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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소아에서 노망으로 직행? - 남재희 2007-11-12

아무나 나이 든다고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소아처럼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노망으로 마무리를 하는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더라도 상당수는 나이 만 든 채 나이값 못하는 중늙은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삼송의 이거니씨, 현다이의 정멍구씨나 투산의 바굥송씨가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정리하고 돌아가서 그동안 했던 일로 심판받을 날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도 정신 못차리고 돈 다발 끌어안고, 다 큰 자식 보듬기에 팔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쪽이라는 찬사 들었던 사람 하나는 늘그막에 변절자가 되어 뭇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그만했으면 되었지 대체 무슨 영화를 더 보려고?



그나저나 그마저 챙기지 못한 장삼이사 노인들은 그저 밥이나 먹고 살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태산을 쌓습니다.

이제 자식에 노년을 기대는 사람은 팔불출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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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 깊어지는 고령화 시대



20대 때, 나이 마흔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한 어른은 적어도 수영장 물에 은밀히 방뇨를 한다든가,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한다든가,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친구의 섹시한 여자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준다든가, <뉴스위크> 밑에 <펜트하우스> 펼쳐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적어도 이런 짓은 안할 줄 알았다.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어 섰으니 물론 이런 짓은 안 한다. 소년적인 치기를 다 잃어버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짓은 해도 그런 짓은 못한다. 그런 짓 할 체력도, 마음의 공터도 없다.



그러면 나는 어른인가? 자문해 본다. 요상하다. 지금은 여기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냥 ‘40대’라고 하면 족할 것 같다. 아무래도 ‘어른’이라는 단어는 순진한 아동들 군기잡기 위해 만든, 애초에 명확한 지시 대상이 없는 허사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때 어른은 격정에 휘둘리고 방황에 지친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혼돈과 불안이 말끔히 가신 온전한 이성적 인간의 이미지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은 온전한 이성적 인간이 되겠다는 싸가지 없는 꿈은 안 꾼다. 공자 같은 성인도 40에야 겨우 방황을 종식하고(不惑), 10년을 바른생활 한 다음에 이게 팔자거니 운명을 받아들이고(知天命), 그렇게 하고도 정년퇴직 연령인 60이 되어서야 ‘화장실 간 사이 누가 씹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놓았다지 않는가? 공자보다 더 속세를 멀리 한 노자 선생도 나이 60이 넘어서야 육체의 휘둘림에서 자유로워졌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물 맑은 산천에서 유기농 식단을 접하면서 평생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들이 이럴진대, 아황산가스와 자동차 경적과 상품의 스펙터클에 모든 감각을 점령당한 채 ‘축적’과 ‘승진’을 위한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있는 범인들에게 인간적 성숙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사태라면 65살이 되어 ‘노인’으로 분류되는 그 순간에도 젓갈처럼 곰삭은 노년의 숙성은 기대난망이지 않을까? 숙성은커녕 곰팡이 슬어 상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완숙함’이란 올가미에 노인의 욕구는 감금됐듯, 사회복지 제안하는 뒤편에는 “삶의 패전처리 돈으로 하자”는 미봉책...그러다 보니...복지시설은 격리시설 되기 쉽다...



나이 든다는 것이 보장해 주는 것은 육체가 시든다는 것밖에 없다. 늙음은 생물학적 노화현상일 뿐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삶의 조건에 관한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서사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이 들어가는 것에 사회적 환타지를 투사해 노년을 삶의 완숙기로 설정한다. 이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재로 노인이란 존재는 쇠약한 육체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연장선에 있을 뿐인 존재다. 젊은 시절의 악덕과 미덕은 좀체 변하지 않으며, 쇠락한 신체는 악덕에만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알면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외면함으로써 노화의 공포를 잊으려는 심산일 게다. 사회가 노인에 부과한 완숙한 삶의 이미지는 이 지점에서 싹튼다. 완숙한 정신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퇴락한 육체를 시야 밖으로 감금시키기 위한 것.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노인의 정사 장면이 그토록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노년의 품위를 손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루한 육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노화의 물증을 지우고자하는 이 본능적 태도는 이윤추구 동기와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1인분의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의 존재는 노동 생산성을 쥐어짜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장애물이다. 여전히 ‘영점 몇’ 인분의 노동력이 있지만 노동력 제로의 존재로 폐기돼야 하는 운명이다. 경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비욕구 또한 없는 것으로 전제돼야 한다.(자식들이 안기는 선물에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이 노인의 배역이지 다이아몬든 반지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노인의 역할이 아니다. 노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조준하는 것은 그들의 소비욕구가 아니라 도리를 다 한다는 자식들의 자기만족이다.)



소비욕구가 없다는 것은 감각적 갈망이 없다는 것,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정신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노인은 육체를 거세당한 정신으로 박제돼 우리 삶의 원경으로 배치된다. 거세당한 ‘영점 몇 인분’의 인간적 욕구는 오로지 자식들과의 관계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된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노인은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10년 새 세배나 늘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혼자 사는 노인일수록 자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노인은 자연적 약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가족의 정서적 보살핌과 사회의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현세대 노인들은 가족에 의한 부양이 사회복지 제도로 대체되는 초입에서 그 어느 쪽 혜택도 못 받는 사람들이다.



전통적인 노후보험인 자식 양육은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들 노인의 자식은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면서 노인을 봉양하고 생활의 전 영역에서 무한경쟁 중인 자식의 ‘전비’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 삼중고를 안은 가장에게 문제는 돈이다. 가족은 아슬아슬 돈으로 봉합돼 있고 사소한 결핍에도 그 실밥은 터진다. 하지만 삼중 비용을 감당할 절대액수를 이미 확보한 사람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를 즐긴다. 이들에겐 노인 부양에 직접 적 노동 대신 돈을 투입한다는 것이 소비기회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가족 부양의 문화적 보험보다 정확하게 돈으로 환산되는 보험상품을 선호한다. 현재는 소수의 현실이지만 절대다수의 욕망이기도 한 ‘돈으로 해결되는 삶의 패전처리 비용’. 고령화를 염려하고 사회복지를 제안하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이 욕망이 배경음으로 깔려 있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는 ‘완숙함’이 노인의 개인적 욕구를 감금하듯 사회복지 시설이 사회격리 시설로 낙착될 공산이 크다.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 노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남재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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