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법칙…배우고 투쟁하고 노력하라 / 최정규
타인의 고통
“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1주기였던 지난 5월28일 오후 사고 현장인 서울 광진구 구의역 9-4 승강장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케이크와 추모의 꽃 등이 놓여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구상 가장 부자 중 한 사람인 빌 게이츠가 십수년 전 미국 공영방송의 "지금은"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사재를 털어 ‘빌과 멀린다 게이츠’라는 이름의 재단을 만들었고, 국제적 보건 의료와 빈곤 퇴치에 막 나섰을 때의 일이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빌 모이어스는 빌 게이츠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권력과 특권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가난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빌 게이츠는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처지에 자신을 놓고 그들의 어려움을 내 것으로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매일매일 전쟁 같은 삶의 모습을 전해들으면서, 그들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답했다.
누군가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나를 놓아본 후, 내가 그러한 상황에 처했더라면 그 고통이 어떨 것인가를 상상하며, 그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감의 원리이다.
나에게 십만원이 있다고 하자.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자. 먼저 그 돈을 나를 위해 쓴다고 해보자. 친구와 함께 멋진 저녁을(간단한 술 한잔을 하면서) 먹을 수도 있고, 전부터 사고 싶었던 티셔츠와 반바지 한 벌을 살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십만원을 나를 위해 쓸 때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나열해보고, 이 중 가장 가치롭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나 골라보자. 그리고 그렇게 돈을 씀으로써 얼마나 내게 만족을 줄지를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들을 생각해보자. 이번 선택지들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십만원을 쓰는 경우들만을 포함시켜보자. 예를 들어, 부모님 생신 선물을 살 수도 있고, 갑작스레 집안 사정으로 등록금을 마련하는 데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나중에 갚아라”라는 말을 하겠지만) 쓸 수도 있을 것이며, 시리아 난민들을 돕기 위해 혹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는 곳에 그 돈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지들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만족을 줄지를 생각해보자.
약간의 계산으로 둘 사이에 만족도를
비교해보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돈을 써서 그의 고통을 경감시켜주거나 혹은 그의 행복을 증진시켜줄 때 그로부터 나 스스로가 얼마나 만족하는지의
정도를 Y라고 하자. 그리고 그 돈을 오로지 나를 위해 썼을 때 내가 얻게 되는 만족감의 크기를 M이라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 계산했다면 남을 위해 십만원을 썼을 때 내가 얻는 만족감 Y가 나를 위해 써서 얻은 만족감 M보다 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남보다 나 자신이 더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행복이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경우 Y값은 0일 것이다.
어떤 선택지에 대해서는
타인의 행복으로부터 내가 얻는 만족감 Y가 그 돈을 나를 위해서만 썼을 때의 만족감 M보다 클 수 있는데(적어도 한두 개는 그런 경우가 나올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헌혈도 하고, 자원봉사도 하며, 혹은 아프리카의 빈곤 퇴치를 위해 기부를 하게 된다. 내가 한번도 보지 않았던 생면부지의 누군가의 행복을 놓고 위의 계산을 했는데, Y가 M보다 크다면 무조건적인 이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 희생의 크기에 비해 타인이 얻게 되는 이득의 크기가 더 크다면, 타인의 고통을 보고 연민을 느끼는 것을 넘어, 내게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그를 돕기 위해 나선다는 말이다.
이 두 수치의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많다. 우선, 같은 십만원이라도 그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돈은 다른 가치를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꽤나 넉넉한 반면 내가 고려하고 있는 상대는 비참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해보자. 그런 경우라면 십만원이 나보다는 그에게 더 가치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극단적으로 비교하자면, 그 돈은 때로는 죽어가는 상대방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금액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 액수가 작게 느껴지는 경우를 가리켜 소득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소득재분배를 옹호하는 강력한 논거가 되기도 한다. (즉, 경제적 형편이 없는 사람의 한 푼이 형편있는 사람이 가진 두 푼보다 훨씬 값있게 쓰일 수 있으니,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의 복지 향상에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흔히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 액수가 작게 느껴지는 경우를 가리켜 소득의 한계효용이 체감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소득재분배를 옹호하는 강력한 논거가 되기도 한다. (즉, 경제적 형편이 없는 사람의 한 푼이 형편있는 사람이 가진 두 푼보다 훨씬 값있게 쓰일 수 있으니,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는 정책이 사회 전체의 복지 향상에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둘째, 내가 고려하고 있는 상대방의 행복이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도 중요할 것이다.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상대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 상대가 내 가족 누군가인 경우로부터, 친한 친구인 경우, 그리고 먼 친구인 경우 그리고 생면부지의 상대인 경우까지를 각각 비교해보자.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혹은 고통을 경감해주기 위해서 내가 들인 조그만 희생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인지를
보면, 타인과 나와의 거리가 꽤나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친구를 돕는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있는 일로 다가오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어린아이가 말라리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직접적으로 체감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처지라면 상대보다는 나를 더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리고 같은 처지라면 상대방이 나와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의 고통도 멀게 느껴지기 마련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공감”(혹은 “동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은 이 공감의 메커니즘이 가까운 사람들을 향해서는 잘 작동하지만, 거리가 멀어지면서 점점 약해질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는 확장된 동감 메커니즘을 어떻게 갖게 되는지를
고민했다. 그래야 우리의 공감이 도덕감정이 되어 공평무사한 제도와 관습의 토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의 한계 효용이 체감하는 경향.. 소득재분배 옹호하는 논거
되기도
나와의 거리 멀수록 고통 덜 느껴 .. 확장된 동감 메커니즘 과제 등장
나와의 거리 멀수록 고통 덜 느껴 .. 확장된 동감 메커니즘 과제 등장
진화생물학, ‘이타성이 진화에 유리’.. 인류사회 이타적 행위의 독특함은
생면부지에도 공감 확장한다는 점.. 의식적 노력과 투쟁의 산물일 수도
생면부지에도 공감 확장한다는 점.. 의식적 노력과 투쟁의 산물일 수도
내 유전자가 후대에
전달될 확률
한 단계씩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쩌다가 타인의 행복을 내 행복의 일부로 느끼고,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의 일부로 느끼면서 타인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지난 수십년간, 아니 더 길게는 찰스 다윈 때부터 진화생물학자들은 우리가 나 자신을 넘어서 타자의 행복을 고려하는 이유를 규명하고자
했다. 이들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혈연관계에 있거나, 혹은 우리와 빈번한 교류를 하는 상대를 향한 이타성이 진화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움 주는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에 비해 수혜자가 얻는 이득이 충분히 크다면, 혈연관계에 있는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내 유전자가 후대에 전달될 확률을 높일 수 있고, 빈번한 교류가 예측되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내가 나중에 도움받을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욘 엘스테르가 만들어 낸 예를 약간만 변형하여 적용해보자. 십만원을 어디에 쓸지를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와서 5만원짜리 약을 한 알 사라고 하면서 이 약을 먹으면 타인의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자. 만일 십만원 중 오만원을 그 약을 사는 데 쓰면, 나머지 오만원은 내가 필요한 것을 사서 즐기면 그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약을 사서 먹을 것인가? 앞선 설명에 따르면 고통받는 타인이 나와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나와 교류가 빈번한 사람이라면 그 약을 안 사먹는 게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는 게 더 나은 선택일 것이란 얘기다. 혈연관계에 있는 누군가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그를 도움으로써 내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나와 빈번한 교류를 하는 상대방이 도움에 응답할 수 있어야 상대와 오래도록 교류하면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큼 내가 고려하는 타인이 가족의 일원인 경우, 혹은 나와 빈번히 교류하는 사람인 경우,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인 경우 공감의 존재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인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타적 행위의 독특함은 그것이 방금 말한 좁은 범위를 훨씬 뛰어넘어 생면부지의 사람들한테까지
널리 행해진다는 것이다. 앞의 예와는 달리 그렇게 해서 이득일 게 없는데도 말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까지 공감이 확대되는 과정은
그리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은 그렇게 되기까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혹은 부단한 노력과 투쟁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와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느끼게 되는 고통이 나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은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울기 시작하는 아이나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고 괜히 즐거워지는 식의 감정의
전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전이를 넘어 공감에 이르기
위해서는...
①상대방도 나와 동일한 인격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고,
②나를 상대방의 처지에 놓으려는 상상력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③상대방이 그 상황에서 느끼게 될 고통이 내가 그 처지에 있을 때 느끼게 될
고통과 다르지 않다고 여겨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④나 역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그가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역지사지가 가능해야 우리의
공감은 편협한 치우침을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처지에 놓였더라면 이런 어려움을 겪겠구나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면, 공감은 확장된 범위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불편부당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1776년 7월4일 대륙의회에서 채택된 미국 독립선언문. “사람이라면 모두가 평등하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 것이 자명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은 여전히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위키피디아
공감의 제도적 토대가
가능하려면
공감의 범위가 확장되고 불편부당함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의 결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래전이지만 사람들은 누군가가 사자에 물려 죽는 모습을 보고 환호하기도 했고, 요한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에서 말했던 것처럼 마을 축제 때 누군가를
잔인하게 처형시키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자백을 얻어내겠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고문이 금지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평등하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 것이 자명하다고 선언했던 미국 독립선언문의 저자들은 그 평등한
“모두”의 범주에 노예를 넣지 않았다. 그리고 평등이라는 진리를 확인한 후에도, 끊임없이 재산이 있는지 없는지를 문제 삼았다. 배제된 이들도 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인격이라고 전제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타인을 나와 동일한 인격으로 보고 그의 처지에
나를 투영해보려는 노력이 계급을 넘어, 인종을 넘어, 그리고 성 차이를 넘어 인정되기까지는 그 자명한 진리를 선언한 이후에도 2백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으며, 계급과 인종, 그리고 성별을 넘어 공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여전히 진행중인 셈이다.
2년 전 터키 해안에서 엎드린 채 죽어 있는 세 살짜리 시리아 어린이 사진 한 장이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다. 쿠르디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는 내전을 피해 부모와 함께 터키에서 그리스로 향하던 중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은 채
해안가로 떠밀려왔다. 우리는 쿠르디의 죽음을 애도했고, 많은 뉴스 매체는 쿠르디가 죽음에 이르게 된 배경과 원인을 생생히 알려주었다.
미디어 덕분에 타인의
고통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공감이 발동되고, 연민에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단계는 우리를 그들의 처지에 놓고,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들이 단지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상상해내는
일이다. 나는 우연히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아남은 자임을 자각하고, 우연히 그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공감할 때 우리는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편부당성을 갖출 때 우리의 공감은 제도적 토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자리에 쿠르디를 놓든, 강남역에서 살해당한 20대 여성을 놓든, 아니면 구의역에서 생을 마감한 청년을 놓든 마찬가지다.
최정규 /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교수 "이타적 인간의 출현", "게임이론과 진화 다이내믹스" 등의 책을 냈다. 이타성과 상호성의 진화를 연구해왔고, 사람들의 행동 동기를 찾아내고 제도의 영향을 살펴보기 위한 행동실험도 진행하고 있다.이 연재물의 열쇳말은 행동, 제도 그리고 진화이다. 이 열쇳말을 가지고 경제학과 인문학 그리고 자연과학에서 오버랩되는 주제를 찾아 이야기해 보려 한다
등록: 2017-07-28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047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