 앉아 그대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앞으로 또 다시 민주주의를 목놓아 부르며, '이게 나라냐'고 외치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박종철과 이한열.  민주주의의 불꽃 앞에서 영호남이 무슨 대수냐고 함께 떨쳐 일어났던 그 때의 각오가 지금 영화가 되어 우리 앞에  서있습니다.
 누군가는.. 언젠가는 꼭 한번 있게 될 펑펑 울고 싶을 그 때를 미리 생각해 선불로 맘껏 울 수 있는 자리라 했습니다.  돌아온  그 시절 앞에서 그동안 무거웠던 부채, '왜 대단했던 당신은 가고 보잘 것없는 나는 살아 남았는가? ' 이런 의문 속 빚을 이제라도 벗어놓고 일어설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관심하면 정의도 없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도 당연히 없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23563.html

배우 강동원이 받은 선물, 김장김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6102.html?_fr=st1

강동원의 눈물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108500004#csidx3ec35b94bbdacd8b9ebcd20d4748c8f


자본주의는, 악마가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


공산주의는,
천사가 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세상이고

자본주의는,
악마가 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http://www.hani.co.kr/arti/cartoon/thinking/825963.html

<복식부기에 기반한 자본주의 원칙:    가는 정은 있어도 오는 정은 없다?>

 돈은 자본주의 거래의 핵심이지만 폭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효도, 우애, 우정에는 돈이 개입해서는 안되지만, 불가피하게 돈이 오고갈 필요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핵심을 피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거래가 더할 수 없이 가까운 사이에 폭탄이 되면 안될 터입니다. 따라서 가는 정은 있어도 오는 정은 없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돈 거래가 이뤄질 때는 차용증같은 계약서와 담보물이 필수입니다. 자본주의의 회계원칙, 복식부기의 근간인 이런 대차거래가 따르지 않으면 돈거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원칙을 어기고 잠깐 방심한 채 돈을 주고 받았다가 패가 망신하고 부모자식, 절친한 형제자매, 죽마고우, 그리고 이웃을 잃어버린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친구나 형제끼리 돈을 빌려 주었으면 그건 반환기약도 없고 독촉할 의사도 없는 선물같은 것이 되어야 할 터이고, 자식에게 아무리 큰 돈을 물려주었어도, 부모는 바로 잊어버릴 일입니다. 그러나 선물대신 건넨 돈도 아니고, 물려준 그 돈을 잊을 수도 없다면, 차용증과 담보는 필수입니다.

  만약 이도 저도 어렵다면, 가까운 사람, 부모 자식, 형제자매, 친한 벗과의 돈 거래는 절대 안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본주의사회는 그런 곳입니다. 돈을 잃고 게다가 사람까지 잃기 싫다면, 서류와 담보없이 꿔 준 돈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혹시 새해부터 이 삭막한 자본주의사회가 달리 바뀐다면 또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추신: 삼성의 이재용이 최순실, 박근혜에 준 400억은 뇌물이 아니랍니다. 하긴 300조에 이른다는 삼성을 상속세 16억으로 물려받은 행운아 이재용이고보니 이딴 푼돈은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상식을 기반으로 그를 풀어준 판사 정형식의 판결을 존중합니다. 자본주의의 통념을 뛰어 넘는 통큰 사나이 이재용.. 퇴임후 앞길이 탄탄할 판사..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기가 막힌 저들만의 상식을 그대로 놔두면 자본주의, 아니 나라가 무너질 겁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0866.html

2018-01-01

새해 안부와 함께 여전하시기를 빕니다.





SVBEEQV.
Si vales bene est, ego quoque valeo.


 본문은 이렇게 줄여서도 사용됩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영어 초역은 이렇습니다.
If you are well, I'm well too; If you are well, I am glad.
(si=if   vales=well   bene est=It's good   ego=I    quoque=and    valeo=well)

한글 초역:
 '건강하시다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별고 없습니다.'

의미를 곁들인 의역:
  '여전하시지요, 덕분에 저는 별고없습니다. '
  또는  '여전하시기를 빌며, 안부 올립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유명한 편지 서두는 오히려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의 셋째 편지)

"SVBEEQV"의 시작은 키케로(기원전 106~43)라 합니다. 시저와 동시대의 인물로 예수가 태어나기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정치 웅변가 겸 문장가로 700통이 넘는 편지가 명문으로 남아있는 대가입니다. 그의 문장을 본딴 편지투가 유행하던 로마시대가 무려 2 천년 전 일인 데 요즘와서 이 상투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라틴어를 전공한 한 신부의 수필이 유행하더니, 급기야 시사 평론가 손 아무개가 클로징 멘트로 한번 쓰자 나름 인기가 상승 중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극히 상투적이고 고답적인 편지투는 기원후 90년 경에 사도 요한이 기록한 편지, 요한 삼서에 이르면 결이 달라집니다. 100여전 부터 사용되던, 형식이 앞서던  키케로의 편지투가 매우 실질적인 안부로 이렇게 풍성하게 변화합니다. 그저 안부를 묻고 서로 감사하며 살자던 수준의 문장 차원이 고양되어 일상의 안부를 넘어 이리도 힘든 인생길을 서로 격려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셈입니다.
 아니 어쩌면 정복자 로마인의 평안한 일상과 대비되는 식민지 피지배자, 억압받는 이
단이었던 기독교도들의 상호부조 정신이 보다 합리적이고 일상적인 편지투로 발전한 것이라 짐작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히브리어는 성경의 정전이 되었고, 그에 빌붙었던 라틴어가 엉뚱하게도 득세하며 추기경들의 편지투 거들먹거림은 중세 암흑시대를 관통하는 암적 존재로 변질됩니다. 500년전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이런 고색창연한 상투어 사회가 유럽의 중심이었으리라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이 편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과연 나 아닌 사람의 안부와 안녕을, 사도 요한이 그랬듯이 그토록 절실하게 묻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진정 키케로와 요한을 거쳐 암흑시대를 넘어 발전된 문명의 길을 걸어 왔다지만, 과연 진정한 공동체 정신, 이웃의 안부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공감하는 보다 고상한 인간정신의 승리단계에 도달한 것일까요?
 새해 벽두에 다시한번 모두의 안녕과 건안을 빌며, 아직 연하장에 답장없는 지인과 이웃들에게 안부를 한번 더 전해 봅니다.  눈코가 서로 볼 새없이 바쁘고 몸이 목화솜처럼 고단해도,  짧은 소식 한 줄이 서로를 묶어 준다는 말 잊지 않으셨기를 빌며,  해를 넘겨서 안부없는 분들께서도 다들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SVBEEQ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