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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1년 전, 촛불이 없었다면..


 오만한 권력자를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린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1년이 지난 지금 보면 박근혜가 감옥에 가 있는 것도, 최순실과 이재용 등 국정농단의 공범자들이 재판을 기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작년 겨울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 겨울 촛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시사IN의 가상 기사로 추측해볼 수 있다.
 
촛불이 없었다면 국정 교과서가 올해 전국 학교에 보급되었을 것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박정희 동상이 세워졌을 것이며, 각종 애국콘텐츠가 전국 극장가와 안방을 휩쓸었을 지도 모른다.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예술계 인사들은 여전히 지원에서 배제되고, 국정원이 배포한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촛불이 없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끝까지 파헤치지 못했을 것이다. 정유라는 삼성의 돈을 받아 훈련에 매진하고,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도쿄올림픽을 준비했을 것이다
최순실은 여전히 청와대를 제 집 드나들듯 들락거리며 청와대 문건을 받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박근혜가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촛불이 없었다면] 정유라, 삼성 돈으로 훈련 매진
 
20171106() 529호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 ‘최순실 국면이 진정되자, 최씨는 예전처럼 매일 아침 ‘V’라고 쓰인 서류 봉투를 받았다. 정유라씨는 공주 승마논란에도 불구하고 2020년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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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놓였거나 벽에 걸린 달력을 들춰보라. 달력 대부분에 2017‘1220은 빨간 날, 대통령 선거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듬해 달력이 인쇄되던 지난해 하반기까지도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지금과 같은 1년 뒤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또 쉽게 상상할 수 없다. 지난겨울 촛불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촛불 1주년을 맞이해 촛불이 없었더라면우리가 지내고 있을 디스토피아를 그려봤다. 촛불이 없었다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끝까지 파헤치기 힘들었을 터이다.
최순실씨는 여전히 청와대 문건을 받아 빨간 줄을 긋고 청와대를 제 집처럼 들락거리고 있을 것이다.
정유라씨도 이화여대 재학생으로 삼성이 제공한 말을 타고 한창 도쿄 올림픽을 준비했을 것이다.

역사·교육·문화 부문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것이다. 올해 국정 역사 교과서가 학교 현장에 보급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박정희 동상이 건립됐을 수도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따라 온통 우편향콘텐츠가 텔레비전·서점·영화관을 점령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부조리와 불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악성 댓글로 고통받다가, 점차 이상한 혐의가 덧씌워지고, 결국에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파렴치범이나 질서파괴범, 아니면 최소한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어 손가락질 받기 십상일 것이다.
 갑질은 더욱 만연하고, 최저임금 인상 따위는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것이며,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다며 학교에서 유신시절의 교련 교육같은 것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
 상위 몇 퍼센트, 또는 상류층에 끼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저 무기력하게 세상을 바라보거나, 아니면 죽지 못해 하루를 살며 그저 자신의 무능력과 불운을 탓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런 세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기사를 쓰고 있을까를 상상하며 창간 이래 처음으로 허구를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다만 사실 기반허구이다. 실제로 그런 징조가 있었고 자칫하면 일어날 수 있었던 일들을 소재로 삼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니 촛불의 위대함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촛불이 있었기에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고 오늘이 변했다. 모두, 입김 서리던 지난 겨울날 꽁꽁 언 손으로 희망을 밝힌 촛불 시민덕분이다
<편집자 주>
 
  
장시호씨는 지난 추석 때도 청와대에서 보낸 선물을 받았다. 이모 최순실씨가 챙겨준 큰댁에서 가져온선물이다. 청와대 봉황 그림이 그려진 포장에 쌀 2·대추·육포 등이 담겨 있었다. 2년 전에는 선물이 너무 무거워 제주도 집으로 택배로 받은 적도 있다. 최순실 일가는 박근혜 대통령을 큰집 엄마또는 큰엄마라 부른다. 최씨 일가를 제외하고 시민들은 여전히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정확히 모른다.

지난해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해 수많은 의혹이 쏟아졌다. 심지어 최순실씨가 제일 좋아하는 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는 고영태씨의 폭로가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최순실 국면을 돌파했다. 지난해 1020일 박 대통령은 의미 있는 사업에 대해 의혹이 확산되고 도를 지나치게 인식공격성 논란이 이어진다라며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다음 날부터 검찰은 이 가이드라인에 따라 움직였다.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 또한 같은 날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연설문 수정은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느냐라며 진화에 나섰다.
독일에 머물던 최순실씨는 잠적해 언론의 추적을 따돌렸다. 최씨가 비선 실세라는 말에 반신반의하던 여론도 최순실은 박근혜가 영애 시절부터 가까웠던 최태민의 딸정도로 정리됐다. 2013년 정윤회 문건 사건 때와 똑같이 최씨 의혹을 보도한 기자들과 내부 고발자 등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은 이건희, ‘세자는 이재용

최순실 국면이 진정되자, 최씨는 예전처럼 매일 아침 ‘V’라고 쓰인 서류 봉투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늘 그랬듯, 이영선 청와대 경호관이 최순실씨 집사 구실을 하는 방 아무개씨에게 서류 봉투를 전달했다. 최순실씨는 태블릿 PC를 통해 청와대 문건을 받기도 했지만, 주로 서류를 받아 포스트잇을 붙이고 메모를 남겼다.대통령이 서류를 너무 많이 보내서 힘들다라고 최씨가 푸념할 정도였다. 최씨가 맡은 일은 국정 관련 서류 검토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 의상·피부·간식·자금 관리까지 다양했다.

방씨가 쉴 때는 장시호씨가 그 일을 대신했다. 최순실씨가 검토한 서류를 윤전추 청와대 행정관에게 전달했다. 장시호씨와 윤 행정관은 서울 한남대교 북쪽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영화 ‘007’처럼 접선하듯 만났다. 윤 행정관이 검은색 구형 그랜저를 타고 와 장시호씨의 차 창문을 두드리면, 장씨는 창문을 빠끔히 열고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렇게 전달된 서류를 통해 이틀 만에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이 바뀐 적도 있었다. 201310월 취임해 지금까지 차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왕차관김종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조차 대단하다고 감탄했던 최순실씨의 힘은, 삼성과의 관계에서 절정을 이뤘다.

삼성은 2018년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2015년부터 최순실·정유라 모녀를 지원했다. 지원금은 220억원에 달했다. 2015981520유로, 201512716000유로, 20163723000유로, 2016758만 유로 등을 최순실씨 소유 독일 회사 코어스포츠 계좌로 송금했다.

20149월 박근혜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처음 독대하며 승마 지원을 요구한 이후 지원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20147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작성한 문건에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세자 자리를 잡아줘야 한다라고 기록되었다. 이 문건에 나오는 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세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뜻한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문건에 왕과 세자라는 은어를 쓰며 삼성과 은밀한 주고받기를 기획한 셈이다.
 
 
지난해 3월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맨 오른쪽)과 함께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관리의 삼성답게 입단속에 철저했다. 특히 대한승마협회장을 겸임한 박상진 삼성전자 사장은 독일에서 정유라씨를 도운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이건 VIP가 말 사주라고 한 것인데 세상에 알려지면 탄핵감이다. 앞으로 입조심하고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 만일에 대비해 말을 삼성 승마단 소유로 처리해두었다. 이것이 최순실씨를 자극했다. 최씨가 이재룡이 VIP 만났을 때 말 사준다고 했지 언제 빌려준다고 했냐(최순실은 이재용 부회장을 이재룡이라고 불렀다)”라고 항의를 해, 결국 박상진 사장이 독일에 머물던 최순실씨를 찾아가 해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공주 승마논란을 딛고 정유라씨도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최순실씨는 딸 정유라씨를 2020년 도쿄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해외 전지훈련을 이유로 정유라씨는 대학 수업을 자주 빠졌지만 졸업에는 지장이 없다.
구보는 3절 운동이다. 마음속에 메트로놈 하나 놓고 달그닥, 훅 하면 된다와 같은 리포트를 내고도 평균 B학점 이상을 받았다. 피치 못할 경우에는, 엄마와 가까운 다른 대학 교수 하정희씨 등이 자기 학생을 시켜 대리시험을 치게 했다. 온라인에는 정유라씨가 페이스북에 썼다는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글이 떠돌았지만, 좌파의 음해·조작이라는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시사IN 조남진
2014920일 제17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한 최순실씨와 최씨의 딸 정유라씨(왼쪽).

실제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지난해 129234표 찬성으로 가결됐다. 엿새 전 200만명이 넘게 모인 촛불집회 영향이 컸다. 지난 310일 헌법재판소는 ‘80(인용 대 기각)’으로 탄핵소추안 인용을 결정했다. 18가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근혜 피고인은 지금까지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최순실씨는 지난해 9월 독일로 출국했다가 같은 해 1030일 귀국해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 기소되었다.

지난해 1130일 박영수 특검팀이 출범했다. 장시호씨는 특검 도우미로 불리며 청와대에서 받은 선물 내역까지 상세하게 진술했다. 장씨는 재판에서도 큰엄마(박근혜 전 대통령)’와 최순실씨 사이 인연을 증언하기도 했다. 지난 217일 박영수 특검팀은 두 번째 구속영장 청구 끝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구속했다. 촛불이 켜지기 직전까지도, 삼성은 최순실씨와 말 거래를 했다. ‘말 세탁을 통해, 의심받던 말을 팔고 더 비싼 말을 사주기도 했다.

최순실씨가 구속된 다음에도 덴마크에 머물던 정유라씨는 지난 531일 강제 송환됐다. 정씨는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엄마가 삼성 말을 내 것처럼 타라고 했다” “관련 녹취가 있다라는 폭탄 증언을 했다. 정씨의 이 같은 증언이 이재용 부회장 1심 유죄 선고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8251심에서 뇌물공여 혐의 등이 인정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을 받고 있는 이 부회장 측은 승마계에서 말을 사준다는 건 훈련이 가능하도록 말을 임대해준다는 의미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유라씨 이화여대 입학 및 학사 비리 혐의 또한 1심에서 인정돼,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교수들에게도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다.   그

 그리고 무엇보다도 박근혜는 부정선거로  당선된, 그래서 애초부터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며, 그런 선거부정의 배후가 다름아닌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는 증거들이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런 일탈과 범법행위를 꾸미고 실행한 청와대 보좌진과 장관 차관들, 국가정보원과 국군 기무사의 우두머리 국정원장과 국방부장관 등이 여전히 애국심이니 국법질서니 하는, 지금이라면 씨도 안먹힐 거짓뿌렁을 입에 달고 행세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권력의 시녀 검찰은 여전히 애꿎은 사람들을 닦달하며 가증스럽게도 '법과 질서'를 입에 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모리배들을 위해 헌신한 자칭 애국세력과 매국 공무원 등도 선량한 국민들을 비웃으며 어깨를 으슥대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을 터이다.

생각만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2016년 겨울의 촛불이 없었더라면,

 
 

2017-11-01

심장에 이상.. 기침하라? 무엇보다도 주위 도움을 청하는 게 우선.

심장에 이상을 느꼈을 때 기침을 하면 소생 효과가 있다는 자료가 돌아다닙니다.

이는 이전에 심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던 시절,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수준의 '카더라' 정도의 민간요법으로 회자되다가,  공식적으로는 아까운 시간만 버리거나, 아니면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다하여, 효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폐기되어 이제는 속설로 남은 내용입니다.
약한 부정맥의 경우, 즉 이상을 느낄만할 여유가 있을 때 약간의 효과, 그것도 경우에 따라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기침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점입니다.

심장에 이상을 느끼면 우선 안정을 최우선으로 취하며 바로 주위의 조력을 구하고, 응급실로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일분 일초가 바쁜 때 효과없는 조치를 반복하면서 낭비한 시간은 최악의 사태를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운전 중이라면 차를 길 한켠에 대어 정지하는 게 최선이며,  요리 중 화덕 불 앞이라면, 물러나 바닥에 앉는 것이 최선이란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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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마비엔 기침 반복” SNS 괴담 따라하면 ‘생명 위독’

입력 : 2017-11-01 15:28
 



사진=미국심장학회 웹사이트 캡처


최근 배우 김주혁의 사망 원인이 심장마비를 야기하는 심근경색이라고 잘못 알려지면서 심장마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혼자 있을 때 심장마비가 오면 강하게 기침을 반복해 자가 처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서울아산병원의 자료라며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괴담이다. 이 자료대로 기침을 하다 시간을 낭비할 경우 오히려 생명이 위험하다.

해당 콘텐츠는 ‘혼자 있다가 심장마비 징후가 있을 때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느껴질 때까지 약 2초 간격으로 심호흡과 기침을 반복해야 한다’고 썼다. 이렇게 해야 ‘심호흡은 산소를 폐로 운반하고 기침은 심장을 쥐어짜 혈액 순화를 돕기 때문에 심장 발작이 일어났을 때 병원까지 가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와 관련된 이 자료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이 자료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심장학회(AHA)는 2010년부터 이 같은 기침 CPR(심폐소생술) 방법을 권장하고 있지 않다. 최초 심장바미의 조짐이 보이는 부정맥의 경우 얼마간 시간을 벌기 위해 시행되는 이 방법이 모든 환자에게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기침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개인마다 숨을 참을 때가 있는데, 이 경우 산소 공급이 방해해 심근 국소성 허혈이나 심근경색을 악화시킬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자료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든 것도 아니다. 서울아산병원 측은 “이 자료는 병원에서 제공한 것이 아니다”며 “2015년도에도 비슷한 자료가 돌아다녀 확인하니 일반인이 병원 이름을 가져다 쓴 것으로 확인됐고 당사자는 자료를 바로 지웠다”고 말했다.

심장마비가 발생하거나 전조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가능한 한 빨리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주변에 도움을 청해 119구조대를 불러야 한다. 대한심장학회는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급성심근경색증상이 발생했을 때, 가능하면 움직이지 말고 119를 불러 응급실로 바로 가야한다고 설명했다.
AHA도 혼자 있을 때 기침을 하느라 중요한 시간을 놓치지 말고 반드시 주위에 도움을 청해 병원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심근경색으로 심정지가 나타날 경우엔 4~5분 내로 심폐소생술을 해 뇌 손상 등 합병증을 줄이고 사망 위험을 낮춰야 한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868408&code=61121111&sid1=hea

조선일보: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16/20150916014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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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영화 <남한산성>과 사실 관계: 인조, 최명길, 김상헌 누구도 죽지 않았다.

 
비루하게 살아 남은 왕...   인조,  명색이 충신  김상헌과  최명길.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이 땅의 민중들과 같은 고통을 받았을까?

모진 목숨을 구걸해 비굴하게 살아남은 그들과 달리
민초들은 정말 죽지 못해 살거나, 정말로 비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훈의 소설로 만든 영화  ‘남한산성’은 누가 정말로 고통의 당사자였는지에 답해야 한다.
저 벼슬아치들인가? 아니면 백성들인가?  
최명길이나 김상헌이나 모두 살아 남아,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죽어 나간  민중과는 다른 삶을 온전히(?) 살았기에. 누가 더 그럴사한지 따지는 게  도토리 키재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얼굴이 뜨뜻해질 뿐이다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였던 최명길, 이조판서였던 김상헌은 전쟁 후에도 별로 손해 본 것은 없었다.  국제정치에서 줄타기라도 할 줄 알았던 광해군을 반란으로 몰아내고  그보다 훨씬 한심한 인조를 군주로 내세웠던 인조반정의 공신, 최와 김. 이 반란군의 핵심세력들은 그렇게 끝까지 부귀영화와 가까이 있었다.

호란 후, 최명길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자살로 묘사된 김상헌 역시 좌의정이 되어 천수를 누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입에 침이 고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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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강간당한 50만은 어디에남한산성이 거세한 것들        2017-10-19

[한겨레21]   인조가 민중의 삶 건지려 치욕 감수했다는 김훈식 남성 서사
정치적 무능과 무책임으로 민중 고통에 빠뜨린 왕과 지배층에 면죄부 줄 위험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소설가 김훈이 2007년 써낸 이 문장이 아닐까 한다. 김훈은 이 문장 뒤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보탰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소설 남한산성을 최대한 영상으로 옮기려 했다. 영화를 만든 황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남한산성 소설 속 장면들을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치더라.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이 서로 뱉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처절하고 치열하게 느껴졌다. 그 논쟁에 매료돼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 남한산성의 흠결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백성 아닌 명나라 생각한 김상헌

소설과 동명의 영화 남한산성은 모두 병자호란이 진행된 47일간의 기록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1636년 병자년 1214, 열흘여 만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질주해온 청의 기마부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고립과 추위와 패배의 시간을 견디다 이듬해 130일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였다.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 문서와 함께 성에서 나와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이 과정에서 , 생존, 종사의 유지를 위해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주화론자 최명길과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해서는 안 된다며 청과의 결전을 주장한 척화론자 김상헌이 치열한 말의 대결을 펼친다. 영화는 두 인물의 말의 대결로 시종일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한산성병자호란을 다뤄온 기존 작품들과 가장 다른 점은 김상헌과 왕 인조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론자(청과의 화친을 주장)를 현실을 냉철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한 인물들로 높게 평가했다. 반면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론자는 명나라와 맺은 군신관계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명분주의자라고 인식해왔다.

김훈은 소설에서 척화론자 김상헌에게 다른 이미지를 부여한다. 김훈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 김상헌은 책상머리에서 책이나 읽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라, 충절이라는 가치를 중히 여기면서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강직하고 곧은 사대부이다. 이런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뱃사공의 손녀 나루와 신분은 낮지만 지혜로운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역)가 투입된다. 김상헌은 왕을 따라 뒤늦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가난한 뱃사공의 목을 단칼에 벤다. 향후 그가 청나라 군대에 언 강의 길을 안내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 칼질에는 비장미가 서려 있다. 병사들의 추위를 걱정해 가마니를 사용하게 하고, 신분은 낮지만 현명한 날쇠를 신뢰하고 그에게 중책을 맡긴다. 김상헌의 비장미는 왕이 청에 항복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하면서 완성된다.

(그러나 실제 김상헌은 자결로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 적과 싸우자며 모두의 죽음을 부추기던 김상헌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 좌의정까지 지냈고, 한발 더 나아가 안동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이 되었다. 영화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던 셈이다.)

죽고 강간당한 50만 조선 피로인

영화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성실하게 스크린에 옮겼다. 그 과정에서 역사에서 여성과 민중의 피해는 거세했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판타지에 불과하다. 김상헌은 왕이 항복을 약속할 때 6일 동안 곡기를 끊은 뒤 자살을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칼로 배를 찌르는 할복이 아닌, 옆에 사람을 두고 목을 매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자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상헌은 명분과 죽음을 바꾸지 않았다.

<병자호란;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등을 쓴 한명기 명지대 교수(국사학)김상헌은 김훈 소설에서와 달리 비쩍 마른 사람으로 추정된다. 김상헌의 척화론은 백성이나 조선의 임금보다는 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것 등 명에 대한 은혜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이 망하는 것도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영화가 묘사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 속 인조의 모습 역시 실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인조는 실패한 왕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왕이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조는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왕이 버리고 떠난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모두 불타 성하지 않았다. 또 거리 이곳저곳에서 주검이 나뒹굴었다. 특히 병자호란의 가장 큰 비극은 청으로 끌려간 50~60만 명으로 추정되는 피로인(적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의 존재였다. 청은 피로인들이 조선으로 탈출하다 붙잡히면, 죽이거나 발뒤꿈치를 잘랐다.<병자록>을 쓴 나만갑은 조선인 피로인이 무언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 없다고 썼다. 여성 피로인의 고통은 더했다. 사로잡힌 뒤 강간당했고, 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 청군 장수에게 사로잡힌 여성 피로인은 장수의 계급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윤간을 당했다.

 이런 고통을 유발한 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인조였다. 한명기 교수는 인조는 병자호란의 와중에 여러 번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도성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면 빨리 해야 했는데 미적대다 원래 가려던 강화도에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을 겪어놓고도 정권 보위에 급급해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고 지적했다.

이에 견줘 영화 남한산성은 인조의 고통을 받아안으려는 작품이다.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의 마지막 장에서 인조가 항복 절차인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장면은 처절하고도 우아하게 그려진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영화를 본 뒤 이토록 우아한 패배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왕이 무릎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흙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며 관객은 왕의 고통을 느낀다. 황진미 영화평론가도 김훈 작가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순간 백성들이 도열해서 울 때 어버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우리가 왜 민중을 고통에 빠뜨린 왕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라며 비판했다.

인조의 고통을 이해해야 하나



영화 남한산성은 실패한 왕 인조에 대해서도 그가 겪은 인간적 고뇌를 설명하려 한다.

김훈은 그동안 패배한 남성들에게 비장한 역사적 서사를 부여해왔다.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책 <그런 남성은 없다>에 실은 글 누가 민주주의를 노래하는가에서 '공터에서' 같은 김훈의 장편 남성 서사를 분석했다. 그는 이 글에서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등장한 장편 남성 서사는 역사의 피해자라는 운명의 형식을 불가피하면서도 특권적인 것으로 승인·정당화하고자 하는 남성 주체의 정치적 욕망 및 무의식을 반영한 역사적 장르로 읽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한 남성 주체에게 역사적 맥락을 부여해온 것이 김훈의 <공터에서> 같은 장편소설이다.

남한산성도 이런 분석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김훈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적 역사를 만들어온 남성 주체들조차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 고뇌하며 흙바닥에 머리를 비볐음을 강조한다. 하지만..이에 대해 류진희 성균관대 강사(한국학)전쟁 이후 50만 명이 넘는 민중이 피로인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한산성은 그런 내용을 거세한 채, 척화파로 대표되는 김상헌의 충절과 고뇌를 생각하게 한다. 실패한 왕 인조에게도 민중의 삶을 건지기 위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감수했다는 서사를 부여한다. 모든 남성 역사 주체에게 그럴 만했다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실로 고통받은 자 누구인가

김훈은 소설에서 나는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병자호란 이후 진실로 고통받은 자는 누구였는가. 왕 인조인가, 아니면 인조의 무수한 정치적 실패와 무책임으로 인해 전쟁 중 죽고 청에 끌려가 고통당한 민중인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참고 문헌: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푸른역사(2013). 허태구(2013), “최명길의 주화론과 대명의리, <한국사연구> 162호 오수창(2017),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의 왜곡과 그 현재적 의미, <역사와 현실> 104.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15150.html#csidx0df6f81de8989aea1c188e6a6da8d17





[영화] 남한산성, 300, 광주 그리고 북한
정의로운 죽음은 비루한 목숨 위에서 빛난다.               유원진   2017.10.18
사진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조선의 왕은 앞으로 나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라"
막상 인조가 그 짓(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을 하기 전까지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제단 위에 청나라 황제가 앉아있고 위에는 의기양양한 청나라의 대신들이, 아래에는 고개를 숙인 조선의 대신들이 늘어섰다.
인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명치끝이 아파왔다.
  
검은 상복을 입은 남루한 왕은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었다. 그냥 절하다가 머리가 땅에 닿은 것이 아니라 땅에 짓이기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카메라는 왕이 머리를 찧을 때마다 묻어 올라오는 흙가루까지 잡아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그 모든 시간들은 끝나지 않을 영원 같았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토감이 올라왔다. 저렇게까지 해서 비루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가...
페르시아 백만 대군이 스파르타를 침공했을 때 스파르타의 왕은 전사 300명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전투에서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용사들이여, 노예로 치욕스럽게 사느니 자유인으로 명예롭게 죽자.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스파르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우다 죽어갔는지를 기억해 줄 것 이다."
페르시아 대군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쉽게 이기지 못하고 수만의 병사들을 잃은 뒤에야 스파르타를 함락하게 된다. 그 뒤 스파르타는 역사에 남을 용맹함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바쳤는지, 그 수호정신을 인류에게 선사하였다. 희생 없는 자유는 없다고...
  
왜 인조는 그렇게 죽지 못하였는가. 만약 인조가 갑옷을 입고 말위에 높이 앉아 죽기를 각오하고 맨 앞에 나서서 싸웠다면그리하여 스파르타의 왕처럼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어져 처절하게 죽었다면우리는 훗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감히 그 누가 왕부터 어린아이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려는 나라를 빼앗으려 할 것인가...
왕은 아니었으되 스파르타의 왕처럼 말한 이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이 도청에서 죽지만 훗날 역사는 광주를 기억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땅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우리를 기억하고 용기를 내고 독재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정말 그랬다. 그들은 죽어서 이 땅에 빛나는 민주주의 별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국민들은 광주를 불러냈고 그들에게 의지했으며 그들과 함께 울고 희망을 노래했다. 지난겨울 그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광주는 늘 광화문 광장에서 국민들과 함께 있었다.

것은 윤상원 열사가 불의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살기보다 정의로운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인조같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짓찧었으면, 신군부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았으면, 이 땅의 광주는 남루하고 비루하게 잊혔을 것이었다.
영화에서 역적 최명길은 스스로 역적의 이름을 얻을망정 임금과 백성을 살려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충성스러운 신하로 비추어진다.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으되 아마도 생각할 여백을 남겨둔 듯 하다. 그러나 이완용도 최명길과 같은 논리로 조선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나라를 넘겼다고 했다. 그러한 논리라면 세상은 오직 하나의 강대국과 조각난 식민지들만 남았어야 한다. 진정한 충신이라면 왕의 유한한 육신보다는 영원한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목숨으로 충성을 바쳤어야 했다. 그 이름으로 민초들이 힘을 얻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우리는 저 불한당 같은 미 제국주의 책동에 절대로 굴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엄과 자주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남한산성이다. 그들이 독재 권력이든 미치광이 정권이든, 강대국에 굴하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는 자존심만은 존엄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기야 그 가난하고 병든 나라, 북한의 동토에서 독재를 하지 않고, 혹은 미치지 않고 어떻게 저 하늘 아래 유일 강대국인 미국과 전면전을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아마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관객들은 북한을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와 김일성 두 독재자가 오랜 시간 우리를 세뇌시켰던 그 치졸한 역사 속에서 우리 남북한 민중들이 얼마나 비루하고 남루하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며 힘들어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힘들었다.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나 누구라도 꼭 봐야할 영화임에는 틀림 없으니... 아마도 이 모순은 남한산성이 이 땅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인조가 되지 말고, 최명길이 되지 말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말하던 예판 김상헌이 한번쯤은 되어보자고 말하고 싶다.

(편주: 하기사 최명길이나 김상헌이나 모두 살아 남아,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죽어 나간 민중과는 다른 삶을 온전히(?) 살았기에. 누가 그럴사한지 따지는 게 도토리 키재기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얼굴이 뜨뜻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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