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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0

● 5·18을 모르는 당신에게 ●


등잔밑이 어둡다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모두 잊혀진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반복되지 않는다고 역사가는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역사가  조지 산타야나의 이 말은,  600만명을 가스로 살해한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앞 마당에 박혀 있습니다.
 
지드는 우리에게 다시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언제까지 이 비극을 되풀이 할 것인가? 언제 우리는 이런 천인공노할 잔학행위를 멈출 것인가?
 
Toutes choses sont dites déjà ; mais comme personne n'écoute, il faut toujours recommencer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으나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 앙드레 지드(André Gide, 프랑스 소설가 겸 비평가)
 
오래되어 잊으셨다거나, 아니면 그저 지나간 역사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시거든 도움이 되시라고 싣습니다.
소름끼치는 이 악행의 주범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역사를 희롱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소를 잃고도 아직까지 외양간을 고치지 않은 죄.. 그 죄값을 다시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5ZOKJsIwqY
(유네스코가 말하는 5.18의 진실 (5.18 기념재단)  




 
여러 곳에서 퍼온 자료를 골라,
옷깃을 여미며 삼가는 마음으로 아래에 싣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343.html 
 
5·18을 모르는 당신에게
 
등록 :2016-05-17 21:44수정 :2016-05-18 10:45
 
 
36년 전 오늘, 광주에서 5·8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해마다 이날 기념식이 열렸지만 올해는 유독 기념식을 앞두고 ‘논란’이 첨예합니다. 그 중심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습니다. 그러나 ‘논란’의 본질은 그 이상입니다. 168명(정부 집계)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5000여명이 다쳤습니다. 지금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로 박제화된 채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불가 세력’은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5·18을 기리지 못하게 흔들고 있습니다. ‘5·18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 기사는 5·18기념재단 등의 기록을 발췌해 재구성했습니다. 
 
제36주년 5·18민중항쟁 추모제가 열린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당시 아들 김병연씨를 잃은 이봉길(81)씨가 오열하고 있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제36주년 5·18민중항쟁 추모제가 열린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당시 아들 김병연씨를 잃은 이봉길(81)씨가 오열하고 있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 5월18일은 국가 기념일입니다
36년 전 오늘,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월18일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1980년 5월18일은 광주에서 신군부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본격화한 날입니다.
법정 기념일 제정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확실히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념일 지정 결정 직전인 1997년 4월17일 전두환·노태우의 반란 및 내란 혐의가 확정됐습니다. 공식 명칭도 ‘5·18민주화운동’으로 통일됐습니다. 시민들이 ‘저항하고 싸웠다’는 점에 방점을 두어 ‘5·18광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간혹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잘못된 표현입니다. ‘항쟁’이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띠고, ‘운동’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을 일컫는 데 반해, ‘사태’는 시위대의 폭력성에 무게를 둔 표현입니다.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할 때 사용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2. ‘서울의 봄’의 마지막을 부여잡은 ‘80년 광주’
18년 걸친 독재끝 민주화 열기, 신군부가 총칼로 꺾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서울의 봄’이 좌절되면서 시작합니다. 부산과 경남 마산 등에서 부마항쟁이라고 부르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26일, 종신 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가 피살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부풀어 올랐습니다. 1980년 봄은 ‘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렸습니다. 1980년 초부터 전국에서 계엄 철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습니다.  

하지만 1979년 12·12쿠데타로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의 열기를 총칼로 꺾었습니다. 신군부 세력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할 조짐이 보인다’며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계엄군은 광주에서 등교하는 대학생들을 구타하고, 통행금지 시각을 저녁 7시로 정했습니다.
 
 
 
3. 1980년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18일 군 투입…총을 쐈습니다, 21일 시민군이 생겨났습니다
일부 극우인사·단체는 아직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을 ‘폭도’라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군 이전에 계엄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5월18일 계엄령이 내려지자 광주 전남대 부근에도 계엄군이 투입됐습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것은 본디 경찰의 임무입니다.
 
계엄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 시민들에게 총을 겨눴습니다. 19일 청각장애인 김경철씨가 시민 가운데 처음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귀가 어두웠던 김씨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의 곤봉에 맞은 지 하루 만이었습니다. 같은 날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됩니다. 작전명은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된 ‘화려한 휴가’입니다. 21일 계엄군은 도청에 모인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합니다.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무차별 발포는 시민들이 ‘시민군’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시민들은 광주·화순·담양 지역의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꺼내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21일부터 26일까지는 항쟁의 중심이었던 전남도청을 목숨 걸고 지킵니다.
4.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사람들
27일 시민군 최후 저항…민간인 168명 숨지고 4782명 다쳤죠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는 ‘최후의 저항’을 알리는 시민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 4시께 전남도청 진압을 시작한 계엄군은 1시간여 만에 도청을 접수했습니다. 윤상원씨를 비롯해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헌병대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도청에는 200~500여명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5·18기념재단은 이날 도청에서 희생된 인원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2001년 정부 발표를 보면, 항쟁 당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해 195명, 부상자는 4782명입니다.
5. 광주의 진실 어떻게 알려졌나
신문엔 한 줄도 싣지 못했습니다…‘푸른 눈의 목격자’가 알렸죠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전한 국내 언론은 없었습니다. 신군부의 언론 검열 때문입니다. 언론들은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21일 담화문 내용 그대로, 광주항쟁을 ‘불순분자 및 고첩(고정간첩), 이에 동조하는 불량배들이 벌인 책동’으로 규정합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신 및 교통수단이 마비됐던 터라, 광주 바깥의 시민들은 언론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27일 한국방송(KBS) 9시 뉴스에서는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서 오늘 오전 3시30분 군병력을 광주시에 투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울러 “군이 진압하는 동안 도청과 공원 등지에서 폭도들의 일부 저항이 있었으나 오전 5시10분 광주 일원을 완전 장악”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현지 왜곡 르포도 한몫했습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김 고문은 25일치 사회면에 ‘바리케이드 너머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광주 시민들을 “총을 든 난동자들”로 표현했습니다.
 
반면, 검열에 반대하며 사표를 던진 언론인들도 있었습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을 전하려 한 20일치 신문이 발행되지 못하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공동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이들은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고 사직서에 적었습니다.
 
5·18의 진실은 독일 제1공영방송에서 내보낸 ‘푸른 눈의 목격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 씨의 취재 영상과 5·18단체·광주시민들의 끈질긴 진상규명운동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6.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노태우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습니다

 
1980년 광주의 희생은 7년 뒤 대규모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집니다. 19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이듬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고,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광주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국민들의 분노가 높아지자 전두환은 11월 백담사로 피신해 은둔합니다.
 
1992년, 시민들은 김영삼 문민정부를 출범시키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져온 30여년 군사정권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여론에도 1993년 5월 김영삼은 5·18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에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들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고발합니다.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궤변을 앞세워 전·노 등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민학살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습니다.
 
더욱 거세진 전·노 처벌 여론에 국회는 1995년 12월 여야 합의로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하여는 1993년 2월24일까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킵니다.
 
전두환은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반란 및 내란수괴, 내란 목적 살인 및 상관 살해 미수 등으로 무기징역을, 전직 대통령 노태우는 징역 17년(반란 및 내란 중요 임무 종사와 상관 살해 미수 등)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해 12월22일 김영삼은 국민대화합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전·노를 특별사면했습니다. 처벌은 흐지부지 끝났습니다.
 
3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차별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광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5·18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들 아셨겠지만, 2016학년도 5·18 탐구영역의 답은 모두 1번입니다.  김지은 현소은 기자 mirae@hani.co.kr
 
 






 
 
 
18일 오늘은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6년째 되는 날입니다. 5·18의 정신은 희미해진 채, 각종 잡음과 논란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5·18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5·18을 다룬 소설과 영화, 웹툰 8편을 소개합니다. 5·18민주화운동 열흘을 꼼꼼히 기록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5·18이 남긴 상처를 드러낸 작품도 있습니다. 희생자뿐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해자가 돼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작품도 있습니다.
 

‘5·18 직전 9박10일의 광주’

1. 영화 <스카우트> (김현석 감독, 2007)


1980년 5월8일, 대학 야구부에서 스카우트를 맡은 호창(임창정)은 5·18을 열흘 앞두고 광주로 ‘급파’된다. 고교 야구스타인 광주일고 3학년 선동열을 스카우트 해오라는 황당한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장르는 코미디지만, 영화 곳곳에 의미심장한 상징이 녹아 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야구는 3S(Sex, Screen, Sports)정책을 상기시킨다. ‘3S 정책’은 5·18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이 대중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성, 영화, 스포츠 산업을 장려한 것을 말한다. 호창이 ‘급파’되는 시기도 5월8일부터 17일까지다. 18일 본격화된 5·18민주화운동과 하루도 겹치지 않지만, 그 기간이 9박10일로 항쟁 기간과 같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전두환은) 진짜 남자’

호창은 광주에서 첫사랑 세영(엄지원)을 마주친다. 세영은 운동권 출신으로 군부 정권의 민주화 시위 진압에 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세영과 대화를 나누던 호창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진짜 남자”라며 추켜세운다. 세영을 향해 “너희들 모여 시민운동 하는 것도 다 겉멋 아니냐”라며 쏘아붙이기도 한다. 가해자의 무지가 피해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5·18 당시 열흘을 기록한 첫 소설’

2. 소설 <봄날> (임철우 작가, 1998)

200자 원고지 7000여장, 낱권으로 5권에 이른다. 대하소설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1998년 출간된 임철우 작가의 <봄날>은 5.18민주화운동을 전면에서 다룬 첫 소설로 알려져 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80년 광주에 대해 거듭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자 집필을 결심했다고 한다. 결심부터 탈고까지 무려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열흘 동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시민군 윤상현, K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상섭 등을 등장시켜 실존 인물들의 자취를 꼼꼼히 더듬는다.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문, 김준태·양성우 시인이 광주를 노래한 시 등 시대를 보여주는 자료도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암울한 시대를 기록하려는 작가의 끈질기고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잊힌 도시’

작가는 <봄날>의 서문에서 “끝내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그 봄날 열흘, 저 잊힌 도시를 위하여 이 기록을 바친다”고 했다. <봄날>을 통해 비로소 광주는 온전히 기록된 채 대중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5·18 당시 평범한 희생자들을 그려낸 흥행작’

3. 영화 <화려한 휴가>(김지훈 감독, 2007)


택시기사 민우(김상경)와 고등학생 진우(이준기), 간호사 신애(이요원) 등 광주의 평범한 시민들이 국가 폭력에 맞서 총을 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 제목은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작전명이기도 하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작품으로, 680만 관객을 모았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항쟁 마지막 날 새벽, 신애가 텅 빈 광주 거리에서 애타게 외치는 말이다. 이는 실제로 계엄군이 최후 진압을 위해 전남도청으로 향하던 5월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 울려 퍼진 목소리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영화 말미에 신애와 민우는 상상 결혼식을 올린다. 끝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려다 숨을 거둔 이들은 모두 함박웃음을 짓지만, 살아남은 신애 혼자만 웃지 못한다. 비극을 겪은 사람은 살아남아도 평생 죄책감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조용하고 길게 클로즈업되는 신애의 슬픈 얼굴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5·18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위로’

4. 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작가, 2014)

최근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2014년 펴낸 소설이다. 작가는 5·18 이후 무너진 희생자들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5·18 당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중학생 동호, 박정희 유신 정권 때 노동 운동을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광주에 그림자처럼 스며든 여성 방직 노동자, 시체를 닦기 위해 병원과 도청사를 오가는 고등학교 소녀 등 순박한 시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숨죽인 광주 시민들에 대한 씻김굿이다.
 

-5·18을 보여주는 문장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30여년이 지나 80년 광주를 기록하겠다며 찾은 작가에게 동호의 가족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일부 극우 세력이 당시 시민군을 ‘폭도’라고 매도할 때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짐작케 한다.


‘엄혹한 시대에 가해자가 돼야 했던 피해자’

5. 영화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 1999)


구로 공단의 야학에 다니던 평범한 청년 영호(설경구)는 1980년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된다. 영문도 모른 채 단순히 지시에 따라 시민들에게 총과 곤봉을 휘두른 뒤, 그의 삶도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삶을 망가뜨린다.

5·18민주화운동은 가해자에게도 상흔을 깊게 남겼다. 당시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했다. 경찰 대신 군대를 앞세우고,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영화는 이들 역시 역사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5·18을 보여주는 문장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는 중년에 접어들어 망가진 자신의 생을 뒤돌아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철로 위에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친다. 이후 그의 삶이 역 시계열적으로 나열된다. 영화는 한 번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 <꽃잎> 장면 갈무리
영화 <꽃잎> 장면 갈무리  (가운데가 혼신의 열연을 보여 주었던 가수 이정현)


‘처음으로 5·18 현장에서 촬영된 영화’
 

6. 영화 <꽃잎> (장선우 감독, 1996)


소녀(이정현)는 5·18민주화운동에서 어머니를 잃고 정신분열증을 얻게 된다. 당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어머니 손을 뿌리치고 혼자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탓이다. 인부 ‘장’(문성근)은 그녀를 거두지만, 정신이 불안정한 그녀를 육체적으로 학대한다.

1996년 상영된 이 영화는 5·18민주화운동을 전면으로 다룬 첫 영화로 알려져 있다. 최윤 작가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원작이다. 미국 방송 시엔엔(CNN)에서 언급되며 국제적으로 5·18을 다룬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잡음이 이어졌다. 영화 광고에 ‘학살자 전두환을 처단하라’는 구호가 등장했다는 이유로 한국공연윤리위원회에서 수정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5·18을 보여주는 키워드: 광주 금남로

1980년 5월21일은 계엄군이 광주 시위대를 향해 처음으로 발포한 날이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날이다. 영화에서 소녀의 어머니(이영란)도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이 의문사한 것에 분노해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가 총에 맞아 숨진다. 이 장면은 실제로 광주 금남로에서 촬영됐다. 5·18 희생자의 유가족과 광주 지역 학생 등 수천 명이 시위대나 계엄군으로 출연했다. 5·18 당시 광주 관련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붙잡힌 경험이 있는 장선우 감독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80년 5월의 아름다운 세상, 그 위대한 5월의 정신을 전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5·18을 통해 보여주는 민주화 열망’

7. 소설 <오래된 정원> (황석영 작가, 2000년)

5·18민주화운동 주동자로 지목된 현우는 도피생활을 하다 미술교사 윤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현우는 다시 민주화 운동에 나서고, 이내 붙잡혀 감옥에서 17년을 보낸다. 소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5·18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기 징역을 선고하는 엄혹한 시절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한국 현대사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집약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웹툰 <26년> 갈무리
웹툰 <26>갈무리
‘수십년이 흘러도 가해자는 사과하지 않는다’

8. 웹툰 <26>, 강풀

만화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가족을 조명한다. 광주에서 주먹을 쓰는 진배, 사격선수 미진, 경찰 정혁 등은 모두 5·18 이후 가족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항쟁 26년 만에, 5·18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진압 책임자인 ‘그 사람’(전두환)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이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6>은 끝내 실패하는 복수를 담아낸다.
<26>
<26>

<26>
<26>




- 5·18을 보여주는 문장: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사람’은 5·18 당시 자신의 책임을 끝내 부인한다. “26년 전 그날 양민을 학살할 것을 명령했나”라고 재차 묻지만 “나는 그날... 발포가 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어… 그건 그쪽의 일이었어”라고 말한다.

픽션이 아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월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어느 누가 총을 쏘라고 하겠어 국민에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라며 발포 책임을 부인했다. 이어 “대통령이 되려다 안 된 사람의 모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대체 그 때 광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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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4회 광주학살 (상)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을 무더기 연행함과 동시에 광주 주요 대학에 무장 공수부대를 진주시킨 뒤 5월18일 시위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 살상했고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80년 5월16일 밤까지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여는 등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을 무더기 연행함과 동시에 광주 주요 대학에 무장 공수부대를 진주시킨 뒤 5월18일 시위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 살상했고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80년 5월16일 밤까지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여는 등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월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 광주의 도청 앞 광장에는 시민과 학생이 참가한 ‘민족 민주화 성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는 마지막날 5만여명에 이르렀다. 5월17일 밤 김대중과 동교동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시각에 광주에는 특전사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배치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할 경우 광주에서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7일 밤 12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 공수부대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급습해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붙잡아 구타하고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했다.
 
신군부 ‘김대중 체포’ 저항 예상.. 5월17일 밤 공수부대 광주 투입..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 ‘충돌’
오후들어 제7공수 ‘무차별 살육’.. 현장 기자 “인간사냥이었다” 증언



19일 ‘화려한 휴가’ 끔찍한 만행.. 오후 시민들 투석저항에 ‘첫 발포’
“싸우다 죽자” 시민들 하나로 똘똘.. 20일 저녁 택시 200대 금남로 시위.. 수천 시민들 태극기 들고 도청으로

계엄사 ‘광주 소요 경미한 피해’ 발표.. 오락프로만 틀던 방송국들 불탔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 100여명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수는 곧 200~300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무장한 공수부대를 앞에 두고 “계엄군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돌격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곤봉에 머리를 맞은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흩어진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로 옮겨갔다. 정오 무렵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일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동경찰대가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모이기를 계속하며 금남로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터미널, 공용터미널 인근에서 계속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오후 4시를 전후해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투입되자 사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수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가슴과 배를 걷어찼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쓴 진압봉은 단단한 박달나무에 쇠심을 박은 길이 70㎝의 살상용 곤봉이었다. 전투경찰이 쓰던 길이 50㎝ 진압봉과는 질이 달랐다. 곤봉에 맞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공수대원들은 골목까지 쫓아가 숨어 있던 젊은이들을 개처럼 패고 죽은 개를 잡듯 끌고 가 군용트럭에 던져 넣었다.
 
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훗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상황을 증언했다. 시위 현장에서 사태를 목격한 시민 김시도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간 학생을 잡으려고 공수부대 2명이 양복점 안까지 쫓아갔다. 공수들은 그 학생의 멱살을 잡더니 다짜고짜 다리미를 빼앗아 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학생의 머리와 얼굴을 구분하지 않고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입만 벌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서 있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죽일 놈들아! 이놈들아!’ 하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살기가 오른 공수부대는 이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붙잡힌 학생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뛰어가 몸으로 학생을 막았다. 할아버지가 ‘이러지 말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공수부대는 엠(M)16 소총에 살상용 대검을 장착하고 있었다. 사람 잡는 칼이었다. 공수대원은 잡힌 학생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치고 대검으로 등을 찌른 뒤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시위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들은 더 끔찍하게 당했다. 백주에 대검으로 겁탈을 당하는 꼴이었다.
 
항쟁기간 중 시민군 상황실장이 된 박남선은 이날 본 것을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 놈들은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60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 놈들은 ‘이 ×××아, 너는 뭐야?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홧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홧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대로에서 벌어지는 만행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가.’ ‘우리 국군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국군의 짓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시민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했다. 거리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만행에 짓이겨지며 내지르는 희생자들의 비명과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울부짖는 시민들의 통곡이 대로와 골목에 흘러넘쳤다.

80년 5월20일 저녁, 사흘째 계속된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에 맞서 마침내 광주 시민 10만여명은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앞세우고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5월20일 저녁, 사흘째 계속된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에 맞서 마침내 광주 시민 10만여명은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앞세우고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광주 상황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 이런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가 ‘인간사냥’이었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같은 표현들이 떠올랐으나 이것 역시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뒤에 시민들에게 잡힌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에 배치되기 전 사흘 동안 식량을 받지 못했고,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 소주를 배급받았다고 실토했다. 공수부대는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공수부대의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진압훈련으로 살기등등해진 공수부대는 광주의 백주대로에서 사람을 때려잡아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공수부대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라도 새끼들 다 죽인다”, “씨를 말려버린다”고 고함치는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난행이었다. 공수부대는 보란 듯이 때리고 찌르고 짓밟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끔찍함에 몸서리쳤다.
 
공수부대의 곤봉과 대검이 휩쓸고 간 뒤 5시쯤 거리엔 핏자국만 남았다. 사람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학생을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장면을 보았던 김시도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너무나 분한 마음을 삼키며 전업사를 하고 있는 형님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고 뭣이고 다 던져버리고 우리도 나가서 싸웁시다.’ 그리하여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금남로로 걸어 나왔다. 나는 같은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만행을 보고도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녁 7시쯤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고, 공수부대가 나타나 시위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공수부대는 산수동과 풍향동 일대 주택가를 뒤지며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5월19일 오전 공수부대의 만행은 극에 이르렀다.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울먹일 정도였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호소했다. 금남로는 피에 굶주린 야수의 정글이 되었다. 누군가 건물 창문에서 공수부대를 바라보기만 해도 일대의 건물을 샅샅이 뒤져 사람을 잡아낸 뒤 금남로 바닥에 꿇어앉혔다.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면 곤봉으로 내리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트럭에 짐짝처럼 던졌다.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다 잡아 죽인다’, ‘내 새끼들을 공수부대가 다 죽인다’고 시민들은 절규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일부러 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으로 칠 때도 얼굴과 머리를 가격했다.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사람들을 패고 찌르며 묘한 웃음을 짓거나 서로 낄낄대기도 했다. 공수부대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과시하는 듯이 날뛰었다. 그 광란에 시민들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광주항쟁에 마지막까지 참여한 김종배는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그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공수부대들이 무차별 학살을 했기 때문에 수류탄이 아니라 폭탄이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도 갖고 공수부대들한테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몰았다. 점심때쯤 금남로 일대의 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부터 시위의 주력은 대학생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지 않으면 광주 시민들이 모두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거리를 뒤덮었다. 시위대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인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사판 자재와 집에서 쓰던 연장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맞섰다. 계엄군은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폭도’ ‘불순분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선무방송을 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모는 계엄군의 선무방송에 격노했다.
 
시민들은 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이 앞에서 싸우고 여자들은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뜨려 시위대에 전달하고 공사장의 인부들은 각목과 쇠막대를 실어다 날랐다. 목숨을 건 항쟁이었다. 시위군중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공수부대의 폭력은 더욱 극렬해졌다. 대검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19일 오후 5시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최초로 발포했다.
 
19일 저녁 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비를 피해 흩어졌다가 20일 아침 다시 모였다. 전남주조장 앞에서 참혹하게 찢긴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이날 오후가 되자 시 외곽의 시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금세 수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자 다시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의 공수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2시30분께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쏘아 그 자리에서 여러 명의 시민이 타 죽었다. 오후 3시 금남로 화니백화점 앞에서 시민 수천명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시위대는 “우리를 다 죽여라!”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하고 죽음을 작정한 절규를 쏟아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대자보는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 대인동의 사창가 여자들도 할 일을 찾아 뛰어나왔다. 피를 뽑아 헌혈하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행주는 이렇게 증언했다. “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종업원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광주 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오자 유동삼거리 쪽에서 대형 트럭과 버스를 앞세우고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켠 채 금남로로 밀려왔다. 차량시위는 전날의 택시기사 학살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19일 택시 한 대가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공수대원에게 걸렸다. 택시기사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병원으로 실어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자 공수대원은 택시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 대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날 적어도 세 명의 택시기사가 그렇게 살해당했다. 20일 밤 차량시위는 이 참혹한 만행에 대한 항의였다.
 
택시 200대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금남로의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자들은 김밥·주먹밥·음료수·수건을 가지고 나와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날 저녁 수천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 도청 앞 광장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광주는 피의 바다였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신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도시였다. 계엄사는 20일 오후 ‘광주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언급을 했지만, 이 발표도 광주 지역 방송에만 보도되었다. 이 발표는 18일·19일 소요로 경미한 피해가 있었으며 연행한 176명은 모두 귀가시켰다고 했다. 시민들은 보도에 분개해 문화방송국(MBC)과 한국방송국(KBS)으로 몰려갔다.
텔레비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락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었다. 문화방송국 앞에 시위대가 몰려들었을 때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어 사람들을 깔아뭉갰다. 어린아이 두 명이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게 죽었다. 이날 밤 문화방송국과 한국방송국이 불에 탔다. 11시30분 광주역 부근에서 제3공수여단이 시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 총소리가 도시의 밤하늘을 갈랐다. 시위대는 밤을 지새우며 공수부대와 싸웠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1980년 5월21일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이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5월26일까지 광주는 철저한 고립 속에도 시민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공동체를 이뤘다. 시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5월21일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에 맞서 무장을 시작했고 이날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그로부터 5월26일까지 광주는 철저한 고립 속에도 시민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질서를 유지하며 자치공동체를 이뤘다. 시 외곽으로 후퇴한 계엄군과 대치하다가 희생되거나 다친 환자들을 실어나르는 시민군 차량이 도청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5회 광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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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참상에 대한 보도를 막던 신군부는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를 내보냈다. 이 발표문에는 ‘광주 지역에 유포된 유언비어의 유형’도 들어 있었다. 대다수 신문이 발표 내용을 1면에 그대로 보도했다. 계엄사가 ‘유언비어’라고 내놓은 말들은 참혹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이 난다. 18일에는 40명이 죽었고 시내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아들딸들을 난자해버리고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게 한 후 장난질을 한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데모 군중의 머리를 무차별 구타해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학생들 50여명이 맞아 피를 흘리고 끌려 다니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하여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
 
1980년 5월21일 계엄사 발표문.. 실제 만행을 ‘유언비어’로 왜곡
30만 시위에 공수부대 철수 약속.. 오후들어 헬기 사격·집단 발포
시민들 인근 파출소 무기로 ‘무장’.. 저녁 시민군 도청 진입에 ‘함성’.. 22일 시민수습위 구성 ‘해방 자치’

외곽 후퇴한 공수부대 ‘학살’ 계속.. 끌려간 시민들 고문·학대도 ‘잔인’
 
25일 항쟁지도부 결성 ‘결사항전’.. 27일 재진입 계엄군 투항자도 사살 ..  “광주의 피와 한으로 이룬 민주주의”
 
대부분이 광주 시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신군부는 ‘유언비어 유형’을 미리 유포함으로써 공수부대의 만행을 고발하는 말들의 힘을 빼앗고 진실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이 민중봉기로 국가전복을 기도했다는 ‘김대중 중간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언론은 이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광주 시민들은 항쟁 기간 내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쳤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21일 오전 10시 3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광주 중심가로 운집했다. 전날 밤 최전방 20사단 병력이 서울을 출발해 21일 광주 지역의 공수부대와 합류했다. 광주는 2만명의 병력에 둘러싸였다.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 싸우지 않으면 이 무서운 고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꼈다. 30만 시민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하며 금남로를 채우고 도청을 에워쌌다. 한 도시의 시민 전체가 일어나 완전 무장한 군대와 맨몸으로 맞선 것은 현대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시위대는 아침부터 버스와 트럭을 이용해 시민들을 금남로로 실어 날랐다. 여자들은 동마다 통반 조직을 가동해 쌀을 거두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었다. 전 시민이 시위대를 성원하고 시위대와 일체가 됐다. 당시 시위에 참여해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았던 이세영은 이렇게 증언했다. “가는 곳마다 아주머니들이 힘내서 싸우라며 김밥과 주먹밥을 차에 올려주었다.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음료수와 빵을 던져주었다. 물수건으로 최루탄 가스에 뒤덮인 얼굴을 닦아주기도 했다. 시민들의 격려와 보살핌은 어느새 나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게 했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가슴은 뜨거워졌고 눈시울은 젖어 마침내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죽음마저도 각오했다. (…) 이것이 바로 운명공동체인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수십만명으로 불어나자 계엄사는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는 중에도 광주 일원의 상공에선 헬리콥터가 땅을 향해 기총사격을 했다. 도청의 공수부대는 시민들 몰래 실탄을 분배받았다. 12시가 넘어도 계엄군은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술렁거리며 차량을 앞세워 도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후 1시 공수부대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집단발포였다. 앞쪽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무더기로 쓰러졌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 피의 바다로 변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로 적어도 54명이 죽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비무장 시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박남선은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부대는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조차 사살해버렸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쏘아 죽였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시민들은 울부짖었다.
 
1시30분께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웃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돌진했다. 청년은 “광주 만세!”를 외쳤다. 공수부대의 총격과 동시에 청년의 몸이 고꾸라졌다. 전율이 시민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지나갔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나라의 군대가 시민을 학살하니 목숨을 지키려면 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는 무기고로 차를 몰아 가장 가까운 나주 지역 파출소에서 총과 실탄을 가져왔다. 다른 지역에서도 무기를 거두었다. 오후 3시께 시민들은 광주공원에서 총과 실탄을 분배했다. 시민군이 등장했다. 후에 계엄사는 시민군에게 들어간 총이 5400정이었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이 반격하자 공수부대는 서둘러 철수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도청에 진입했다. 함성과 통곡이 뒤엉켰다. 5월25일 시민군은 ‘왜 우리는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무장한 시민들은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냈지만, 광주의 해방은 외부와 단절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해방이었다. 시 외곽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봉쇄됐고 전화마저 두절돼 밖으로 소식을 알릴 수도 없었다.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인류학자 리나 루이스는 그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여기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른 곳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서울의 풀브라이트 담당관인 마크 피터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대대적인 도청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는 죽음으로 맞섰다. 도청을 재장악한 계엄군이 유혈이 낭자했던 도심 곳곳을 소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광주 시내에 재진입해 대대적인 도청 진압작전을 감행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는 죽음으로 맞섰다. 도청을 재장악한 계엄군이 유혈이 낭자했던 도심 곳곳을 소독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광주시 외곽으로 후퇴한 뒤에도 공수부대의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도청 앞뜰로 주인 없는 주검들이 끝없이 실려 왔다. 관이 부족했다. 시민군들은 외부에서 관을 가져오려고 소형버스를 타고 화순 방면으로 나갔다. 그 소형버스에는 시민군 5명, 여고생 2명, 여공 2명을 비롯해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 버스가 지원동을 지날 무렵 공수부대가 버스에 총탄을 퍼부었다. 조선대에서 철수해 그곳 야산에 주둔해 있던 부대였다. 현장에서 8명이 즉사하고 남자 2명이 중상, 여고생 1명이 경상을 입었다. 공수부대 장교는 리어카에 실려 온 중상자를 보고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공수부대의 학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4일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야산을 타고 철수하던 공수부대는 진월동 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놀란 아이들이 둑 너머로 달아나다가 그중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공수부대는 또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이유 없이 총질을 했다. 도망가던 중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걸 집으려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가 공수부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전재수의 몸에는 열 발도 넘는 총알이 박혔다. 공수부대는 송암동에서는 마을 주민들을 불러내 청년 세 명을 철로변으로 끌고 가 죽였다. 동네 하수구에 숨은 주부 박연옥을 발견하고는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엠16 소총을 갈겼다. 박연옥은 총알을 여섯 발이나 맞고 죽었다.

공수부대의 총칼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그것으로 죽음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당한 고문과 학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공수부대 장교들은 잡혀 온 사람들에게 “전라도 새끼 40만은 전부 없애버려도 끄떡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김대중의 지령을 받았다고 자백하라고 사람들을 고문하면서 “김대중이가 네 애비냐?” “김대중이가 밥 먹여주냐?” “김대중이가 빨갱이인 줄 몰랐냐?” 따위의 말들을 수도 없이 퍼부었다. 공수부대는 정권 탈취에 눈이 먼 신군부의 하수인이었다.

공수부대원 중에는 월남전에 참가했던 하사관들이 적지 않았다. 5월20일 전남대 강의실로 끌려간 강길조는 거기서 목격한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베트콩 여자 유방 40개 이상 자른 기념 칼이다’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면서 스포츠머리처럼 되었다.”

공수부대가 보인 잔인함은 인간성을 의심케 하는 것들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잡혀 온 사람들을 장난감 대하듯 짓이겨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가 공수대원들의 놀이였다. 잡혀 온 시민들을 트럭에 꽉 채워 넣은 뒤 차 안에 최루탄 분말을 뿌리고는, 사경을 헤매는 모습을 보며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22일 도청에서 종교지도자들이 포함된 시민수습위원회가 꾸려졌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특전사 지휘관들은 ‘폭도’를 소탕해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시민들은 22일 오후 모든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시신들을 도청 앞으로 옮겼다.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으깨어진 시신을 뒤지고 또 뒤졌다. 자식이나 남편의 주검을 확인한 여자들은 그 자리에 엎어져 오열했다. 이날 신군부 우두머리 전두환은 특전사 11여단장 최웅에게 ‘금일봉’ 100만원을 하사했다. 공수부대의 기세를 북돋우려는 것이었다.

도청에서는 수습파에 맞서 항쟁파가 형성되었다. 수습파는 더 큰 희생을 막으려면 총기를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엄군은 정해진 시간까지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탱크·장갑차·헬리콥터를 총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윤상원·박남선·김종배를 포함한 항쟁파는 광주시민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려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맞섰다. 시민을 학살한 살인마들에게 무조건 투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23일부터 도청 앞에서 열린 ‘민주수호를 위한 시민궐기대회’에서도 이 두 기류는 맞부딪쳤다. ‘더 큰 희생을 막느냐, 끝까지 싸우느냐.’ 어느 의견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22일부터 총기 회수가 시작돼 24일쯤에는 총 4000여정과 수류탄 1000여개를 거두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5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25일 저녁 도청에서 윤상원과 대학생 100여명이 중심이 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항쟁지도부)가 결성됐다. 목숨을 걸고 학살자들과 싸우겠다는 결사대였다. 26일 시민수습위원회 일동은 대변인인 신부 김성용을 통해 ‘추기경께 드리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저희는 계엄군에 의해서 짐승처럼 치욕과 학살을 당하고도 폭도요 난동분자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습니다. 저희 80만 광주시민의 피맺힌 한과 응어리진 아픔을 함께해 주십시오.” 26일 광주 대주교 윤공희는 대통령 최규하에게 편지를 보냈다.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명령 책임자를 엄중히 처단할 것을 약속하셔야 우선 급박한 현사태의 수습이 가능할 것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계엄당국은 27일 0시 이후 도청을 공격해 진압한다는 작전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26일 저녁 항쟁 지도부는 “최후까지 남을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알렸다. 시민군 500여명이 도청에 남았다. 윤상원은 이날 밤 이렇게 말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고등학생들이 남겠다고 했으나 윤상원은 “우리들이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해 내보냈다.

27일 새벽 4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일제사격을 했다. 도청의 시민군들이 금남로의 계엄군을 향해 응사하는 동안 3공수여단 특공대가 도청 뒷담을 넘어 건물로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는 총을 난사하고 방마다 수류탄을 던졌다. 시민군들은 눈앞에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특공대의 총과 수류탄에 죽어갔다. 시민군 8명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올리고 도청 앞뜰로 나왔지만 특공대는 투항자들을 모두 쏘아 죽였다. 한 특공대 병사는 한쪽 발로 시민군 포로를 군홧발로 밟은 채 사살하면서 “어때, 영화 구경 하는 것 같지” 하는 농담까지 던졌다. 살아남은 시민군은 굴비처럼 엮인 채 버스 넉 대에 실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날 진압작전에서 수백명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을 이끈 윤상원은 가슴에 총을 맞고 화염방사기로 까맣게 탄 주검으로 발견됐다. 도청을 점령한 계엄군은 학살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광주 시내를 소독했다. 짓밟힌 광주는 원한에 잠겼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5·18이 남긴 광주의 한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호남인들은 오직 말없이 김대중 지지를 통해 그 한을 풀고자 하였지만, 광주학살에 눈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그런 평화적인 선택에조차 경멸을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정치학자 최정운은 “5·18은 우리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며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를 대가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썼다.

계엄군이 철수한 5월31일 밤과 6월1일 새벽 사이에 금남로를 비롯한 시내 곳곳의 전신주에는 ‘살인마 전두환’이라고 쓴 붉은색 글씨가 나붙었다. 6월2일 전남매일신문은 5·18 관련 시리즈 ‘무등산은 알고 있다’를 내보냈고, 같은 날 시인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 민족의 십자가여!"를 실었다. 전남매일신문은 폐간당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맨 위 사진) 시민들은 22일부터 날마다 도청 앞 분수광장에 모여 항쟁 결의를 다지고 수습 대책을 토론했다.
‘김대중 석방’ ‘전두환 처단’ 등의 구호를 내건 팻말이 보인다.(가운데 사진)
 




 

2012-11-07

소아에서 노망으로 직행? - 남재희 2007-11-12

아무나 나이 든다고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소아처럼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노망으로 마무리를 하는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더라도 상당수는 나이 만 든 채 나이값 못하는 중늙은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삼송의 이거니씨, 현다이의 정멍구씨나 투산의 바굥송씨가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정리하고 돌아가서 그동안 했던 일로 심판받을 날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도 정신 못차리고 돈 다발 끌어안고, 다 큰 자식 보듬기에 팔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쪽이라는 찬사 들었던 사람 하나는 늘그막에 변절자가 되어 뭇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그만했으면 되었지 대체 무슨 영화를 더 보려고?



그나저나 그마저 챙기지 못한 장삼이사 노인들은 그저 밥이나 먹고 살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태산을 쌓습니다.

이제 자식에 노년을 기대는 사람은 팔불출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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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 깊어지는 고령화 시대



20대 때, 나이 마흔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한 어른은 적어도 수영장 물에 은밀히 방뇨를 한다든가,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한다든가,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친구의 섹시한 여자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준다든가, <뉴스위크> 밑에 <펜트하우스> 펼쳐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적어도 이런 짓은 안할 줄 알았다.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어 섰으니 물론 이런 짓은 안 한다. 소년적인 치기를 다 잃어버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짓은 해도 그런 짓은 못한다. 그런 짓 할 체력도, 마음의 공터도 없다.



그러면 나는 어른인가? 자문해 본다. 요상하다. 지금은 여기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냥 ‘40대’라고 하면 족할 것 같다. 아무래도 ‘어른’이라는 단어는 순진한 아동들 군기잡기 위해 만든, 애초에 명확한 지시 대상이 없는 허사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때 어른은 격정에 휘둘리고 방황에 지친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혼돈과 불안이 말끔히 가신 온전한 이성적 인간의 이미지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은 온전한 이성적 인간이 되겠다는 싸가지 없는 꿈은 안 꾼다. 공자 같은 성인도 40에야 겨우 방황을 종식하고(不惑), 10년을 바른생활 한 다음에 이게 팔자거니 운명을 받아들이고(知天命), 그렇게 하고도 정년퇴직 연령인 60이 되어서야 ‘화장실 간 사이 누가 씹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놓았다지 않는가? 공자보다 더 속세를 멀리 한 노자 선생도 나이 60이 넘어서야 육체의 휘둘림에서 자유로워졌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물 맑은 산천에서 유기농 식단을 접하면서 평생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들이 이럴진대, 아황산가스와 자동차 경적과 상품의 스펙터클에 모든 감각을 점령당한 채 ‘축적’과 ‘승진’을 위한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있는 범인들에게 인간적 성숙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사태라면 65살이 되어 ‘노인’으로 분류되는 그 순간에도 젓갈처럼 곰삭은 노년의 숙성은 기대난망이지 않을까? 숙성은커녕 곰팡이 슬어 상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완숙함’이란 올가미에 노인의 욕구는 감금됐듯, 사회복지 제안하는 뒤편에는 “삶의 패전처리 돈으로 하자”는 미봉책...그러다 보니...복지시설은 격리시설 되기 쉽다...



나이 든다는 것이 보장해 주는 것은 육체가 시든다는 것밖에 없다. 늙음은 생물학적 노화현상일 뿐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삶의 조건에 관한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서사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이 들어가는 것에 사회적 환타지를 투사해 노년을 삶의 완숙기로 설정한다. 이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재로 노인이란 존재는 쇠약한 육체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연장선에 있을 뿐인 존재다. 젊은 시절의 악덕과 미덕은 좀체 변하지 않으며, 쇠락한 신체는 악덕에만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알면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외면함으로써 노화의 공포를 잊으려는 심산일 게다. 사회가 노인에 부과한 완숙한 삶의 이미지는 이 지점에서 싹튼다. 완숙한 정신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퇴락한 육체를 시야 밖으로 감금시키기 위한 것.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노인의 정사 장면이 그토록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노년의 품위를 손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루한 육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노화의 물증을 지우고자하는 이 본능적 태도는 이윤추구 동기와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1인분의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의 존재는 노동 생산성을 쥐어짜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장애물이다. 여전히 ‘영점 몇’ 인분의 노동력이 있지만 노동력 제로의 존재로 폐기돼야 하는 운명이다. 경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비욕구 또한 없는 것으로 전제돼야 한다.(자식들이 안기는 선물에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이 노인의 배역이지 다이아몬든 반지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노인의 역할이 아니다. 노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조준하는 것은 그들의 소비욕구가 아니라 도리를 다 한다는 자식들의 자기만족이다.)



소비욕구가 없다는 것은 감각적 갈망이 없다는 것,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정신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노인은 육체를 거세당한 정신으로 박제돼 우리 삶의 원경으로 배치된다. 거세당한 ‘영점 몇 인분’의 인간적 욕구는 오로지 자식들과의 관계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된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노인은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10년 새 세배나 늘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혼자 사는 노인일수록 자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노인은 자연적 약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가족의 정서적 보살핌과 사회의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현세대 노인들은 가족에 의한 부양이 사회복지 제도로 대체되는 초입에서 그 어느 쪽 혜택도 못 받는 사람들이다.



전통적인 노후보험인 자식 양육은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들 노인의 자식은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면서 노인을 봉양하고 생활의 전 영역에서 무한경쟁 중인 자식의 ‘전비’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 삼중고를 안은 가장에게 문제는 돈이다. 가족은 아슬아슬 돈으로 봉합돼 있고 사소한 결핍에도 그 실밥은 터진다. 하지만 삼중 비용을 감당할 절대액수를 이미 확보한 사람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를 즐긴다. 이들에겐 노인 부양에 직접 적 노동 대신 돈을 투입한다는 것이 소비기회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가족 부양의 문화적 보험보다 정확하게 돈으로 환산되는 보험상품을 선호한다. 현재는 소수의 현실이지만 절대다수의 욕망이기도 한 ‘돈으로 해결되는 삶의 패전처리 비용’. 고령화를 염려하고 사회복지를 제안하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이 욕망이 배경음으로 깔려 있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는 ‘완숙함’이 노인의 개인적 욕구를 감금하듯 사회복지 시설이 사회격리 시설로 낙착될 공산이 크다.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 노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남재희 (문학평론가)

인연이란 야생초가 아니라 가꾸어야 되는 것 2007-10-30

인연이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자라는 야생초가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 난초와 같다고 합니다.



인연이라해서 마구 달리기 만 하다가는

그만 사고 나는 수도 있다 합니다.

갈 때 설 때 구분하는 제 정신이 있어야

인연도 모름지기 올곧은 인연이 되는가 합니다.



좁은 생각에 높은 하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니

그저 삼가며 살려 합니다.



평화는 사람들 마음 속에서 부터 시작되야 겠지요.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듯이 말입니다.



가을엔 이런 편지를 부치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받아 주시기를...









(작화: 이철수 화백)

한글, 정말 감사한 자랑스런 유산 2007-10-09

컴퓨터 자판을 쓰면서 느끼는 불편에 투덜대다가, 왜 한글은 이렇게 타자하는 데 번거로운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못된 자식이 부모 탓한다고 " 이왕 만드실 거, 세종대왕께서도, 타자하기 편하게 좀 해주셨으면 좋았을 걸"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돌아서면 그 이유가 어른의 잘못이 아니라, 게으른 후손의 탓임을 곧 알게 됩니다. 남들 부지런히 암호해독하고, 연산 공부해서 컴퓨터 발명할 때, 늑장 부리다가 그 컴퓨터란 기기를 결국 구미의 IBM 같은 회사가 독점적으로 만들게 놔두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타자기 발명에 손을 놓았던 것도 후손의 죄라면 죄지요. 그러고보면 한글이 타자에 불편한 것은 어른의 탓이 아니라, 조상의 지혜를 계승해서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 우리 탓이란 생각에 가슴이 무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손전화기의 문자 입력 방식인 "천지인" 방식에서 한글모음의 우수성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음 "ㅣ"와 'ㅡ" 둘에 다가, 점"."을 이러 저리 가져다 붙쳐 만들어가는 독창성과 편리성 말입니다.

게다가 네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초성입력이라는 방식을 사용중입니다. 즉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홍..."이렇게 입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ㅎㄱㄷ"을 입력하여 검색을 하는 게지요. 물론 아직은 초기 단계라 개선할 점이 있어 보이지만, 어쨌던 한글의 기계화 가능성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글 창제 당시부터 심사숙고하신 어른들의 흉중을 이제사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옛 모습 그대로라도 해도...1만 5천자에 가까운 한자를 입력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사는 중국이나, 요상한 글자체에 휘둘리는 일본 만 보아도 그저 간편한 입력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휴일에서 조차 제외시킨 한글날을 보내며 사뭇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한 줄이라도 글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늦게나마 고맙고 귀한 유산을 물려주신 어른들께 존경을 꼭 표하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위한 각오를 새로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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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문자는?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유네스코는 말뿐인 언어 2900여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연구를 했는데, 여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문자는?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어떤 문자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나?



지구상 100여개의 문자 가운데 제작자 그리고 제작 원리와 이념이 정리되어 있는 유일한 문자는?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일본의 오사카시는 엑스포 기념 세계민족박물관을 지어 세계의 문자를 전시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문자는?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대학이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는?



컴퓨터 자판에서 모음은 오른손으로, 자음은 왼손으로 칠 수 있는 유일한 문자는?



이동전화의 한정된 자판을 가장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디지털시대의 총아로 떠오를 문자는?



발음기관의 움직임과 작용, 음성학적 특질을 본떠 만들었으며, 음양오행의 철학적 원리와 하늘·땅·사람의 존재론적 구조를 담고 있는 문자는?



<대지〉의 작가 펄 벅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평가했고,

〈알파베타〉의 저자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말한 문자는?



언어학자 라이샤워 교수가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제”라고, 시카고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10월9일이면 꼭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낸다”며 존경심을 털어놓은 문자는?



영국 리스대학교의 제프리 샘슨 교수가, 기본글자에 획을 더해 동일 계열의 글자(ㄱ, ㄲ, ㅋ)를 만든 독창성은 어떤 문자에서도 볼 수 없다고 칭송한 문자는?



그런데,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르는 문자는?



답: 한글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목사야 있건 없건 교회가 무슨 상관? 2007-09-27

이제는 제사 때에도 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여 일을 치루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에도 이런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집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건만...그렇습니다. 따지지 않아서 이 문제가 줄곧 우리 곁을 맴도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곰곰히 따져볼 만합니다.





다행히도... 절을 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을 조상은덕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 폄하하거나, 반대로 절을 하지 않고 앉아 버티는 사람들은 제사를 우상숭배의 표상이라며 백안시했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게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빙탄불상용처럼 전통적 제의의식을 놓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것이 후진적 상황이란 것을 절감하고 소위 "전도"에 나선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하기사 2천여년전, 국가정체성 확립의 절박함과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나라의 문화양식이 배어있는 유대 기독교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고집하는 것도 우습고, 국적 불분명하고, 지방마다 제각각으로 변형된 유교적 제사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도 시대 착오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당분간은 서로의 태도를 존중하고 다만 조상에 대한 경의와 일가 권속의 인연에 감사하는 화합의 자리로 제사가 유지되었으면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른바 근본주의 신앙이란게 상당히 부실하고 왜곡된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도 많아 질 것이고, 이 나라의 제사 의례가 중국식 전통의 답습이나 무지한 조상숭배로 전락해서는 안되는 깊은 연유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아지리라 봅니다. 그 때까지는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관용과 대화의 연습장으로 제사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집안을 살피면, 외국인 부부 한 두 집 없는 집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이 대세인 것도 지금입니다.



사람 모여 나누고 살자는 게 제의라면, 그 자리에서 화목에 걸그적 거리는 것, 바로 그것이 비례입니다. 절, 그것 신경쓰지 않으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목사없는 교회, 스님없는 절이 생겨 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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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없는 새길교회 이야기



새길교회 사람들. 목사없이 교회없이 교단없이, 한국 기독교 ‘새길’ 찾아서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이 ‘정신 나간 운전사에 조는 승객들로 가득 찬 버스와도 같다’며 혀를 차는 한 권사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아직도 분단신학에 젖어 ‘레드 콤플렉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이 아무개 목사의 설교가 미치게 하지만 그래도 교회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자신 같은 멀쩡한 평신도가 있어야 목사도 언젠가는 구원받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구미정 대구대 필휴먼생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 기독교 교리 자체가 갖고 있는 독선과 배타성이 자리잡고 있다.”(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실장)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문화·전통종교와 대화하고 협력하고 상호 배움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120년 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진실과 사랑을 담아 지켜왔고, 살아왔던 가치들과 사람들을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매도하는 집단이기주의로 어떻게 이 땅에서 사랑 받기를 기대한단 말인가.”(김경재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교회가 세상 가치에 노예화되었고, 교회가 세상 방식에 예속화되었다.”(박정신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성직자·평신도 위계 없애고, 소유욕 없애려 건물 안짓고, 교권 얽매이지 않으려 무소속

한완상 총재 등 말씀 증거. 인권·민주화운동 핍박받는 자에 헌금의 무려 65% ‘선교의 봉사’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강남청소년수련관 강당. 새길교회 창립 18돌 기념으로 마련된 ‘한국 기독교,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정기포럼이었다. 새길교회는 예배당이 따로 없고, 주일엔 이곳을 빌려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주일인 이날 이곳은 교회다. 교회 안 발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발제자들은 한국 교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새길교회 교인을 비롯한 200여 명의 방청객들이 가세한 토론까지 3시간 넘게 팽팽한 긴장감과 열기가 함께했다.



새길교회는 3가지가 없는 교회다. 목사가 없고, 교회 건물이 없고, 교단이 없다. 목사를 두지 않는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교회 건물을 가지지 않은 것은 소유와 욕망을 놓겠다는 의지다.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것은 교권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장로나 집사도 없이 사무실에 상근 간사 한 명만이 있는 이 교회에선 운영위원회가 운영을 맡는다. 설교를 하는 ‘말씀 증거자’는 1987년 이 교회 설립을 주도했던 한완상 대한적십자사총재와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비롯해 최만자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권진관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차옥숭 한일장신대 교수다. 한 명 한 명이 기독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닌 인물들이다.



길 교수는 이사장을, 최만자씨가 원장을 맡고 있다. 길 교수는 올 초 벨지움으로 교환교수로 떠났지만 교회 운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교회는 한두 사람이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180여명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새길교회는 헌금의 무려 65%를 선교와 봉사에 사용한다. 이곳의 선교란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그런 식이 아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탄압받고 고생하는 이들을 돕는 일의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선교라고 믿고 있다. 한 달에 한번씩은 교인 30~40명이 외국인노동자들을 찾아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매년 봄 여름 신학강좌를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등 수준 높은 강좌를 해온 새길교회는 4월 3일부터 10주 동안 일요일마다 ‘현대사회의 예수 찾기’ 강좌를 펼친다. 비록 빌린 강당이지만 교인들의 눈엔 드디어 길을 찾았다는 자족감이 감돌고 있다.



조연현 기자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20/2005/03/009100020200503091827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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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광성교회 정성진목사



목사 한사람 자기포기 선언 민주적 목회철학 몸소 개척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4동 밤가시마을. 국립 암센터에서 1㎞ 정도 떨어진 큰 길가에 일산 광성교회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주택가로 200미터쯤 들어가면 정성진 목사(50)의 사무실이 있다.



‘我死敎會生’(아사교회생)



‘교회가 살려면 목사가 죽어야 한다’는 편액이 눈에 띈다. 1997년 이 교회를 설립할 때부터 작정한 자기포기선언이다.



그는 대형교회인 광성교회 출신이다. 봉천제일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92년 광성교회로 옮긴 그는 4년 동안 김창인 담임목사의 개인비서를 했다. 광성교회는 서울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이고, 김 목사는 그런 교회를 설립해 키워낼 만큼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 그러나 많은 대형교회들처럼 담임 목사 1인 중심의 리더십의 그늘 또한 짙었다.



목사·장로 65살 정년제, 대소사는 모든신도가 모여 결정

50여개 강좌 비신도에게 개방, 3분내 발언등 민주적 회의 방식

무료병원 대안학교등 갖춘 새 보금자리위해 매일 기도



속담에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 목사는 ‘모시던’ 김 목사의 본받을 점과 극복해야 할 점을 분명히했다. 김 목사의 역동적인 설교와 일에 대한 열정, 의리는 본받으러 애썼다. 하지만 독재적 리더십은 단절하리라 다짐했다.

그는 김 목사의 도움으로 일산 광성교회를 개척했지만 서울 광성교회와는 다른 목회철학으로 내세웠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조화 △민주의식의 완성 등이다.

그는 목사 정년도 교단 정년보다도 5년 앞당겨 65살이 되면 목사는 교회를 완전히 떠나도록 했다. 장로의 65살 은퇴 규정도 만들었다. 권한 집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재직회도 장로, 권사, 집사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참석하도록 예배 중에 한다.



특히 그는 아예 재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한 달에 280만원의 월급과 60만원의 활동비만을 받는다. 그 외엔 상여금도 차량 유지비도 없다. 반면 정 목사 부부는 매달 200여만 원씩을 교회에 헌금한다. 그는 세미나와 강의료 수입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일산광성교회는 파주노인복지관을 잘 운영하고, 무려 50여개의 강좌를 비신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신자들이 등산, 농구, 탁구, 바둑 등 11개의 동아리별로 모여 즐기는 것도 독특하지만 이 교회만의 특징은 민주적인 방식이다.

회의 때 이 교회만의 금지규정이 있다.

△3분 이상 발언 △인신공격성 발언 △거듭 발언 △3회 이상의 찬반 토론(다음은 표결하든지 폐기) △안건을 상정자의 발언이다.



이 교회는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지금 새 교회를 신축중이다. 일산 외곽의 무려 3500여 평에 짓고 있다. 이곳엔 무료 병원과 무료 약국뿐 아니라 미용실, 양재실, 제과제빵실, 헬스시설, 대안학교까지 갖춘다. 건축비는 250억원. 100억원의 빚이 남을 예정이지만 그는 걱정이 없다고 한다. “내 것이면 걱정에 잠이 안 오겠지만, 내 것이 아니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집을 판 돈 1억5천만 원을 교회 헌금으로 내놓았다. 그는 ‘무소유’는 법정 스님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좀 더 행복하고 평안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1인의 자기 포기로 교회는 풍성해지고, 목사는 더욱 자유스럽다.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2007-09-08

천년 만년 살 것 같아도,

이 비 그치고 나면 가을 한 걸음 다가설 것입니다.

그렇게 막은 가까워 집니다.

참, 인생 뭐 그리 대단한 것 없습니다.



삼순이가 되었던,

이거니가 되었던

똑같이 오늘도 먹고, 싸고,

그리고 피곤한 몸을 눕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소가 반성으로

반성이 성찰로 바뀌고

그런 우스운 삶에서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되면

이풍진 세상 한번 살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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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박홍규(영남대 교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비판과 성찰에서 자유의 웃음을 보다.



절대진리 부정한 회의주의자, 몽테뉴의 '에세' 40년 함께하며

마음에 닿은 '내 이야기' 에 새롭게 겹쳐쓴 또다른 '에세'.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문고본 시리즈 이름은 ‘크세주’다. ‘크세주’ 문고는 1941년 첫 출간 이래 지금까지 3600종이 나온 이 나라 최대의 문고본이다. 간결한 3형식의 프랑스어 의문문인 이 문고본 이름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인데, 이 질문의 지성사적 뿌리는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에게 닿아 있다. 근대 프랑스의 문학과 사상의 비조로 꼽히는 몽테뉴는 평생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반성적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 몽테뉴가 남긴 대표작이 우리에게 ‘수상록’이란 번역어로 알려진 <에세>다. 1572년 공적 생활에서 스스로 은퇴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집필한 방대한 저작이 이 책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외진 마을 몽테뉴 성의 좁다란 3층 서재에서 정치·사회·문화·종교 따위 세상의 온갖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음미할 때 그가 사유의 원칙으로 삼은 것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였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쓴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는 이 르네상스 지식인의 삶이 통째로 스며 있는 저작을 마치 산책하듯 읽으며 쓴 책이다.



중학교 시절 처음 이 책을 접한 뒤 40년 동안 여러 번 통독했다는 지은이는 <에세>의 수많은 문단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을 살펴 읽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포개 놓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에세’이며, <에세>위에 겹쳐쓴 ‘에세’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에세’라는 말은 ‘가벼운 수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말의 본디 뜻은 ‘시도’ 또는 ‘시론’으로 옮겨진다. 이 세계와 자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론의 형식으로 풀어놓은 것인 셈이다.



지은이는 몽테뉴의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웃음’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몽테뉴는 웃는다. 세상에 대해 웃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웃는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쓴 맛이 감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크세주’의 정신에 따라 회의주의자의 자세로 이 세상과 마주본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들춰보는 것이다. 그 비판성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면 성찰성이 된다. 그는 자신이 독단에 빠지지 않는지 끊임없이 돌아본다. 그런 자기비판의 자세로 들여다본 그 자신은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인 것이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 자신의 모습이다. 지은이는 몽테뉴의 이 고백을 읽으며, “바로 내 이야기다”라고 덧붙인다.



<에세> 속에서 몽테뉴는 그 비판성과 성찰성으로 “당대의 모든 지적 권위를 부정한 자유로운 지성”으로 나타난다. 그 ‘자유로운 지성’이 어느 정도 선구적이었는지는 그가 유럽인의 식민지 침략을 비판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한 데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그는 근대 유럽 최초로 서양중심주의에 반대한 문화상대주의자였다. 일본의 작가 홋타 요시에는 몽테뉴 전기에서 이런 모습을 높이 사 그를 ‘위대한 교양인’이라고 불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4/10/009100003200410151759408.html

노블레스 오블리제: 누가 진정 나를 위해 애쓰고 있는가? 2007-05-08

어디 누구에게든 전화를 받을 수 있고, 걸 수 있습니다. 손에 작은 요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맘 만 먹으면 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서 수십가지 신문을 읽고 스크랩해 둘 수 있습니다. 하늘에 대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대답도 걸지게 돌아 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추운 걱정, 여름이라 더운 걱정하지 않고 저녁 무렵 느긋히 밥상을 치우고 여유있게 앉아 텔레비젼을 봅니다. 걱정은 늘어가는 뱃살 뿐인가 합니다.





이런 사정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요즘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800만의 사람들이 정부가 정한 생계비에 미치지 못해 하루 하루를 죽지 못해 삽니다. 그보다 조금 낫다해서 차상위 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별반 사정은 나을 것이 없지만 그들은 알량한 생계비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합니다.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의 숫자가 1,500만 명에 달합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주택보급율이 100%가 넘어 가구당 한 집 이상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나라에는 자기 집이 없어 세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45%입니다. 몇억 씩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셋집에 사는 사람을 포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 셋집에 사는 사람들이 나라 전체 가구의 절반에 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손전화, 자동차, 인터넷이 모두가 누리는 안락함이 아니란 게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십억 넘는 집에서 또 다른 집 한 채를 꿈꾸며, 뱃살을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안락할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왜나햐면, 갈곳 없어진 이들은 당연히 어딘가 양지를 찾아 주의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러를 막는 것은 무기와 위협이 아니라 진정한 나눔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설쳐대는 대 테러리스트 부시나 블레어는 이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짐했던 평안한 세계는 결코 군대의 총구로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 불만과 위화감에 찌들린 다른 한 쪽의 사람들이 춥고 배고프게 살고 있는 한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란 없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건너편에 구룡마을이 존재 하는 한, 아무리 경비업체가 안전을 과장한다 한들 타워 팰리스 부자들로서는 평안한 밤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지요. 몇겹의 경비 초소를 거치는 동안 배달시킨 짜장면이 불어터져 불만이라며, 한편으로 그래서 안심하고 산다던 그들이 언제인가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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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가졌으면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그만 깔아 뭉개라.



사망자가 천여명에 부상자가 오백여명을 육박하는 이라크의 대 참사 현장사진이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참으로 기막히고 가슴 아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였을까, 그는. 자살공격 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그는. 그리고 그는 알았을까. 그의 말 한마디가 그리도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줄을. 아마 몰랐으니까 외쳤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알고도 그랬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긍극적으로 죄는 그에게 있는게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결국 죄는 전쟁에 있음을.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 전쟁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기뿐 아니라 공포가 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말하기도 끔찍한 ‘압살’에 얽힌 이야기를 나는 최초로 아버지한테 들었다. 서울로 돈 벌러간 아버지는 명절에 집에 오면 언제나, 그 이야기를 했다. 고향에 오기 위해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서울 기차역에서 압사당할 뻔한 이야기. 나도 언젠가 우리 아버지처럼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추석을 맞아 시골집에 가려다가 터미널에서 압사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명절만큼은 고향의 부모 형제 처자식 곁에서 쇠리라, 하는 굳은 각오로 드디어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얼마나 가슴 졸이고 그리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처럼 가족 곁에서 명절을 쇠야만 한다는 굳은 각오가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압사당할뻔한 터미널을 엉엉 울면서 빠져 나와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단순히 고향에 못가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악착같은 삶의 의지는 때로 또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압사에의 공포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거였다. 가난해서 오는 무질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한쪽으로 우르르 달려나간다. 살기 위해 달려간 그 길 위에서 그러나 누군가는 밟혀 죽는다. 대부분 힘없는 사람들이다. 안전지대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민중들은 죽음에의 공포로 인해서 무질서할 수밖에 없으며 그 무질서가 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가난한 그들을 위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우대의 관습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위태한 삶이 언제든지 ‘압사’당할 수도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 앞에 그래도 어떡하든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느다란 희망 하나 붙잡고 사는 가난한 작가인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통곡할 수밖 없다. 터미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주인 잃은 신발들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이라크의 참사 앞에서 또다시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압사당할 수도 있는 현실은 그러나 이라크에만 있는게 아니다. 한 시대 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시대에 ‘누군가’가 외치는 한마디에 또 ‘누군가들’은 순식간에 그 삶이 천길 낭떠러지로 내몰릴 수도 있음을 그 ‘누군가’는 아는가.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군가들은 또 누구들인가. 내게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에 시비거는 사람들이다. 또 당연히 누군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의 방(집) 한칸’을 구하지 못해 그 삶이 때로는 죽음의 공포까지를 늘 동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집없는 사람들이다. 집없는 사람들은, 혹은 은행에서 돈 빌려 겨우겨우 내집이라고 장만해놓고 하루하루 그 은행빚 갚느라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때로는 물어뜯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언론,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부자신문들이 외치는 소리에 겁먹는 자신들의 정부에 또다시 공포를 느낀다. 희망이 꺼져가는 공포, 이윽고 닥쳐올 불안한 삶이 필시 가져다 줄 혼란에의 공포.



그러나 언제나,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또 언제나 부자들 편을 들고 있는 부자신문들은 집이 없거나 빚으로 산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게 해주고자 하는 정책이 발표되면 혹은 발표될 낌새가 보이기라도 하면 ‘국민적 혼란’을 들먹인다. 나는 그들이 국민적 혼란 운운하면 그 말속에서 ‘숨겨진 회심의 미소’을 본다. 국민적 혼란이라는 명백히 실체가 없는 혼란을 혼란이라고 기정사실화 시켜놓고 돌아서는 그들의 뒤에서 결국 그 생이 압사당하는 것은 언제나 집이 없거나 집이 있어도 그 집 때문에 인고의 세월을 살아내야하는 슬픈 사람들이다.



이라크 정부는 자살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범인에 대한 추적에 착수했다고 한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들 삶이 왜 이다지도 힘들어야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 힘들게 한 ‘범인’은 누구인가. 이라크에서의 범인은 다름아닌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면, 지금 이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먹고 입는 것 넘쳐 나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도시서민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명백히 집문제다. 누구에게는 집이 휴식과 안락과 풍요와 부를 주지만 누구에게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니, 정부의 그나마도 ‘잔뜩 주눅든 정책 발표’에 대해 ‘선의의 피해자’니 하는 말따위 그렇게 함부로 할 것이 못된다.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의의 피해자 너머에는 당신들의 그 한마디에 집 문제로 생 자체가 압사당할 것 같은 공포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1.6%에 왕따를 가했다’란 말 따위 그렇게 함부로 외치는 게 아니다. 알고도 그런다면 당신들은 1.6%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땅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더욱더 가난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공선옥/소설가

다시 읽는 접시꽃 당신...도종환 2004-08-18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마음을 못잊는 분을 위해 시 몇 편을 되새깁니다.

사람 사랑에 서툴렀던 못난 이들 대신 고개를 조아리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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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을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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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편지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 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이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 자리로 바람이 가득가

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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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 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림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

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 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

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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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난 뒤로는



당신이 떠난 뒤로는

빗줄기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내리고

밤별도 당신으로 인해 머리 위를 떠 흐르고

풀벌레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와 울었다



당신 때문에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지고

당신 때문에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눕고

당신 때문에 가을 빗발이 눈자위에 젖고

당신 때문에 눈발이 치고 겨울이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남은 자의 편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 속살대지만

나 하나는 당신 편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이 세상 많은 이를 남기고 당신 홀로 떠난 뒤론

새 한 마리 내게는 예사로이 날지 않고

구름 한 덩이 예사로이 하늘 질러 가지 않고

바람 한 줄기 내게는 그냥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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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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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 꼭 살아 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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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

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

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

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

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

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

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

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

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

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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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앞에서... 눈을 뜨고 기도하라 (문한별) 2005-11-03

일요일이면 이 땅의 곳곳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넘칩니다.

눈을 감은 채...



그러나 세상 곳곳에는 오늘도 전투가 계속 중이고

피가 튑니다.



그 중에 한 곳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의 기도 제목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라크.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르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뽑았던 지도자는 신이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들렀다고도 했습니다.



철모르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과연 어떤 곳에

무엇을 하러 와 있는지도 잊은 채

박수를 쳐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쾡한 눈자위에 번져났습니다.



누가 저들에게 총을 쥐어 주는가?



저녁 마련 들어서는

내 아이의 어깨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정말 못된 부모가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라크에 내 자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밥은 어쩐지 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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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기도하라



당신은 기도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무고한 주검들이 나뒹구는데

눈감고 기도할 마음이 나는가?



당신은 찬양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비명소리 하늘을 찌르는데

화음맞춰 찬양할 마음이 나는가?



야만의 시대에

눈 감고 기도하는 건 비겁이다. 기만이다.



불의한 시대에

화음으로 찬양하는 건 동조다. 묵인이다.



그대여, 기도하려거든

차라리 눈을 떠라.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대여 찬양하려거든

차라리 외론 목소리로 진혼가를 불러라.

저기 당신의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문한별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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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똑바로 보라



악의 평범성.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내뱉은 말이다. “아이히만의 과거 행적들은 소름끼쳤다. 그러나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실존 인물로서의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할 뿐 악마 같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다.” 재판관들은 악행의 근본 동기들을 찾으려 했지만, 아이히만에게는 악의적 동기도, 이데올로기적 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여기 하나가 죽은 척하고 있네.” 팔루자의 한 건물을 뒤지던 미 해병대 병사는 총을 쏴 그를 죽이기 전에 그렇게 태연하게 말했다. ‘세상에서 인간이 목격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장면.’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사살된 사람이 그 직전까지 군인이었는지, 테러리스트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죽은 척하던 순간 그는 살고 싶은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총을 쏜 병사도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우리는 그의 선한 품성과 어려운 생계에 대해 듣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번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세계를 경악게 했던 포즈의 주인공 린다 잉글랜드 이병. 그는 시골 마을의 가난한 철도 노동자의 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우등 졸업자였고, 월마트에서는 모범직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미군에 입대한 것은 오로지 대학 진학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악마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악행은 ‘생각하지 않음’에서 나온다. 악한 생각이나 악한 판단을 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없고 판단이 없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쟁터의 병사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가장 추악한 범죄자는 또한 가장 불쌍한 범죄자인 것을.



“불태워버려, 불태워버려, ××놈, 불태워버려.” 무어의 〈화씨 9/11〉에서 보듯, 병사들은 온갖 저주를 담은 메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거기에 몰입하며 진격한다. 그 병사들 뒤에는 누가 있는가. 팔루자로 진격하던 해병대의 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우리를 공격한 적은 악마들이며 그들은 팔루자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누가 있는가. 신앙과 이권을 접목시킨 대통령. 그는 세계에 자신들이 박멸해야 할 악이 존재한다고 외쳐댄다.



나는 눈감고 기도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들은 현실을 보지 않고 헛것을 보기 때문이다. 팔루자부터 백악관, 아니 한반도를 포함해서 세계 곳곳의 전쟁광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빼앗는 동시에 시선을 빼앗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려는 자가 악마로 보일 때까지 눈감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전쟁을 비디오게임이나 컴퓨터 오락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만큼이나 헛것을 보게 된다.



이라크전이 터졌을 때 13살의 소녀 샬럿 앨더브론은 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을 보라는 말로 반전 메시지를 전했다.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릿속에는 제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이건 액션영화도, 공상영화도, 비디오게임도 아닙니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놀라게 한 악마성이란 바로 그런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광들은 겁쟁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겁쟁이들만이 전쟁으로 이권을 챙기는 사기꾼들에게 놀아난다. 테러에 대한 공포, 악에 대한 공포로 주눅 들었을 때 사람들은 전쟁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공포로 한없이 웅크러들 때 내 안에서 악마가 자라난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파시스트들은 겁쟁이들이며, 겁쟁이들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땀내는 몰라도 악취는 없기를... (이철수) 2005-02-07


살아보면...

욕심줄이고 사는 동안 만 사람입니다.

딴 생각하고 계산 많아지면 사람 아니더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