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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노블레스 오블리제: 누가 진정 나를 위해 애쓰고 있는가? 2007-05-08

어디 누구에게든 전화를 받을 수 있고, 걸 수 있습니다. 손에 작은 요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맘 만 먹으면 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서 수십가지 신문을 읽고 스크랩해 둘 수 있습니다. 하늘에 대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대답도 걸지게 돌아 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추운 걱정, 여름이라 더운 걱정하지 않고 저녁 무렵 느긋히 밥상을 치우고 여유있게 앉아 텔레비젼을 봅니다. 걱정은 늘어가는 뱃살 뿐인가 합니다.





이런 사정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요즘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800만의 사람들이 정부가 정한 생계비에 미치지 못해 하루 하루를 죽지 못해 삽니다. 그보다 조금 낫다해서 차상위 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별반 사정은 나을 것이 없지만 그들은 알량한 생계비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합니다.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의 숫자가 1,500만 명에 달합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주택보급율이 100%가 넘어 가구당 한 집 이상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나라에는 자기 집이 없어 세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45%입니다. 몇억 씩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셋집에 사는 사람을 포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 셋집에 사는 사람들이 나라 전체 가구의 절반에 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손전화, 자동차, 인터넷이 모두가 누리는 안락함이 아니란 게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십억 넘는 집에서 또 다른 집 한 채를 꿈꾸며, 뱃살을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안락할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왜나햐면, 갈곳 없어진 이들은 당연히 어딘가 양지를 찾아 주의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러를 막는 것은 무기와 위협이 아니라 진정한 나눔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설쳐대는 대 테러리스트 부시나 블레어는 이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짐했던 평안한 세계는 결코 군대의 총구로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 불만과 위화감에 찌들린 다른 한 쪽의 사람들이 춥고 배고프게 살고 있는 한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란 없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건너편에 구룡마을이 존재 하는 한, 아무리 경비업체가 안전을 과장한다 한들 타워 팰리스 부자들로서는 평안한 밤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지요. 몇겹의 경비 초소를 거치는 동안 배달시킨 짜장면이 불어터져 불만이라며, 한편으로 그래서 안심하고 산다던 그들이 언제인가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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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가졌으면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그만 깔아 뭉개라.



사망자가 천여명에 부상자가 오백여명을 육박하는 이라크의 대 참사 현장사진이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참으로 기막히고 가슴 아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였을까, 그는. 자살공격 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그는. 그리고 그는 알았을까. 그의 말 한마디가 그리도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줄을. 아마 몰랐으니까 외쳤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알고도 그랬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긍극적으로 죄는 그에게 있는게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결국 죄는 전쟁에 있음을.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 전쟁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기뿐 아니라 공포가 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말하기도 끔찍한 ‘압살’에 얽힌 이야기를 나는 최초로 아버지한테 들었다. 서울로 돈 벌러간 아버지는 명절에 집에 오면 언제나, 그 이야기를 했다. 고향에 오기 위해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서울 기차역에서 압사당할 뻔한 이야기. 나도 언젠가 우리 아버지처럼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추석을 맞아 시골집에 가려다가 터미널에서 압사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명절만큼은 고향의 부모 형제 처자식 곁에서 쇠리라, 하는 굳은 각오로 드디어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얼마나 가슴 졸이고 그리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처럼 가족 곁에서 명절을 쇠야만 한다는 굳은 각오가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압사당할뻔한 터미널을 엉엉 울면서 빠져 나와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단순히 고향에 못가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악착같은 삶의 의지는 때로 또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압사에의 공포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거였다. 가난해서 오는 무질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한쪽으로 우르르 달려나간다. 살기 위해 달려간 그 길 위에서 그러나 누군가는 밟혀 죽는다. 대부분 힘없는 사람들이다. 안전지대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민중들은 죽음에의 공포로 인해서 무질서할 수밖에 없으며 그 무질서가 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가난한 그들을 위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우대의 관습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위태한 삶이 언제든지 ‘압사’당할 수도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 앞에 그래도 어떡하든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느다란 희망 하나 붙잡고 사는 가난한 작가인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통곡할 수밖 없다. 터미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주인 잃은 신발들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이라크의 참사 앞에서 또다시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압사당할 수도 있는 현실은 그러나 이라크에만 있는게 아니다. 한 시대 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시대에 ‘누군가’가 외치는 한마디에 또 ‘누군가들’은 순식간에 그 삶이 천길 낭떠러지로 내몰릴 수도 있음을 그 ‘누군가’는 아는가.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군가들은 또 누구들인가. 내게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에 시비거는 사람들이다. 또 당연히 누군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의 방(집) 한칸’을 구하지 못해 그 삶이 때로는 죽음의 공포까지를 늘 동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집없는 사람들이다. 집없는 사람들은, 혹은 은행에서 돈 빌려 겨우겨우 내집이라고 장만해놓고 하루하루 그 은행빚 갚느라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때로는 물어뜯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언론,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부자신문들이 외치는 소리에 겁먹는 자신들의 정부에 또다시 공포를 느낀다. 희망이 꺼져가는 공포, 이윽고 닥쳐올 불안한 삶이 필시 가져다 줄 혼란에의 공포.



그러나 언제나,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또 언제나 부자들 편을 들고 있는 부자신문들은 집이 없거나 빚으로 산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게 해주고자 하는 정책이 발표되면 혹은 발표될 낌새가 보이기라도 하면 ‘국민적 혼란’을 들먹인다. 나는 그들이 국민적 혼란 운운하면 그 말속에서 ‘숨겨진 회심의 미소’을 본다. 국민적 혼란이라는 명백히 실체가 없는 혼란을 혼란이라고 기정사실화 시켜놓고 돌아서는 그들의 뒤에서 결국 그 생이 압사당하는 것은 언제나 집이 없거나 집이 있어도 그 집 때문에 인고의 세월을 살아내야하는 슬픈 사람들이다.



이라크 정부는 자살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범인에 대한 추적에 착수했다고 한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들 삶이 왜 이다지도 힘들어야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 힘들게 한 ‘범인’은 누구인가. 이라크에서의 범인은 다름아닌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면, 지금 이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먹고 입는 것 넘쳐 나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도시서민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명백히 집문제다. 누구에게는 집이 휴식과 안락과 풍요와 부를 주지만 누구에게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니, 정부의 그나마도 ‘잔뜩 주눅든 정책 발표’에 대해 ‘선의의 피해자’니 하는 말따위 그렇게 함부로 할 것이 못된다.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의의 피해자 너머에는 당신들의 그 한마디에 집 문제로 생 자체가 압사당할 것 같은 공포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1.6%에 왕따를 가했다’란 말 따위 그렇게 함부로 외치는 게 아니다. 알고도 그런다면 당신들은 1.6%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땅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더욱더 가난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공선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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