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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2

[부패한 꼴 못 보던 매천 황현의 120년 전 망국사]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 매천 황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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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꼴 못 보던 매천 황현의 120년 전 망국사     등록 :2016-09-01

춘추필법의 동학농민혁명 통사.. 94년판 오하기문완전 새 번역

방대한 고사·옛지명·문헌 고증.. 원문 오류도 바로잡아 분량 2

동학농민군 도적이라 표현했지만 권력 농단과 부정부패 비판 신랄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원문 역사비평사 제공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 원문       역사비평사 제공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황현 지음,    김종익 옮김/역사비평사·28000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 매천 황현 -

 

  대할 때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이 글들은 19108,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매천 황현(1855~1910)이 남긴 유서와 시다. 그의 대표작처럼 알려진 <매천야록>의 저본이 됐다는 <오하기문>(梧下記聞)<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 출간됐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재야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매천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주요 사건에 대해 편년체와 강목체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서술한 당대사춘추필법으로 기록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통사’”(해제자 박맹수 원광대 교수).

1892년 동학교도들 봉기 현장인 전북 삼례에 조성된 역사광장 조형물 역사비평사 제공


 1892년 동학교도들 봉기 현장인 전북 삼례에 조성된 역사광장 조형물     역사비평사 제공

일반적으로 민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러웠다. 그런 민씨들이 전국 큰 고을의 수령 자리를 대부분 독차지했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이미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저 형식(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충주로 피신할 때 따라간 무관 민형식)이라는 놈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오죽했으면 백성들이 그를 악귀라고 불렀을까. 그것도 모자라 미친 호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사람들은 한결같이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1892, 고종29)

자신만의 선명한 관점을 세우고 동학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장면에서 춘추필법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하기문>1860년부터 동학혁명 종료 직후인 18953월까지와 18954월 이후 두 부분으로 나뉜다. 번역된 것은 18953월까지이며, 그 뒷부분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오동나무>20여년 전인 1994<번역 오하기문>이란 제목으로 출간됐지만 같은 번역자가 옮긴 이번 책은 단순한 수정·보완이 아니라 이전 번역본을 아예 무시하고 완전히 새롭게 쓴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나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운 수많은 고어와 고지명, 고문헌들이 등장해 해독하기 어려운 한··3국의 인용 사료들을 매우 철저하게 찾아 꼼꼼하게 확인하는 고정(考訂) 작업을 벌였다. <조선왕조실록><동경대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사서삼경과 24사 등 방대한 중국 전적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의 일본 사료들도 검토했다.

 손화중(사진 오른쪽) 역사비평사 제공
 

손화중(사진 오른쪽)        역사비평사 제공

  그리하여 이번 책에서 옮긴이는 저자 매천 황현이 잘못 적거나 빼버린 구절들까지 샅샅이 찾아내 교정했다. 필요할 경우 최근 연구성과들까지 섭렵해 보완했고, 다른 관점의 해석까지 소개한다. 예컨대 체포당해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대역죄인이라며 자신을 사정없이 심문하는 박영효에게 이렇게 되받아친다. “도 없는 나라에 도학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 민중에 해독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의 평등적 정치를 잡은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사(淫邪)에 소비하는 왕세 공곡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중인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서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 도리에 위반이라,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정부를 고쳐 선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자국의 백성을 쳐 없애기 위하여 외적을 불러들였나니 네 죄 중 가장 중대한지라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배항섭 동학농민전쟁 연구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96) 이런 내용은 <오하기문> 원문에는 없는 내용이다.

그리고 되도록 지금의 우리말로 내용을 풀어 써 가독성을 크게 높였다. 여기에 적지 않은 분량의 인명록과 제도·기관·관직 등의 주요 용어 사전까지 붙였다. 그 결과 전작보다 분량이 거의 갑절로 늘었다. 그럼에도 전작보다 훨씬 읽기 편해졌고 내용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야말로 <오하기문>과 매천, 그리고 당대사를 종합적·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해(1894) , 돈을 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신고식까지 치른 영남의 어떤 유생이 있었다. 그런데 민영휘는 그 유생이 가난하다는 소문을 듣고 서둘러 합격자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했다. 그 유생은 밤새 죽을힘을 다한 끝에 마침내 어느 부유한 상인을 보증인으로 내세웠다. 영휘가 비로소 다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었다.”(430)

이 유생과 달리 매천 자신은 이렇게 부패한 세도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떠나간다. 매천은 1883년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뽑혔으나 당시 시관이 그가 뒷배 없는 시골의 힘없는 집안 출신인 걸 알고 2등으로 등수를 낮추자 낙향해버린다. 부친의 엄명으로 1888년 다시 성균관 생원시에 1등으로 뽑혀 성균관 관원인 생원이 됐으나 보장된 출세와 벗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향리로 내려가버렸다. 이후 평생 나라 녹을 먹지 않은 재야 선비로 살았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청국군과 싸운 성환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 용산 만리창(효창동)에서 승전 행사를 여는 일본군 역사비평사 제공
 

  청국군과 싸운 성환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 용산 만리창(효창동)에서 승전 행사를 여는 일본군     역사비평사 제공

  이 책의 또 다른 장점 가운데 하나는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매우 구체적이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동학교도들을 시종 ’ ‘도적이라며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매천은 그 준열한 역사인식에도 불구하고 분명 봉건 군주체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그는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고 오히려 열려 있으며 공정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도적들은 만날 때 서로에게 매우 공손한 예를 취했다. 신분의 귀천이나 나이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똑같이 평등한 예를 행했다. 비록 나약하고 용렬한 사람이 접주 자리에 있어도 그 무리는 모두 자신을 굽히고 그를 섬겼다.”

옮긴이 김종익씨. 2008년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를 주요 사회적 이슈로 만든 계기가 된 케이비(KB)한마음 불법사찰의 희생자가 바로 그 회사 대표이사였던 그다. 옮긴이가 120여년 전의 기록이지만 기시감이 든다며 책에 쓴 얘기. “권력의 농단으로 부패의 극한까지 내달렸던 그 시대 몇몇 인물의 이름을, 권력을 사익 확대의 도구쯤으로 여기는 오늘날 부패한 고위 관료들의 이름으로 환치하면, 120여년 전의 역사가 현실의 정치와 하등 다를 바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2016-08-31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작자는 누구인가?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원작자는,  김준엽이란 주장을 싣습니다.
작자 미상이란 의견도 있으나,  윤동주, 정용철의 시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73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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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시인, “작품 저작권 강탈당했다”
솟대문학에 도움 요청…조사한 결과 ‘도용 맞다’..
방귀희 발행인, “바로잡기 위한 법적절차 밟을 것”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3-12-31 15:32:59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은 20년 전 김준엽(뇌병변장애) 시인이 쓴 작품이다.

김준엽 시인은 중증 뇌성마비로 손가락 하나조차도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펜을 입에 물고 시를 써서 2011년 첫 시집 “그늘 아래서”를 출간했고, 새해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보치아 국가대표선수로 ‘2014 인천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재학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으로, 운동선수로, 사회복지전문가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장애인문학지 솟대문학(발행인 방귀희)에 “작품 저작권을 강탈당했다. 세상에 알려 바로잡아 줄 것을 바란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시 7편을 제출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김준엽 시인의 활동보조인이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인터넷상에서 좋은 글로 사랑받고 있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을 했더니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윤동주, 정용철, 작가미상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

솟대문학은 신속히 이 문제를 처리하기로 정한 뒤 사실 관계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준엽 시인은 20여년 전 하이텔 사이버문단을 통해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하던 중 1995년 봄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시집 발간 제의를 받고 작품을 보냈다. 하지만 출판사가 문을 닫게 되어 시집 출간도 못하고, 작품도 돌려받지 못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알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월간 ‘좋은 생각’ 1995년 9월호에 게재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가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과 유사한 점이 많았던 것.

솟대문학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좋은 생각 발행인 정용철 시인의 작품으로 게재됐다”면서 “정 시인은 ‘인생이 끝날 때’로 제목을 수정해 발표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내 인생에 황혼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는 작자미상을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고 있고, 가장 많이 알려진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경우 윤동주, 정용철로 작가가 표기되는 등 김준엽 이란 작가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방귀희 발행인은 “김준엽 시인의 작품이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면서도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김준엽 시인의 작품임을 밝혀 저작권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밝혔다.

방 발행인은 또한 “이 같은 작품 도용 사례가 적지 않기에 장애인들의 작품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준영 시인의 ‘내 인생에 환홍이 들면’, 정용철 시인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 미상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 보겠지요.

그러면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정용철 (좋은 생각 발행인)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가족에게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로 알려졌으나 작자미상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볍게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사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출처:  
http://www.ablenews.co.kr/Blog/PostBoard/BoardContent.aspx?BlogID=park46yg&getPostCode=park46yg201005111129097&Seq=88555

2016-07-18

이방원, 시작부터 썩었던 조선 왕조의 뿌리.

 각종 비리와 실정, 폭정 끝에 분출하는 국민의 불만 속에 싸드 배치, 개헌 논의까지 겹치면서 나라가 요동치고 있다.  그런데 해괴하게도 이런 시국을 조선 초기와 빗대며, 이방원의 쾌도난마가 필요한 때라는 입론이 들려온다. 참으로 어이없는 이런 반응은 이방원의 본색을 전혀 모르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에 다시 한번 태종 이방원의 전모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뒤끝 작렬, 이방원의 민낯..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정권욕에 희생된 사람은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다. 아버지 주위의 지인이자 불사의 충신이라던 정몽주, 김종서, 조선 건국의 대들보라 할 정도전을 비롯, 배 다른 동생이자 당당한 왕세자였던 방석과 방번까지도 비참하게 그의 손에 죽었다.

 나중에는 이방원의 셋째 아들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던 심온이 자신의 행동을 불평한다며 사사시켰다. 이런 피비린내의 중심 이방원의 족적이 당시 복잡한 정세때문이었고, 왕권을 사수하기 위해서였기에, 결론적으로 신생국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순기능이 더 켰다고 왕조실록을 참조해가며 주장할 수도 있다.
 
 어쩌면 조선 건국후 방방곡곡의 모든 "왕"씨를 찾아 고려의 뿌리를 완전 박멸하여 전국을 피로 물들게 했던 태조 이성계였으니 그의 아들 방원이  보고 배운 것이 무엇이었을까하며 동정의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원은 한 수 더 떠 충신, 심복, 형제, 심지어 자기 자식 세종의 장인인 사돈까지 처단하며,  잔학했던 애비를 넘어서 대단한  '승어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왕조실록이외의 다른 자료까지 종합해 재구성한 현실 속 이방원의 진실은 통설과는 정반대에 가깝다. 병든 자신의 아버지를 만만히 보고 밀모를 조작하여 동생 둘을 죽였으며, 이런 패륜에 대노한 아버지를 위협해 왕권을 내려 놓게 한 후, 형 방과를 허수아비 왕 정종으로 내세웠으며, 억지로 바지저고리 왕이 되었지만 동생에게 살해당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정종이 결국 떨리는 손으로 양보한 왕권을 챙긴 악당이었다.

 악행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왕세자의 어머니이자 서모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조선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강씨는, 사후에 이루 말로 못할 망신과 수모를 겪게 된다. 이 한가지 만으로도 그는 천추의 패륜아이자 유교국가를 표방하던 조선을 뿌리채 뽑아버린 장본인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사심불구, 말은 공자 말씀이지만, 그 속은 뱀같던 언행불일치 무뢰배의 손아귀 속에서 모순 속에 지탱되었던 기이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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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의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둘째부인 강씨는 세자로 책봉되었던 자신의 아들이 방원에게 죽기 이태 전(1396)에 다행히 세상을 떴다. 강씨를 총애했던 이성계는 경복궁 발치인 지금의 중구 정동에 왕비의 정릉을 마련하고 재궁 기능을 할 절, 흥천사를 능 동쪽에 대단한 규모로 지었다. 정무 중에도 수시로 정릉과 흥천사를 둘러보러 나가는 통에 대신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전해질 정도로 이성계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런데 애비가 죽고나서 명색 왕비릉인 정릉 일대를 부지가 너무 넓다는 구실을 대며 농토로 허용해 욕보이더니, 결국 방원이 왕이 되고 9년 되던 해(1409), 아버지 이성계가 졸한지 채 아홉달을 넘기지 않은 때에 그마저 더 이상 못보겠다는듯이 동대문구 안암동으로, 다시 핑계를 대어 더 멀리 떨어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한다.

 이 와중에 묘지의 석물을 들어내 청계천 광통교 다리에 재활용해 온 장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는 일체의 제사와 관리를 중단해 버리니, 능은 피폐해져 폐허가 되었다. 폐비가 아닌 멀쩡한 왕비가 죽은 후에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은 아마 세계 역사에 유래가 없을 것이다.  얼마나 그의 의지가 대단했던지 260년 동안 역대 어느 왕도 감히 정릉의 참배, 관리에 나서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선조 때 '쑥대밭같은 그 자리가 왕비릉인 것같다'는 보고가 올라올 지경이었을까?  예의를 숭상하는 이왕조의 건국이념이라던 유교 왕국의 모든 사람이 500년 역사의 절반이 지날 동안 이런 패륜에 모르쇠하며 눈감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선왕 이성계가 경복궁 바로 옆 정동에 왕비의 정릉을 마련한 이유는 바로 그 옆에 자신이 묻히고자 함이었으되, 방원은 이를 무시하고 따로 자리를 보아 지금의 동구릉에 애비를 장례 지낸다. 뭐가 그리 보기 싫었던지 이성계의 능을 돌보던 절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대략적 위치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명색 나라를 건국한 왕의 능을 돌봐야할 원찰이 이리 망해버린 것은 나라의 기강은 접어두고라도 바로 자식이 불효한 결과가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방원은 서모 뿐 아니라, 그 서모를 사랑했던 자신의 애비에게마저도 뒤끝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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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 때(1669)에 이르러서야 예송논쟁 중이던 송시열의 주장으로 비로소 정릉은 왕비릉으로 복귀되어 제례가 가능해지고, 왕비는 종묘에 배향되었다. 무려 260년 동안 15대의 왕 어느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던 이 부조리한 집안 내력은 오로지 이방원의 뒤끝때문이었다.
또한 자신이 내세워 허수아비 왕을 만들었던 친형, 방과는 사후에는 공정대왕이란 어설픈 칭호로 왕의 존호를 받지 못한 채 무시되다가, 이 또한 15대가 지난 숙종 때(1681)가 되어서야 "정종"이라는 존호를 받게 된다.

 한마디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었던 사람,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포함해, 서모였던 신덕황후 강씨, 자신의 친형인 정종 방과. 이 모두를 눈에 가시로 짓밟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오기와 패륜을 왕권강화란 명분으로 덮어서야 어찌 세상에 도의와 윤리가 서겠는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씨 왕조의 마지막 27대 순종의 왕비 순정황후 윤씨는, 가난에 찌든 채 갈 곳없는 몸을 정릉 흥천사 방 한칸에서 기숙하며 연명하다가 왕가의 최후를 마감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비가 밀려 쫓겨갔던 정릉을 관리했던 바로 그 절에서 조선 최후의 왕비가 생을 마감하는 극적인 역사가 이뤄진 셈이다. 참으로 얄궃은 집안 내력다운 결말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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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흥천사 역사:
 1398년 정종 때 완공된 중구 정동의 흥천사는, 정동에 있던 정릉이 미아리로 이장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170칸이 넘는 규모로 승려 140명 이상이 머무는 대찰로 유지되다가 연산군 때(1504) 큰 화재를 겪고, 중종 때(1510) 유생들의 방화로 폐사된다. 절에 있던 큰 종은 동대문을 거쳐 지금은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본디 미아리 정릉 근처에는 신흥암이라는 작은 절이 있었는 데, 이를 선조 때(1576)에 신흥사로 개칭하고, 현종 때(1669)에 정릉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하여 약간 옮긴 후 정릉의 원찰로 지정한다.  정조 때(1794) 다시 자리가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고종 때(1865) 이르러 대원군의 지원으로 중창하면서 비로소 "흥천사"란 휘호를 내려 원래 명칭을 회복했다. (얼마전까지 "미아리 신흥사"로 불리며 유명했던 회갑연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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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최후의 퍼스트 레이디, 순종의 왕비, 순정황후 윤씨:
 625전쟁 피난 후 서울로 환도하면서 흥천사에 "대지월"이란 법명으로 얹혀 살게 된다."하루 양식 한 홉으로 두끼를 먹었는" 데도 그것을 아껴 향과 초를 사들고 흥천사에서 예불을 드렸다는 일화가 있다. 선영의 죄과를 받은 것인지 결국 멸문에 이르른 왕가의 마지막 회한을 윤씨는 정릉의 원귀 강씨와 나누려 했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이승만 등의 독재정권이 정당성 시비를 회피하려 그랬는지 의도적으로 왕가를 흘대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윤씨는 1966년(71세)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쓸쓸히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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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황후 강씨.
 조선이 개국하기 1년 전(1391)에 방원의 모친이자 이성계의 첫째 부인으로 함경도 영흥에 머물고 있었던 한씨가 별세한다. 1년 후, 조선 개국(1392)의 중심지 개성의 권문세족 집안 출신으로 영흥의 향처에 대비되어 서울(개성)의 경처로 불리던 강씨가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어 등극한다.
 이런 강씨를 못마땅히 여긴 한씨 소생의 아들 방원이 강씨의 정릉을 외진 곳으로 이장하고 석물을 광통교 다리에 활용한 패악을 저지른 후 자신의 만행을 합리화시키려고 입에 혀같던 신하와 벌인 수작(1416)이 역사에 기록되어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왕 (태종 이방원) : 계모란 뜻은?
   신하 (좌의정 유정현): 모친 사후에 들어온 새 모친을 말합니다. 

왕 : 그러면 강씨는 내 계모인가?
    신하: 생모께서 살아계셨을 때 들어 오셨으니, 계모라 할 수 없습니다.

왕: 그렇구나, 강씨는 내게 전혀 은의가 없다.
      나는 친모 집에서 자랐고, 장가 들어서도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혜가 있겠는가? 
     (태종실록: 1416년 8월 21일)

 이 따위 아전인수 문답으로 이방원의 총애를 받던 유정현은 영의정까지 이르렀다. 그는 본디 정몽주의 수하로 귀양까지 갔던 고려의 중심 관리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반란이 성공하자 전향했고, 조선 초에 아들 둘을 과거에 급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관직에 다시 등장한 후, 세종의 장인 영의정 심온을 처치하는 데도 활약하는 등의 대단한 충성심으로 이방원의 수족 노릇을 했다.

가히 그 왕에 그 신하의 문답이지만, 여기에서 유교의 근본, 충효와 인의예지신을 찾을 수는 없다.
 이방원의 진면목을 두고, 나라를 근심하는 만 백성의 어버이라기 보다는.. 불구사심, 부처의 말을 읊조리나 속에는 뱀이 들어있었다 할 지경이었다면 심한 말일까?  그렇게 시작된 조선왕조가 주기적인 왕권다툼의 피비린내로 얼룩지다가, 결국은 마지막 왕들이 외세의 침략 속에 독살 당하는 비극으로 문을 닫은 것은 사필귀정, 원형이정의 실현이었을 수도 있다.


정릉: http://www.seongbuk.go.kr/tour/tourism/sights/jeongreung.jsp

흥천사: http://www.seongbuk.go.kr/tour/tourism/temple/heungchunsa.jsp

조선 왕 중에, 속 편히 임종한 사람이 없었다..
http://todayinfo.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08/2016080802625.html

2016-06-24

옥바라지 골목을 바라보는 독립투사들의 영혼

무악동 46번지 옥바라지 골목 건너편에 순국 선열들의 위패 3천 여개가 모셔져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3만명이 넘었을 독립운동가 중 고작 1할도 안되는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독립관 기둥에 적힌 고귀한 이름들이 묻는다.
그대들은 진정 선열들의 피값을 다 치루었는가?
애타게 그리던 독립된 내 나라, 부끄럼없는 민주국가로 우뚝 섰는가?

 
기둥에 적힌 거룩한 이름들.
강우규, 김좌진, 민영환, 안중근, 윤봉길, 이강년, 이 준, 허위,
김동삼, 남자현, 이봉창,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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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많은 역사, 무악동 46번지의 조감도.
"구본여관"... 옥바라지 골목의 이정표같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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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되었다는 각성이 없다면,
내 나라 대한민국은 언제라도 바람 앞의 등불이 될 수 있기에
 
"잊어버린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자각이 소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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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소중한 역사유산에 가림막을 쳐 놓고
돈 몇 푼 받고 부셔버릴 생각에 들떠있다.
 
"재개발정비"를 경축하는 현수막 앞에서  어린 학생이 묻는다. 
 
지금 제 정신이세요?
 
 
 
 

2016-05-25

독재자 이승만..니가 가라 하와이 !


니가 가라,  하와이..

여기서 하와이는 따뜻한 전라도 지방을  폄하하는 배타적 표현입니다.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니가 가지, 왜 나보고 가라고 하는가?
그 좋은 투자를 왜 니 돈으로 하지 않고, 굳이 내 돈내고 나보고 하라고 나를  부추기는가,
이 겉은 멀쩡하고 속은 도적인 나쁜 넘, 사기꾼아  !
 
이 정도 얘기면 지각없는 지역차별 악담이니, 그저 눈살 찌푸리고 외면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하와이로 가라’는 말을 들으면,  동작동 무덤에서 가슴이 철렁할  해골이 딱 하나 있지요.
 
해방후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든 독재자가 결국 쫓겨간 곳이 하와이였던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되실런지요.
독재자 이승만은 바로 그 하와이에서 초라하게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 죽어야 했던 사람.

김구를 비롯한 송진우, 장덕수,여운형 등 정치인 십여명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는가하면,
이렇다할 준비도 없이 38선을 찝적대고, 정치적 구호로 북진론을 펼치며 백색 테러를 일삼더니,

덜컥 전쟁이 터지자, 국민은 안중에 없이 일본으로 도피.. 얼쑤, 발목이 잡혀 나라 망신을 사고,
국민방위군이란 허울로 애꿎은 청년들을 10만명 넘게 혹한에 불러내 얼리고 굶겨서 죽이고,

총칼을 들이댄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회를 깔아 뭉개고, 해괴한 부정선거로  다시 대통령이 된 물건.
참다못해 일어선 419 시위대에 발포하여 200 명 가깝게 사람을 죽이고, 6천명 이상을 부상시키고도 버티다,
양아들 일가가 권총으로 자살하고, 분노한 시위대에  바람 앞에 등불이 되자 하와이로 야반도주한 장본인,

그런 낯 두꺼운 민족 반역자, 피투성이 독재자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내려는 무리들에게 일갈합니다. 

그렇게 앞서간 악한이 그립다면,  마지못해 묻어준  그 뼈다귀마저 다 넘겨줄테니, 다 함께 가거라. 쓰레기들아
 
니가 가라,  하와이 !
 

 
 
지난 3월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입선작에 당선됐다가 수상이 취소된 ‘우남찬가’
 
지난 3월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입선작에 당선됐다가 수상이 취소된 ‘우남찬가’
가로로 읽으면 ‘찬가’ 세로로 읽으면 ‘비판’ 화제..
“공모 취지 위배”…손해배상청구 소송도 함께 내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 단체인 자유경제원이 지난달 자신이 주최한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시로 입선작에 당선된 저자를 최근 고소하고 손해배상소송까지 낸 사실이 확인됐다.
입선작 ‘우남찬가’의 저자인 장민호(필명 이정환)씨가 23일 온라인 커뮤니티 ‘루리웹’에 올린 글을 보면, 자유경제원은 최근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명예훼손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장씨를 고소했다. 자유경제원은 장씨한테 5000만원의 위자료와 업무지출금 699만6000원을 요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장씨는 지난 3월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 전 대통령을 찬양하는 내용의 시로 입선작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각 행의 첫 글자만 따서 세로로 읽으면 ‘한반도분열 친일인사고용 민족반역자 한강다리폭파 국민버린도망자 망명정부건국 보도연맹학살’이라는 비판적 글귀가 된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공모전의 최우수상 수상작인 ‘To the promised land‘도 이같은 ‘세로드립’(가로쓰기로 쓰인 글의 문장 첫 글자를 이으면 원문과 다른 내용이 나타나게 하는, 일종의 말장난)으로 이 전 대통령을 비꼬는 내용을 담았다. 자유경제원은 이 사실이 알려지자 두 작품의 입상을 취소했다.

장씨가 23일 공개한 손해배상청구 소장을 보면, 자유경제원은 “해당 시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사실에 기초하거나 자신만이 해석한 주관적인 의견에 기반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자유경제원의 공모 취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자유경제원은 장씨가 실제 이름이 아닌 ‘이정환’이라는 필명을 쓴 것도 위계의 근거로 삼았다.

장씨는 이에 대해 “시를 ‘문학공모전’에 응모한 것은 그 어떠한 법에도 저촉되지 않는 행위였으며, 본인은 헌법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에 의거, 공모전의 의도에 합당한 작품을 출품했다”고 밝혔다. 또 명예훼손 등 각 혐의를 부인하며 “실제로 본인의 게시물에서 본인이 올린 시를 근거로 이승만 선생과 자유경제원을 모욕하고자 했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문장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도 했다. 장씨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 변호를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서울 마포경찰서 옥의천 수사과장은 한겨레의 통화에서 “5월 초 자유경제원의 장씨 고소 사건을 장씨 주소지 관할서로 배정하도록 서울중앙지검에 이첩했다”고 말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5176.html
 

 
점입가경,
악한 무리들의 독재자 추앙 분위기에 엿을 먹인 문제의 문재.
 
웃자고 한 글을 결국 소송까지 끌고가는 저 저열함이라니..
결국 무덤 속 독재자 이승만은 하와이로 또 쫓겨갈 운명인듯 합니다.
그래 또 가거라.
 
니가 가라 하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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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  "법적 조치",    복거일  "과도하게 대응할 필요 없다"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폄훼하고 비난한 두편의 시가 최우수상과 입선작으로 수상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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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자유경제원이 공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To the Promised Land(약속의 땅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시가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우남찬가'라는 시가 입선작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알고보니 최우수상 등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두편의 시 속에 이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내용이 숨겨져 있었다. 
최우수상 수상작인 'To the Promised Land'는 영문으로 된 시로, 해석해 보면 이 전 대통령의 행적을 치하하고 칭송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시의 각 문장 첫 영문자를 따 세로로 읽어보면 'NIGAGARA HAWAII (니가가라 하와이)'라는 비꼬는 문장이 나타난다.

입선작인 '우남찬가'도 마찬가지다.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폄훼하고 비난한 두편의 시가 최우수상과 입선작으로 수상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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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이 전 대통령의 호)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뜻의 제목 그대로 겉으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추앙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시 역시 세로로 읽어보면
 
'한반도분열,  친일인사 고용,  민족반역자, 한강다리 폭파,  국민버린 도망자,  망명정부 건국,  보도연맹 학살' 등의 글귀로 이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고 비꼬는 내용이 드러난다. 

이 시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네티즌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승만 시 공모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써서 올렸더니 반응이 좋아 입선했다"면서 "받은 상금 10만원으로 여자친구와 고기를 먹었다"는 글과 함께 상장 인증사진을 게재하기도 했다. 

자유경제원은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 단체로 이번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은 복거일 작가가 맡았다.
자유경제원 측은 문제가 된 두편의 시에 대해 입상 취소 결정을 내리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자유경제원 측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 두편의 시는 첫 글자를 세로로 읽을 경우 이승만 대통령을 폄훼하는 내용을 고의적으로 담고 있다"면서 "교묘한 사술을 통해 행사취지를 정면으로 거슬러 주최측 및 다른 응모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이어 "악의적으로 응모한 일부 수상작에대해 입상을 취소하고 법적 조치를 포함해 강력 대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관련 복거일 심사위원장은 "마일드한 테러"라며 과도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복 위원장은 이날 CBS노컷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건은 이른 바 '마일드한 테러'라며 "일종의 테러리스트들이 테러를 한 것인데 이는 못 막는다. 유치한 수준의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설명했다. 

복 위원장은 이어 "논란이 된 두편의 시에 숨겨진 폄훼 내용은 일종의 '애너그램' 형식인데 직원들이 심사할때 그 부분을 세밀하게 다 찾아볼 수 없다"면서 "사람인 이상 다 찾아 볼 수 없는 거고 그러한 내용을 넣은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복 위원장은 또 "이런 단순한 해프닝을 가지고 격하게 반응하면 (그들에) 말려드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유경제원 측이 이번 논란에 대해 '입상 취소 및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우남을 깎아 내리거나 행사를 중단시키려는 의도"라며 "괄목상대해서 좋을 게 뭐 있나. (행사를) 취소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573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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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경제원을 향해 시민사회의 비난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세간의 관심은 고소당한 사실을 밝힌 장씨에 대한 처벌 여부에 쏠리고 있다. 자유경제원은 크게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그리고 사기혐의를 근거로 장씨를 고소했다. 장씨의 작품으로 인해 자유경제원의 공모 취지가 크게 훼손됐고(업무방해), 그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사실에 기초해 허위 사실을 적시했으며(명예훼손), 장씨가 실제 이름이 아닌 '이정환'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위계)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장씨가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장씨가 작품 속에서 비판한 내용이 이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조사 등에서 사실로 드러나 사자명예훼손의 사유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자명예훼손은 친고죄이므로 자유경제원이 고소를 제기할 주체가 될 수 없다.

혐의를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사기 혐의 역시 처벌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는 위계로 인한 업무방해죄 혐의 정도인데 해당 작품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을 하지 않은 주최 측의 실수와 과오도 있는 만큼 이것만으로 장씨를 처벌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결국 논란만 거세질 뿐 저자들에 대한 고소와 손해배상 청구로 자유경제원이 얻을 실익은 거의 없는 셈이다.

자유경제원의 고소 건과 관련해 공모전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복거일 작가는 "(자유경제원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너그러움인데 조롱거리가 됐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너그럽게 이해해야 한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결국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유경제원의 몰이해가 공인에 대한 문학적 풍자조차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무관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풍자한 저자들에게 무리한 고소전을 감행한 자유경제원을 향해 시민사회는 물론이고 문학계와 법조계 등 각계각층의 비판과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데에 따른 당연한 반응들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판한 작품을 '이승만 시 공모전' 수상작으로 선정해 망신을 톡톡히 샀던 자유경제원이 다시 한 번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누워서 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을 오직 그들만 모르는 것 같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2373&rccode=lv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