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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라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격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 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 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은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렇다 ……
하 …… 그렇지 ……
아암 그렇구말구 ……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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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이후에 김수영은 '피 냄새 나는 자유와 고독한 혁명가'를 노래하는 낭만주의적 시인의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김수영 시인이 보인 태도는 그 이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적 생각을 스스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정의롭지 않은 한 명의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제거하기만 하면 민주주의가 곧바로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지적처럼 이미 권위주의 사회에서 오랜 동안 길들여져 왔다면, 시인을 포함한 당시 대개의 사람들은 오히려 자유를 두려워하는 수동적 주체로 구성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 때문에 시인은 우리에게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싸워야만 한다고 그토록 역설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싸움은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인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는 '그림자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분명 김수영은 푸코적인 통찰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시인의 통찰은 이성적인 것이었을 뿐 내면 깊숙이 파고든 정서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삶의 장소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는' 싸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른 뒤 시인은 "하 …… 그렇다 ……/하 …… 그렇지
……"라고 길게 탄식을 내뱉습니다. 이런 주저하는 듯한 긍정만으로는 자신의 통찰을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기 어렵겠지요.
시인의 이런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4·19혁명이 성공하자마자 곧 낭만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히고 마는 아쉬움을 어느 정도 예감합니다. (재야 철학자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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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투루는 한시도 무심코 지낼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차라리 이런 형벌을 치워달라고, 차라리 족쇄의 평안을 다시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정도 고통이야 지금 누리는 이 자유를 위해서라면
온 영혼을 바쳐서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며 떨쳐 일어나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