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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소아에서 노망으로 직행? - 남재희 2007-11-12

아무나 나이 든다고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소아처럼 평생을 살다가 갑자기 노망으로 마무리를 하는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더라도 상당수는 나이 만 든 채 나이값 못하는 중늙은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삼송의 이거니씨, 현다이의 정멍구씨나 투산의 바굥송씨가 대표적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 정리하고 돌아가서 그동안 했던 일로 심판받을 날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인데도 정신 못차리고 돈 다발 끌어안고, 다 큰 자식 보듬기에 팔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쪽이라는 찬사 들었던 사람 하나는 늘그막에 변절자가 되어 뭇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듭니다.그만했으면 되었지 대체 무슨 영화를 더 보려고?



그나저나 그마저 챙기지 못한 장삼이사 노인들은 그저 밥이나 먹고 살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태산을 쌓습니다.

이제 자식에 노년을 기대는 사람은 팔불출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신 차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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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 깊어지는 고령화 시대



20대 때, 나이 마흔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한 어른은 적어도 수영장 물에 은밀히 방뇨를 한다든가, 중국집에서 자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한다든가,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친구의 섹시한 여자친구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준다든가, <뉴스위크> 밑에 <펜트하우스> 펼쳐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든가…. 적어도 이런 짓은 안할 줄 알았다.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어 섰으니 물론 이런 짓은 안 한다. 소년적인 치기를 다 잃어버린 지금은 그보다 더한 짓은 해도 그런 짓은 못한다. 그런 짓 할 체력도, 마음의 공터도 없다.



그러면 나는 어른인가? 자문해 본다. 요상하다. 지금은 여기에 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냥 ‘40대’라고 하면 족할 것 같다. 아무래도 ‘어른’이라는 단어는 순진한 아동들 군기잡기 위해 만든, 애초에 명확한 지시 대상이 없는 허사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아마도 그때 어른은 격정에 휘둘리고 방황에 지친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혼돈과 불안이 말끔히 가신 온전한 이성적 인간의 이미지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은 온전한 이성적 인간이 되겠다는 싸가지 없는 꿈은 안 꾼다. 공자 같은 성인도 40에야 겨우 방황을 종식하고(不惑), 10년을 바른생활 한 다음에 이게 팔자거니 운명을 받아들이고(知天命), 그렇게 하고도 정년퇴직 연령인 60이 되어서야 ‘화장실 간 사이 누가 씹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놓았다지 않는가? 공자보다 더 속세를 멀리 한 노자 선생도 나이 60이 넘어서야 육체의 휘둘림에서 자유로워졌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물 맑은 산천에서 유기농 식단을 접하면서 평생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들이 이럴진대, 아황산가스와 자동차 경적과 상품의 스펙터클에 모든 감각을 점령당한 채 ‘축적’과 ‘승진’을 위한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있는 범인들에게 인간적 성숙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사태라면 65살이 되어 ‘노인’으로 분류되는 그 순간에도 젓갈처럼 곰삭은 노년의 숙성은 기대난망이지 않을까? 숙성은커녕 곰팡이 슬어 상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완숙함’이란 올가미에 노인의 욕구는 감금됐듯, 사회복지 제안하는 뒤편에는 “삶의 패전처리 돈으로 하자”는 미봉책...그러다 보니...복지시설은 격리시설 되기 쉽다...



나이 든다는 것이 보장해 주는 것은 육체가 시든다는 것밖에 없다. 늙음은 생물학적 노화현상일 뿐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삶의 조건에 관한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서사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이 들어가는 것에 사회적 환타지를 투사해 노년을 삶의 완숙기로 설정한다. 이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실재로 노인이란 존재는 쇠약한 육체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연장선에 있을 뿐인 존재다. 젊은 시절의 악덕과 미덕은 좀체 변하지 않으며, 쇠락한 신체는 악덕에만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알면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외면함으로써 노화의 공포를 잊으려는 심산일 게다. 사회가 노인에 부과한 완숙한 삶의 이미지는 이 지점에서 싹튼다. 완숙한 정신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퇴락한 육체를 시야 밖으로 감금시키기 위한 것. 영화 ‘죽어도 좋아’에서 노인의 정사 장면이 그토록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노년의 품위를 손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루한 육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노화의 물증을 지우고자하는 이 본능적 태도는 이윤추구 동기와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1인분의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의 존재는 노동 생산성을 쥐어짜야 하는 경쟁사회에서 장애물이다. 여전히 ‘영점 몇’ 인분의 노동력이 있지만 노동력 제로의 존재로 폐기돼야 하는 운명이다. 경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소비욕구 또한 없는 것으로 전제돼야 한다.(자식들이 안기는 선물에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이 노인의 배역이지 다이아몬든 반지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노인의 역할이 아니다. 노인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조준하는 것은 그들의 소비욕구가 아니라 도리를 다 한다는 자식들의 자기만족이다.)



소비욕구가 없다는 것은 감각적 갈망이 없다는 것,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정신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노인은 육체를 거세당한 정신으로 박제돼 우리 삶의 원경으로 배치된다. 거세당한 ‘영점 몇 인분’의 인간적 욕구는 오로지 자식들과의 관계를 통해 부분적으로 해소된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노인은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한다. 10년 새 세배나 늘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혼자 사는 노인일수록 자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노인은 자연적 약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가족의 정서적 보살핌과 사회의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현세대 노인들은 가족에 의한 부양이 사회복지 제도로 대체되는 초입에서 그 어느 쪽 혜택도 못 받는 사람들이다.



전통적인 노후보험인 자식 양육은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들 노인의 자식은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면서 노인을 봉양하고 생활의 전 영역에서 무한경쟁 중인 자식의 ‘전비’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 삼중고를 안은 가장에게 문제는 돈이다. 가족은 아슬아슬 돈으로 봉합돼 있고 사소한 결핍에도 그 실밥은 터진다. 하지만 삼중 비용을 감당할 절대액수를 이미 확보한 사람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를 즐긴다. 이들에겐 노인 부양에 직접 적 노동 대신 돈을 투입한다는 것이 소비기회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가족 부양의 문화적 보험보다 정확하게 돈으로 환산되는 보험상품을 선호한다. 현재는 소수의 현실이지만 절대다수의 욕망이기도 한 ‘돈으로 해결되는 삶의 패전처리 비용’. 고령화를 염려하고 사회복지를 제안하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이 욕망이 배경음으로 깔려 있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는 ‘완숙함’이 노인의 개인적 욕구를 감금하듯 사회복지 시설이 사회격리 시설로 낙착될 공산이 크다. 절대고독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 노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남재희 (문학평론가)

인연이란 야생초가 아니라 가꾸어야 되는 것 2007-10-30

인연이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자라는 야생초가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공과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한 포기 난초와 같다고 합니다.



인연이라해서 마구 달리기 만 하다가는

그만 사고 나는 수도 있다 합니다.

갈 때 설 때 구분하는 제 정신이 있어야

인연도 모름지기 올곧은 인연이 되는가 합니다.



좁은 생각에 높은 하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니

그저 삼가며 살려 합니다.



평화는 사람들 마음 속에서 부터 시작되야 겠지요.

전쟁이 그렇게 시작되었듯이 말입니다.



가을엔 이런 편지를 부치고 싶습니다.

누구라도 받아 주시기를...









(작화: 이철수 화백)

한글, 정말 감사한 자랑스런 유산 2007-10-09

컴퓨터 자판을 쓰면서 느끼는 불편에 투덜대다가, 왜 한글은 이렇게 타자하는 데 번거로운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못된 자식이 부모 탓한다고 " 이왕 만드실 거, 세종대왕께서도, 타자하기 편하게 좀 해주셨으면 좋았을 걸"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 돌아서면 그 이유가 어른의 잘못이 아니라, 게으른 후손의 탓임을 곧 알게 됩니다. 남들 부지런히 암호해독하고, 연산 공부해서 컴퓨터 발명할 때, 늑장 부리다가 그 컴퓨터란 기기를 결국 구미의 IBM 같은 회사가 독점적으로 만들게 놔두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타자기 발명에 손을 놓았던 것도 후손의 죄라면 죄지요. 그러고보면 한글이 타자에 불편한 것은 어른의 탓이 아니라, 조상의 지혜를 계승해서 더욱 발전시키지 못한 우리 탓이란 생각에 가슴이 무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손전화기의 문자 입력 방식인 "천지인" 방식에서 한글모음의 우수성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음 "ㅣ"와 'ㅡ" 둘에 다가, 점"."을 이러 저리 가져다 붙쳐 만들어가는 독창성과 편리성 말입니다.

게다가 네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초성입력이라는 방식을 사용중입니다. 즉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찾기 위해 "홍..."이렇게 입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ㅎㄱㄷ"을 입력하여 검색을 하는 게지요. 물론 아직은 초기 단계라 개선할 점이 있어 보이지만, 어쨌던 한글의 기계화 가능성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글 창제 당시부터 심사숙고하신 어른들의 흉중을 이제사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옛 모습 그대로라도 해도...1만 5천자에 가까운 한자를 입력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사는 중국이나, 요상한 글자체에 휘둘리는 일본 만 보아도 그저 간편한 입력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휴일에서 조차 제외시킨 한글날을 보내며 사뭇 죄스러운 마음입니다. 한 줄이라도 글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늦게나마 고맙고 귀한 유산을 물려주신 어른들께 존경을 꼭 표하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위한 각오를 새로이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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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문자는?



1998년부터 2002년 말까지 유네스코는 말뿐인 언어 2900여종에 가장 적합한 문자를 찾는 연구를 했는데, 여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은 문자는?



유네스코가 문맹퇴치 기여자에게 주는 상의 이름은 어떤 문자를 염두에 두고 지어졌나?



지구상 100여개의 문자 가운데 제작자 그리고 제작 원리와 이념이 정리되어 있는 유일한 문자는?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일본의 오사카시는 엑스포 기념 세계민족박물관을 지어 세계의 문자를 전시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문자는?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대학이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는?



컴퓨터 자판에서 모음은 오른손으로, 자음은 왼손으로 칠 수 있는 유일한 문자는?



이동전화의 한정된 자판을 가장 능률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디지털시대의 총아로 떠오를 문자는?



발음기관의 움직임과 작용, 음성학적 특질을 본떠 만들었으며, 음양오행의 철학적 원리와 하늘·땅·사람의 존재론적 구조를 담고 있는 문자는?



<대지〉의 작가 펄 벅이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평가했고,

〈알파베타〉의 저자 존 맨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말한 문자는?



언어학자 라이샤워 교수가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제”라고, 시카고대학의 매콜리 교수는 “10월9일이면 꼭 한국 음식을 먹으며 지낸다”며 존경심을 털어놓은 문자는?



영국 리스대학교의 제프리 샘슨 교수가, 기본글자에 획을 더해 동일 계열의 글자(ㄱ, ㄲ, ㅋ)를 만든 독창성은 어떤 문자에서도 볼 수 없다고 칭송한 문자는?



그런데, 정작 그 나라 사람들은 그 귀함과 고마움을 잘 모르는 문자는?



답: 한글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목사야 있건 없건 교회가 무슨 상관? 2007-09-27

이제는 제사 때에도 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여 일을 치루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에도 이런 일로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집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이건만...그렇습니다. 따지지 않아서 이 문제가 줄곧 우리 곁을 맴도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곰곰히 따져볼 만합니다.





다행히도... 절을 하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을 조상은덕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라 폄하하거나, 반대로 절을 하지 않고 앉아 버티는 사람들은 제사를 우상숭배의 표상이라며 백안시했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게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렇게 빙탄불상용처럼 전통적 제의의식을 놓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것이 후진적 상황이란 것을 절감하고 소위 "전도"에 나선 종교인들도 있습니다.

하기사 2천여년전, 국가정체성 확립의 절박함과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나라의 문화양식이 배어있는 유대 기독교의 교리를 문자 그대로 고집하는 것도 우습고, 국적 불분명하고, 지방마다 제각각으로 변형된 유교적 제사 양식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도 시대 착오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당분간은 서로의 태도를 존중하고 다만 조상에 대한 경의와 일가 권속의 인연에 감사하는 화합의 자리로 제사가 유지되었으면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른바 근본주의 신앙이란게 상당히 부실하고 왜곡된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사람도 많아 질 것이고, 이 나라의 제사 의례가 중국식 전통의 답습이나 무지한 조상숭배로 전락해서는 안되는 깊은 연유에 동의하는 사람도 많아지리라 봅니다. 그 때까지는 서로 입장이 다르더라도 관용과 대화의 연습장으로 제사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집안을 살피면, 외국인 부부 한 두 집 없는 집이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이 대세인 것도 지금입니다.



사람 모여 나누고 살자는 게 제의라면, 그 자리에서 화목에 걸그적 거리는 것, 바로 그것이 비례입니다. 절, 그것 신경쓰지 않으면 사실 별 것 아닙니다.

목사없는 교회, 스님없는 절이 생겨 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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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없는 새길교회 이야기



새길교회 사람들. 목사없이 교회없이 교단없이, 한국 기독교 ‘새길’ 찾아서



“오늘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이 ‘정신 나간 운전사에 조는 승객들로 가득 찬 버스와도 같다’며 혀를 차는 한 권사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아직도 분단신학에 젖어 ‘레드 콤플렉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이 아무개 목사의 설교가 미치게 하지만 그래도 교회를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자신 같은 멀쩡한 평신도가 있어야 목사도 언젠가는 구원받을 날이 온다는 것이다.”(구미정 대구대 필휴먼생명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 기독교 교리 자체가 갖고 있는 독선과 배타성이 자리잡고 있다.”(류상태 전 대광고 교목실장)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문화·전통종교와 대화하고 협력하고 상호 배움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120년 전까지 우리 조상들이 진실과 사랑을 담아 지켜왔고, 살아왔던 가치들과 사람들을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매도하는 집단이기주의로 어떻게 이 땅에서 사랑 받기를 기대한단 말인가.”(김경재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 교수)



“교회가 세상 가치에 노예화되었고, 교회가 세상 방식에 예속화되었다.”(박정신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성직자·평신도 위계 없애고, 소유욕 없애려 건물 안짓고, 교권 얽매이지 않으려 무소속

한완상 총재 등 말씀 증거. 인권·민주화운동 핍박받는 자에 헌금의 무려 65% ‘선교의 봉사’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강남청소년수련관 강당. 새길교회 창립 18돌 기념으로 마련된 ‘한국 기독교,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정기포럼이었다. 새길교회는 예배당이 따로 없고, 주일엔 이곳을 빌려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주일인 이날 이곳은 교회다. 교회 안 발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발제자들은 한국 교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새길교회 교인을 비롯한 200여 명의 방청객들이 가세한 토론까지 3시간 넘게 팽팽한 긴장감과 열기가 함께했다.



새길교회는 3가지가 없는 교회다. 목사가 없고, 교회 건물이 없고, 교단이 없다. 목사를 두지 않는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구조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교회 건물을 가지지 않은 것은 소유와 욕망을 놓겠다는 의지다.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것은 교권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장로나 집사도 없이 사무실에 상근 간사 한 명만이 있는 이 교회에선 운영위원회가 운영을 맡는다. 설교를 하는 ‘말씀 증거자’는 1987년 이 교회 설립을 주도했던 한완상 대한적십자사총재와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비롯해 최만자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권진관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차옥숭 한일장신대 교수다. 한 명 한 명이 기독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을 지닌 인물들이다.



길 교수는 이사장을, 최만자씨가 원장을 맡고 있다. 길 교수는 올 초 벨지움으로 교환교수로 떠났지만 교회 운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교회는 한두 사람이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180여명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새길교회는 헌금의 무려 65%를 선교와 봉사에 사용한다. 이곳의 선교란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그런 식이 아니다.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탄압받고 고생하는 이들을 돕는 일의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선교라고 믿고 있다. 한 달에 한번씩은 교인 30~40명이 외국인노동자들을 찾아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매년 봄 여름 신학강좌를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등 수준 높은 강좌를 해온 새길교회는 4월 3일부터 10주 동안 일요일마다 ‘현대사회의 예수 찾기’ 강좌를 펼친다. 비록 빌린 강당이지만 교인들의 눈엔 드디어 길을 찾았다는 자족감이 감돌고 있다.



조연현 기자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20/2005/03/009100020200503091827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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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광성교회 정성진목사



목사 한사람 자기포기 선언 민주적 목회철학 몸소 개척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4동 밤가시마을. 국립 암센터에서 1㎞ 정도 떨어진 큰 길가에 일산 광성교회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주택가로 200미터쯤 들어가면 정성진 목사(50)의 사무실이 있다.



‘我死敎會生’(아사교회생)



‘교회가 살려면 목사가 죽어야 한다’는 편액이 눈에 띈다. 1997년 이 교회를 설립할 때부터 작정한 자기포기선언이다.



그는 대형교회인 광성교회 출신이다. 봉천제일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92년 광성교회로 옮긴 그는 4년 동안 김창인 담임목사의 개인비서를 했다. 광성교회는 서울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이고, 김 목사는 그런 교회를 설립해 키워낼 만큼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 그러나 많은 대형교회들처럼 담임 목사 1인 중심의 리더십의 그늘 또한 짙었다.



목사·장로 65살 정년제, 대소사는 모든신도가 모여 결정

50여개 강좌 비신도에게 개방, 3분내 발언등 민주적 회의 방식

무료병원 대안학교등 갖춘 새 보금자리위해 매일 기도



속담에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 목사는 ‘모시던’ 김 목사의 본받을 점과 극복해야 할 점을 분명히했다. 김 목사의 역동적인 설교와 일에 대한 열정, 의리는 본받으러 애썼다. 하지만 독재적 리더십은 단절하리라 다짐했다.

그는 김 목사의 도움으로 일산 광성교회를 개척했지만 서울 광성교회와는 다른 목회철학으로 내세웠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조화 △민주의식의 완성 등이다.

그는 목사 정년도 교단 정년보다도 5년 앞당겨 65살이 되면 목사는 교회를 완전히 떠나도록 했다. 장로의 65살 은퇴 규정도 만들었다. 권한 집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교회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재직회도 장로, 권사, 집사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참석하도록 예배 중에 한다.



특히 그는 아예 재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는 한 달에 280만원의 월급과 60만원의 활동비만을 받는다. 그 외엔 상여금도 차량 유지비도 없다. 반면 정 목사 부부는 매달 200여만 원씩을 교회에 헌금한다. 그는 세미나와 강의료 수입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일산광성교회는 파주노인복지관을 잘 운영하고, 무려 50여개의 강좌를 비신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개방하고, 신자들이 등산, 농구, 탁구, 바둑 등 11개의 동아리별로 모여 즐기는 것도 독특하지만 이 교회만의 특징은 민주적인 방식이다.

회의 때 이 교회만의 금지규정이 있다.

△3분 이상 발언 △인신공격성 발언 △거듭 발언 △3회 이상의 찬반 토론(다음은 표결하든지 폐기) △안건을 상정자의 발언이다.



이 교회는 신자들이 급격히 늘어나 지금 새 교회를 신축중이다. 일산 외곽의 무려 3500여 평에 짓고 있다. 이곳엔 무료 병원과 무료 약국뿐 아니라 미용실, 양재실, 제과제빵실, 헬스시설, 대안학교까지 갖춘다. 건축비는 250억원. 100억원의 빚이 남을 예정이지만 그는 걱정이 없다고 한다. “내 것이면 걱정에 잠이 안 오겠지만, 내 것이 아니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전 집을 판 돈 1억5천만 원을 교회 헌금으로 내놓았다. 그는 ‘무소유’는 법정 스님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좀 더 행복하고 평안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1인의 자기 포기로 교회는 풍성해지고, 목사는 더욱 자유스럽다.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2007-09-08

천년 만년 살 것 같아도,

이 비 그치고 나면 가을 한 걸음 다가설 것입니다.

그렇게 막은 가까워 집니다.

참, 인생 뭐 그리 대단한 것 없습니다.



삼순이가 되었던,

이거니가 되었던

똑같이 오늘도 먹고, 싸고,

그리고 피곤한 몸을 눕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소가 반성으로

반성이 성찰로 바뀌고

그런 우스운 삶에서 비로소 의미를 찾게 되면

이풍진 세상 한번 살았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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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박홍규(영남대 교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비판과 성찰에서 자유의 웃음을 보다.



절대진리 부정한 회의주의자, 몽테뉴의 '에세' 40년 함께하며

마음에 닿은 '내 이야기' 에 새롭게 겹쳐쓴 또다른 '에세'.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문고본 시리즈 이름은 ‘크세주’다. ‘크세주’ 문고는 1941년 첫 출간 이래 지금까지 3600종이 나온 이 나라 최대의 문고본이다. 간결한 3형식의 프랑스어 의문문인 이 문고본 이름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인데, 이 질문의 지성사적 뿌리는 미셸 드 몽테뉴(1533~1592)에게 닿아 있다. 근대 프랑스의 문학과 사상의 비조로 꼽히는 몽테뉴는 평생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반성적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 몽테뉴가 남긴 대표작이 우리에게 ‘수상록’이란 번역어로 알려진 <에세>다. 1572년 공적 생활에서 스스로 은퇴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집필한 방대한 저작이 이 책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외진 마을 몽테뉴 성의 좁다란 3층 서재에서 정치·사회·문화·종교 따위 세상의 온갖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찬찬히 음미할 때 그가 사유의 원칙으로 삼은 것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였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쓴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는 이 르네상스 지식인의 삶이 통째로 스며 있는 저작을 마치 산책하듯 읽으며 쓴 책이다.



중학교 시절 처음 이 책을 접한 뒤 40년 동안 여러 번 통독했다는 지은이는 <에세>의 수많은 문단 가운데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을 살펴 읽고 거기에 자기의 생각을 포개 놓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에세’이며, <에세>위에 겹쳐쓴 ‘에세’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에세’라는 말은 ‘가벼운 수필’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말의 본디 뜻은 ‘시도’ 또는 ‘시론’으로 옮겨진다. 이 세계와 자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론의 형식으로 풀어놓은 것인 셈이다.



지은이는 몽테뉴의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웃음’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몽테뉴는 웃는다. 세상에 대해 웃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웃는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쓴 맛이 감돈다.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그는 ‘크세주’의 정신에 따라 회의주의자의 자세로 이 세상과 마주본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모든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비판적으로 들춰보는 것이다. 그 비판성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면 성찰성이 된다. 그는 자신이 독단에 빠지지 않는지 끊임없이 돌아본다. 그런 자기비판의 자세로 들여다본 그 자신은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다. “수줍음이 많으면서 건방지고, 정숙하면서 음탕하고, 박식하면서 무식하고, 거짓말쟁이이면서 정직하고, 관대하면서 인색하고, 구두쇠이면서 낭비가”인 것이 그가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 자신의 모습이다. 지은이는 몽테뉴의 이 고백을 읽으며, “바로 내 이야기다”라고 덧붙인다.



<에세> 속에서 몽테뉴는 그 비판성과 성찰성으로 “당대의 모든 지적 권위를 부정한 자유로운 지성”으로 나타난다. 그 ‘자유로운 지성’이 어느 정도 선구적이었는지는 그가 유럽인의 식민지 침략을 비판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한 데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그는 근대 유럽 최초로 서양중심주의에 반대한 문화상대주의자였다. 일본의 작가 홋타 요시에는 몽테뉴 전기에서 이런 모습을 높이 사 그를 ‘위대한 교양인’이라고 불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3/2004/10/009100003200410151759408.html

노블레스 오블리제: 누가 진정 나를 위해 애쓰고 있는가? 2007-05-08

어디 누구에게든 전화를 받을 수 있고, 걸 수 있습니다. 손에 작은 요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든 맘 만 먹으면 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서 수십가지 신문을 읽고 스크랩해 둘 수 있습니다. 하늘에 대고 궁금한 것을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대답도 걸지게 돌아 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라 추운 걱정, 여름이라 더운 걱정하지 않고 저녁 무렵 느긋히 밥상을 치우고 여유있게 앉아 텔레비젼을 봅니다. 걱정은 늘어가는 뱃살 뿐인가 합니다.





이런 사정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요즘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800만의 사람들이 정부가 정한 생계비에 미치지 못해 하루 하루를 죽지 못해 삽니다. 그보다 조금 낫다해서 차상위 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별반 사정은 나을 것이 없지만 그들은 알량한 생계비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합니다. 이 두 계층의 사람들의 숫자가 1,500만 명에 달합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주택보급율이 100%가 넘어 가구당 한 집 이상이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나라에는 자기 집이 없어 세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45%입니다. 몇억 씩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셋집에 사는 사람을 포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돈이 없어 셋집에 사는 사람들이 나라 전체 가구의 절반에 가깝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손전화, 자동차, 인터넷이 모두가 누리는 안락함이 아니란 게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십억 넘는 집에서 또 다른 집 한 채를 꿈꾸며, 뱃살을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정말로 안락할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왜나햐면, 갈곳 없어진 이들은 당연히 어딘가 양지를 찾아 주의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테러를 막는 것은 무기와 위협이 아니라 진정한 나눔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설쳐대는 대 테러리스트 부시나 블레어는 이미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짐했던 평안한 세계는 결코 군대의 총구로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 불만과 위화감에 찌들린 다른 한 쪽의 사람들이 춥고 배고프게 살고 있는 한 테러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란 없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건너편에 구룡마을이 존재 하는 한, 아무리 경비업체가 안전을 과장한다 한들 타워 팰리스 부자들로서는 평안한 밤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게지요. 몇겹의 경비 초소를 거치는 동안 배달시킨 짜장면이 불어터져 불만이라며, 한편으로 그래서 안심하고 산다던 그들이 언제인가 날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번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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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가졌으면 이제 가난한 사람들을 그만 깔아 뭉개라.



사망자가 천여명에 부상자가 오백여명을 육박하는 이라크의 대 참사 현장사진이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참으로 기막히고 가슴 아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였을까, 그는. 자살공격 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그는. 그리고 그는 알았을까. 그의 말 한마디가 그리도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줄을. 아마 몰랐으니까 외쳤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알고도 그랬다면 그는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긍극적으로 죄는 그에게 있는게 아님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결국 죄는 전쟁에 있음을.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 전쟁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무기뿐 아니라 공포가 될 수도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말하기도 끔찍한 ‘압살’에 얽힌 이야기를 나는 최초로 아버지한테 들었다. 서울로 돈 벌러간 아버지는 명절에 집에 오면 언제나, 그 이야기를 했다. 고향에 오기 위해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서울 기차역에서 압사당할 뻔한 이야기. 나도 언젠가 우리 아버지처럼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추석을 맞아 시골집에 가려다가 터미널에서 압사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명절만큼은 고향의 부모 형제 처자식 곁에서 쇠리라, 하는 굳은 각오로 드디어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얼마나 가슴 졸이고 그리고 슬펐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처럼 가족 곁에서 명절을 쇠야만 한다는 굳은 각오가 없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압사당할뻔한 터미널을 엉엉 울면서 빠져 나와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단순히 고향에 못가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악착같은 삶의 의지는 때로 또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압사에의 공포로 몰아 넣을 수도 있는 거였다. 가난해서 오는 무질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한쪽으로 우르르 달려나간다. 살기 위해 달려간 그 길 위에서 그러나 누군가는 밟혀 죽는다. 대부분 힘없는 사람들이다. 안전지대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민중들은 죽음에의 공포로 인해서 무질서할 수밖에 없으며 그 무질서가 또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인해, 가난한 그들을 위하지 않는 제도로 인해,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우대의 관습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위태한 삶이 언제든지 ‘압사’당할 수도 있다는 명명백백한 사실 앞에 그래도 어떡하든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가느다란 희망 하나 붙잡고 사는 가난한 작가인 나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통곡할 수밖 없다. 터미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주인 잃은 신발들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이라크의 참사 앞에서 또다시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나 압사당할 수도 있는 현실은 그러나 이라크에만 있는게 아니다. 한 시대 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시대에 ‘누군가’가 외치는 한마디에 또 ‘누군가들’은 순식간에 그 삶이 천길 낭떠러지로 내몰릴 수도 있음을 그 ‘누군가’는 아는가.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리고 누군가들은 또 누구들인가. 내게 누군가는 다름 아닌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에 시비거는 사람들이다. 또 당연히 누군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의 방(집) 한칸’을 구하지 못해 그 삶이 때로는 죽음의 공포까지를 늘 동반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집없는 사람들이다. 집없는 사람들은, 혹은 은행에서 돈 빌려 겨우겨우 내집이라고 장만해놓고 하루하루 그 은행빚 갚느라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때로는 물어뜯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위협도 서슴지 않는 언론,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한, 부자신문들이 외치는 소리에 겁먹는 자신들의 정부에 또다시 공포를 느낀다. 희망이 꺼져가는 공포, 이윽고 닥쳐올 불안한 삶이 필시 가져다 줄 혼란에의 공포.



그러나 언제나,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리고 또 언제나 부자들 편을 들고 있는 부자신문들은 집이 없거나 빚으로 산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게 해주고자 하는 정책이 발표되면 혹은 발표될 낌새가 보이기라도 하면 ‘국민적 혼란’을 들먹인다. 나는 그들이 국민적 혼란 운운하면 그 말속에서 ‘숨겨진 회심의 미소’을 본다. 국민적 혼란이라는 명백히 실체가 없는 혼란을 혼란이라고 기정사실화 시켜놓고 돌아서는 그들의 뒤에서 결국 그 생이 압사당하는 것은 언제나 집이 없거나 집이 있어도 그 집 때문에 인고의 세월을 살아내야하는 슬픈 사람들이다.



이라크 정부는 자살테러범이 있다고 외친 범인에 대한 추적에 착수했다고 한다. 지금 이땅에서 우리들 삶이 왜 이다지도 힘들어야 하는가 라고 물었을 때, 그 힘들게 한 ‘범인’은 누구인가. 이라크에서의 범인은 다름아닌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라고 한다면, 지금 이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먹고 입는 것 넘쳐 나는 요즘같은 세상에서 대부분의 도시서민들이 가장 고통받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명백히 집문제다. 누구에게는 집이 휴식과 안락과 풍요와 부를 주지만 누구에게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니, 정부의 그나마도 ‘잔뜩 주눅든 정책 발표’에 대해 ‘선의의 피해자’니 하는 말따위 그렇게 함부로 할 것이 못된다.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의의 피해자 너머에는 당신들의 그 한마디에 집 문제로 생 자체가 압사당할 것 같은 공포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1.6%에 왕따를 가했다’란 말 따위 그렇게 함부로 외치는 게 아니다. 알고도 그런다면 당신들은 1.6%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땅에서 가난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더욱더 가난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범인은 누구인가. 공선옥/소설가

다시 읽는 접시꽃 당신...도종환 2004-08-18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마음을 못잊는 분을 위해 시 몇 편을 되새깁니다.

사람 사랑에 서툴렀던 못난 이들 대신 고개를 조아리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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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을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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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편지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 달 두 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 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이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 자리로 바람이 가득가

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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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이 오면



아무도 오지 않는 산 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림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데없

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 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가리

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쪽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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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난 뒤로는



당신이 떠난 뒤로는

빗줄기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내리고

밤별도 당신으로 인해 머리 위를 떠 흐르고

풀벌레도 당신으로 인해 내게 와 울었다



당신 때문에 여름꽃이 한없이 발끝에 지고

당신 때문에 산맥들도 강물 곁에 쓰러져 눕고

당신 때문에 가을 빗발이 눈자위에 젖고

당신 때문에 눈발이 치고 겨울이 왔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남은 자의 편이 되어

떠나는 것이다 떠나야 한다 속살대지만

나 하나는 당신 편에 오래오래 있고 싶었다



이 세상 많은 이를 남기고 당신 홀로 떠난 뒤론

새 한 마리 내게는 예사로이 날지 않고

구름 한 덩이 예사로이 하늘 질러 가지 않고

바람 한 줄기 내게는 그냥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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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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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리 비록 개울처럼 어우러져 흐르다 뿔뿔이 흩어졌어도

우리 비록 돌처럼 여기저기 버려져 말없이 살고 있어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으나 어딘가 꼭 살아 있을

당신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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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를 거두며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

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

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

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

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

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

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

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

니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

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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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앞에서... 눈을 뜨고 기도하라 (문한별) 2005-11-03

일요일이면 이 땅의 곳곳에서는 찬양과 기도가 넘칩니다.

눈을 감은 채...



그러나 세상 곳곳에는 오늘도 전투가 계속 중이고

피가 튑니다.



그 중에 한 곳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의 기도 제목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라크.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르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뽑았던 지도자는 신이 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들렀다고도 했습니다.



철모르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과연 어떤 곳에

무엇을 하러 와 있는지도 잊은 채

박수를 쳐대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쾡한 눈자위에 번져났습니다.



누가 저들에게 총을 쥐어 주는가?



저녁 마련 들어서는

내 아이의 어깨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정말 못된 부모가 되었습니다.



아, 나는 이라크에 내 자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녁밥은 어쩐지 돌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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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기도하라



당신은 기도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무고한 주검들이 나뒹구는데

눈감고 기도할 마음이 나는가?



당신은 찬양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비명소리 하늘을 찌르는데

화음맞춰 찬양할 마음이 나는가?



야만의 시대에

눈 감고 기도하는 건 비겁이다. 기만이다.



불의한 시대에

화음으로 찬양하는 건 동조다. 묵인이다.



그대여, 기도하려거든

차라리 눈을 떠라.

죽어가는 형제 자매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대여 찬양하려거든

차라리 외론 목소리로 진혼가를 불러라.

저기 당신의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문한별 (언론인권센터 대외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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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똑바로 보라



악의 평범성.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내뱉은 말이다. “아이히만의 과거 행적들은 소름끼쳤다. 그러나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실존 인물로서의 그는 일상적이며 평범할 뿐 악마 같지도 않고 기이하지도 않다.” 재판관들은 악행의 근본 동기들을 찾으려 했지만, 아이히만에게는 악의적 동기도, 이데올로기적 확신도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여기 하나가 죽은 척하고 있네.” 팔루자의 한 건물을 뒤지던 미 해병대 병사는 총을 쏴 그를 죽이기 전에 그렇게 태연하게 말했다. ‘세상에서 인간이 목격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장면.’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 사살된 사람이 그 직전까지 군인이었는지, 테러리스트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죽은 척하던 순간 그는 살고 싶은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그러나 총을 쏜 병사도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우리는 그의 선한 품성과 어려운 생계에 대해 듣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번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세계를 경악게 했던 포즈의 주인공 린다 잉글랜드 이병. 그는 시골 마을의 가난한 철도 노동자의 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우등 졸업자였고, 월마트에서는 모범직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미군에 입대한 것은 오로지 대학 진학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악마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악행은 ‘생각하지 않음’에서 나온다. 악한 생각이나 악한 판단을 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없고 판단이 없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장면들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았다고 해서 전쟁터의 병사들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가장 추악한 범죄자는 또한 가장 불쌍한 범죄자인 것을.



“불태워버려, 불태워버려, ××놈, 불태워버려.” 무어의 〈화씨 9/11〉에서 보듯, 병사들은 온갖 저주를 담은 메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거기에 몰입하며 진격한다. 그 병사들 뒤에는 누가 있는가. 팔루자로 진격하던 해병대의 한 중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우리를 공격한 적은 악마들이며 그들은 팔루자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또 누가 있는가. 신앙과 이권을 접목시킨 대통령. 그는 세계에 자신들이 박멸해야 할 악이 존재한다고 외쳐댄다.



나는 눈감고 기도하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들은 현실을 보지 않고 헛것을 보기 때문이다. 팔루자부터 백악관, 아니 한반도를 포함해서 세계 곳곳의 전쟁광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빼앗는 동시에 시선을 빼앗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려는 자가 악마로 보일 때까지 눈감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전쟁을 비디오게임이나 컴퓨터 오락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만큼이나 헛것을 보게 된다.



이라크전이 터졌을 때 13살의 소녀 샬럿 앨더브론은 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을 보라는 말로 반전 메시지를 전했다.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릿속에는 제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이건 액션영화도, 공상영화도, 비디오게임도 아닙니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우리를 놀라게 한 악마성이란 바로 그런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쟁광들은 겁쟁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겁쟁이들만이 전쟁으로 이권을 챙기는 사기꾼들에게 놀아난다. 테러에 대한 공포, 악에 대한 공포로 주눅 들었을 때 사람들은 전쟁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자. 공포로 한없이 웅크러들 때 내 안에서 악마가 자라난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의 모든 파시스트들은 겁쟁이들이며, 겁쟁이들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공동대표)

땀내는 몰라도 악취는 없기를... (이철수) 2005-02-07


살아보면...

욕심줄이고 사는 동안 만 사람입니다.

딴 생각하고 계산 많아지면 사람 아니더라고 합니다...











솔개를 매로 알았다... 한 소식

▶ ③ Clipping........옮겨온 글,그림 모음:솔개 이야기 2006-06-01



40년 쓴 헌 부리 바위에 깨고 새 부리 얻어 30년 더 살아………..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 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날로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던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과정을 수행하는 것 이다.   갱생과정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서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를 바위에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새로 돋아난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 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때로 묵은 습관과 전통을 포기할 필요도 있다.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미래가 비로소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우화경영, 정광호 ...>

초능력 기적의 실체를 <폭로> 한다. 2005-10-14

세상 거저 없다는 진리를 잊고 사는 이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지도 않은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메일을 믿고 수천만원을 송금한 사람도 있습니다.

웃고 지나면 그만이지만...



어쩌면 내 자신도 그런 허황된 꿈을 마음 속에 품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어린 백성들이 틈 만 나면 기대보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에도 그런 허망이 스며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겠지요.



그러기에 오늘도 튼실히 묵묵히 제 갈길을 가는 이들에게 작은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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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기적’ 장사꾼 실체를 알립니다



“입증되면 100만불 제공” 마술사 랜디의 폭로

“믿음이 당신을 살립니다, 찬미 예수!” 2000년 전 예수가 병자를 치유했던 기적을 오늘날에는 부흥사, 신앙치유사를 자처하는 일부 성직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시공간이 다르다는 것만 빼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폭로〉는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통해 “치유 기적을 선보이는 신앙치유사들이 사실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폭로’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1960년대 ‘어메이징 랜디’라는 별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의 마술사다. 지은이의 과감한 ‘폭로’는 마술에 대한 상세한 지식에 더해, 심령술·수맥탐사·점성술 등 모든 종류의 속임수 연기에 대한 40여 년 동안의 치밀한 조사가 있어 가능했다.



일례로, 대규모 부흥회에서 신앙치유사는 청중 가운데 한 명(지은이는 ‘희생자’라고 표현한다)을 지목해 그의 이름과 병세, 경력까지 알아맞혀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수행원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전에 알아낸 정보들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무대 뒤에서 그 관객의 아픈 부위를 손짓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일부 신앙치유사들은 신빙성을 의심하는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치유받은 환자가 실제로 심각한 병세를 앓고 있었다는 신뢰할 만한 의학적 정보가 청중들에게 공개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은이는 결론적으로, 신앙치유사들은 ...



△치료 실패의 원인을 환자의 믿음 부족에서 찾고

△과학적 치료방법을 무시하며

△단순히 돈을 벌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게 목적이라고 요약한다.



세계적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서문에 쓴 것처럼, “(랜디가) 구태의연한 신비주의와 미신이 지금까지 이어져온다는 사실보다, 이런 미신과 신비주의가 사람들을 기만하고 모욕하며 때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에 더욱 분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은이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오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침으로써 자신의 진짜 관심이 ‘폭로’가 아니라 ‘진실’임을 웅변하고 있다.



조일준iljun@hani.co.kr

부모 노릇, 신에게 물었습니다... 2004-12-08

"神과의 인터뷰"라는 글 중 일부입니다.

부모 노릇하기가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Question : "As a parent,

what are some of life's lessons you want your children to learn?"



신에게 물었습니다.

제대로된 부모 노릇을 하고는 싶은 데...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To learn they cannot make anyone love them.

All they can do is let themselves be loved."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수는 있으며,





"To learn that it is not good to compare themselves to others."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고,





"To learn to forgive by praticing forgiveness."



진정한 용서는 몸소 용서를 실천할 때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To learn that it only takes a few seconds to open profound wounds in those they love.

and it can take many years to heal them."



사랑하는 사람의 깊은 상처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것을 치료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는 것.





"To learn that a rich person is not one who has the most,

but is one who needs the least."



부자란 가장 많이 가진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To learn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them dearly,

but simply do not yet know how to express or show their feelings."



아웅다웅하는 세상 사람들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며

단지 그들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며,





"To learn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same thing

and see it differently."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라도

하는 생각은 다 다를 수 있다는 것.





"To learn that it is not enough that they forgive one another,

but they must also forgive themselves."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더 나아가서 항상 부족하기만 한 자신까지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Thank you for your time," I said humbly.



나이 생각만 하며 무지했던 부모로서 초라한 모습이 열적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그저 당신의 자식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청결이라는 이름의 차별...(김동광) 2005-08-26

땀 냄새는 이제 죄가 되었습니다.

땀이란 정직한 노동의 댓가라던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내음이란 구호는

교양있는 현대인이 되라는 새 이데올로기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찜통 더위 속에서도 양복 정장을 갖춰 입는 남성들 앞에서

여성은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분명치 않은 채 한없이 드러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이 머물 곳, 터럭이 쉴 곳은 없습니다.

가슴과 등은 끝간 데 없이 보여주지만,

정작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털과 몸냄새는 어디로 갔는지...

그러기에 사람은 없어지고, 동화 속 공주들 만이 여름철 길에 넘쳐 납니다.



이 여름 한철 등멱과 얼음 화채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여인들,

젖은 베 잠뱅이 사이로 젖 풀어내고 아이 먹이던 누이, 어머니들은 사라지고

그림자가 되어 뒷골목에서 서성일 뿐입니다.



설날, 추석이 되어서야 목욕탕를 찾았던 우리 이웃들, 아버지, 형들은

또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필자라고 해서 예전처럼 지금도 한 해에 두 세번,

설날과 추석 때나 되야 목간을 하고, 여름은 등멱으로 때우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다만 이리도 자주 씻고 닦고 ㅡ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발암물질 잔뜩 들어있는 데오도란트를 겨드랑이, 가슴팍에 뿌려대는 사회가

과연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인지 묻고 싶습니다.



추천서: 마가렛 미드 자서전, (강신표 역) '누구를 위하여 그리고 무엇때문에' , 문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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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이라는 이름의 차별...



왜 여성에게만 청결이 강요되는가… 화장실 비데 등의 기술에 숨어 있는 차별의 이데올로기



더운 날씨, 본격적인 노출의 계절.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여성은 계절 특수를 노리는 온갖 업체들의 표적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노출은 주로 여성에게 해당하는 행사이며, 거리와 해변 모두에서 노출을 둘러싼 뜨거운 경쟁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출의 증가가 성과 연관된 숱한 범죄의 증가를 수반한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여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성에게 차별적인 계절인 것 같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광고들은 계절 특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성을 집중 공략의 대상으로 삼는다. “체중 감량, 당신도 비키니를 입을 수 있다” “노출을 대비해서 체형을 관리하세요” “겨드랑이 땀냄새를 없앤다” “체모 영구 제거”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선블록” “예쁘게 태우세요, 선탠”. 이런 문구들로 뒤덮인 거리를 볼라치면 마치 사회 전체가 여성이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노출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온통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과학기술 역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충실히 복무한다. 식이요법에는 항상 “과학적”이라는 보증이 따라붙고, 햇빛을 차단하는 화장품들은 저마다 나노? ?같은 최첨단기술이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땀냄새를 기피하는 사회



사실 이런 일들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과학기술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정도가 날로 높아가고 있고, 그처럼 높은 규정력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어떻게든 첨단기술을 자사 제품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홍보하는 과정에서도 과학의 권위를 동원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업체가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다”라는 문구로 큰 성공을 거두었듯이, 오늘날 과학을 어떻게 동원하느냐는 성공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과학기술의 동원, 즉 적용 방식이 모두 고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특히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과학기술이 적용되고 발전하는 방식이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려 한다.



우리는 흔히 “여자에게 청결은 기본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고정관념이며, 여성은 자라는 과정에서 중요한 ‘성 역할’(sex role)의 하나로 청결을 몸에 익히고 스스로 행한다. 어머니들은 지저분한 아들의 방에는 관대하면서도 딸에게는 높은 기준을 적용한다. 그러다 보니 청결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강조되는 허위의식, 즉 청결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오래 전 어떤 광고에서 “여성은 청결한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를 본 기억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불결한 여성은 추하다”이다.



물론 청결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기준은 소득이 증가하면서 꾸준히 상승해왔다. 가령 얼마 전부턴가 여름철에 공공장소에서 땀냄새를 풍기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간주되고 있다. 이것은 에어컨디셔너가 보편화되어 도시 생활에서 땀을 많이 흘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면서 생겨난 또 하나의 청결 기준이다. 심훈의 소설에서는 땀냄새를 풍기는 남자 주인공에게서 건강미를 느끼는 여성 주인공의 독백이 등장하고, 60~7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 땀을 흘리고 땀냄새를 풍기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지만 90년대 이후 땀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것은 죄악은 아니더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간주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이유는 화이트칼라가 아닌 육체 노동자의 경우 여름에 땀냄새를 풍기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임에도, 특정 계층의 청결 수준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방영된 땀냄새가 나지 않은 속내의 광고는 땀냄새 풍기는 사람을 기피하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묘사했다. 더구나 여성에게는 남성보다 높은 청결 기준이 강요된다. 가령 여성이 겨드랑이 냄새를 풍기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요즈음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잘생긴 남성 앞에서 자랑스럽게 겨드랑이를 노출시키는 여성의 광고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데 앞장선다. 따라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게 청결 이데올로기는 두 겹의 짐을 지우는 셈이 된다.



노출과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 크게 유행한 화장실의 비데 역시 비슷한 경향을 나타냈다. 비데는 사회적인 청결의 기준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청결기술의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굳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도 뒷물은 오랜 전통이었다. 뒷물은 목욕탕이 없던 시절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 바가지의 물만 있으면 혼자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뒤 집안에 목욕탕이 생겨 계절을 가리지 않고 몸을 씻을 수 있게 되면서 그 용어조차 잊혀졌다.



청결 기준에 맞추려 허둥대며…



그런데 화장실이 고급화되는 과정에서 뒷물이 비데로 모습을 바꾸어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적 편향(bias)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다. 전통적인 뒷물에는 없었는데, 뒷물이 청결기술인 비데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성적 편향이 덧붙여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겠지만, 국내 대표적인 업체의 텔레비전 광고는 이 편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비데를 하지 않은 한 ‘여성’이 의자에 앉으려 하자 의자들이 도망친다. 그리고 비데를 하고 다시 온 여성의 엉덩이에는 의자들이 다투어 몰려든다. 앞에서 소개한 내의 광고에서 남자가 겨드랑이 냄새를 풍기는 여성을 피하는 모습과 동일하다. 왜 이런 광고들은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것일까? 광고를 만드는 사람이 문제일 뿐 이런 기술 자체는 여성에 대해서 어떤 편향도 갖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얼마 전 내가 하는 ‘과학기술과 사회’라는 교양수업을 듣는 한 학생이 ‘화장실 기술의 성적 편향’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얼마 전에 보도된 가짜로 물 내려가는 소리를 내는 장치에 대한 내용이었다. 유독 여자 화장실을 위해 이런 장치가 개발된 것은 여성들이 소변 보는 소리를 감추어야 한다는 편견을 강화하고 제도화한다는 것이다. 편견이 기계장치 속에 기입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청결은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고정되어 있다. 물론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의 감염을 막는다는 점에서 청결의 수준은 그 사회의 공중보건의 중요한 지표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준과 그 부과 대상이다. 요즈음 우리는 누가 세웠는지도 모르는 높은 청결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치르고 허둥대며 살아간다. 땀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바쁜 아침 시간에도 샤워를 하거나 최소한 매일 머리를 감는다. 그리고 깨끗한 셔츠를 입기 위해 세탁과 다림질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세탁과 다림질은 대개 여성들의 몫이거나 아니면 비싼 비용으로 세탁소를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여성에게 청결은 기본입니다”라는 고정관념이 더해진다. 비데는 청결에 대한 요구를 여성의 몸 깊은 곳까지 확장하는 장치인 셈이다.



과연 청결 이데올로기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기준의 끝은 어디인가?





(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http://h21.hani.co.kr/section-021021000/2004/06/0210210002004062405150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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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냄새 제거제 데오드란트서 환경호르몬 검출"

[연합뉴스 2005.08.25 09:13:20]



국.외産 제품 6종서 DBP 등 독성물질 나와(서울=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 여름철 여성이 많이 쓰는 데오드란트(deodorant촵땀냄새 제거제)에서 환경호르몬 지정물질로 생식독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프탈레이트가 검출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5일 여성환경연대에 따르면 지난달 시중에 판매되는 유명회사의 데오드란트 제품 6종(국내기업 3종,외국기업 3종)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모든 제품에서 프탈레이트 1가지 이상이 검출됐다.

이번 조사에서 검출된 프탈레이트는 DBP(디부틸 프탈레이트), DEHP(디에틸헥실 프탈레이트), DEP(디에틸 프탈레이트) 등 모두 3종이었다.



분석결과 `레세나 안티퍼스피런트 데오드란트 스틱''(유니레버코리아)에서는 DBP의 농도가 1.67㎎/㎏, DEHP가 1.41㎎/㎏, DEP가 730.34㎎/㎏으로 나타나 조사대상 6개 제품 가운데 유일하게 프탈레이트 3종이 모두 포함됐다.



`에스쁘아 퍼퓸드 데오드란트 스프레이''(태평양)는 DBP 6.98㎎/㎏과 DEHP 0.42㎎/㎏ 등 2종이 검출됐고 `리프레시 데오드란트''(비봉파인)는 DBP 5.79㎎/㎏과 DEP 0.05㎎/㎏, `니베아 데오드란트 파우데 스프레이 프레시''(니베아 서울)는 DBP 2.96㎎/㎏, DEHP 0.34㎎/㎏이 나왔다.



특히 유럽연합(EU)에서 올해부터 독성물질로 금지하고 있는 DBP와 DEHP가 모든 제품에서 검출돼 사용자의 건강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여성환경연대는 밝혔다.

이 단체는 프탈레이트가 검출된 제품을 생산한 회사 가운데 유니레버코리아와 태평양은 2년전 자사 제품에 이들 물질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는 데도 약속을 어겼다고 지적했다.

프탈레이트가 화장품에 쓰이면 기름으로 이뤄진 수분막을 형성하고 여러 성분이 잘 섞이도록 용해되는 것을 촉진해 유연성을 더하는 성질이 있는데 체내로 들어가면 생식능력을 감퇴시키고 신생아의 기형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물질이다.



여성환경연대 측은 "프탈레이트는 미량이라도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며 "데오드란트는 매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도포하는 부위가 땀샘이 많고 습한 곳이기 때문에 다른 피부조직에 비해 유해물질 흡수도가 높다"고 우려했다.

환경호르몬이란 사람, 동물의 호르몬 움직임을 어지럽히는 유해화학물질을 일컫는 용어로 정식 명칭은 외인성 내분비 교란물질이다.





보왕삼매론: 병있는 곳에 복이 있다. 2005-05-25

병이 있는 곳에 복이 있다.

자신이 병에 걸려 안타깝거나, 또는 남의 병간호를 하는 등 보통 우리가 피하려고 만 하는 병이 옆에 와 머물 때 바로 그 때가 복을 받을 수 있는 때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통해 삶의 의욕을 보강시킨 저서가 '보왕삼매론'이다.
역경을 역경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순경으로 승화하라는 교훈이다.
역경 속에서 자기를 지키고 찾는 사람에게 복은 저절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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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따라서 병고는 양약이 된다.

2. 살아감에 있어 고난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고난이 없으면 방자해 지고 사치스러워진다. 따라서 근심과 고난을 낙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라.

3. 공부하면서 마음의 장애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쳐서 오히려 해가 된다. 그러니 장애 속에서 해탈을 구하라.

4. 수행하면서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가 없으면 결심이 굳어지지 못한다. 마는 수행을 도와 준다고 보아라.

5.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쉽게 성취하면 경솔해 진다.

6. 나의 이익을 전제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그러면 의리를 상한다. 오직 순결로 친구를 사귀어라.

7.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말라.
    그렇게 된다면 교만심이 높아진다. 나를 거역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8. 공덕을 베풀고 그 과보를 바라지 말라. 돌아올 것을 바라면 엉뚱한 뜻이 생긴다.
    오직 베푼 것은 헌신짝 처럼 버려라.

9.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지 말라. 지나친 이익은 어리석은 인간을 만든다.
    돈과 지위에 집착하면 인간은 추해지기 마련이다.

10. 억울함을 당했다고 변명하려 하지 말라.
     억울함을 따져 봐야 원망하는 마음 밖에 더 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억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을 수행의 기회라고 받아 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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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기운 조금 있어도 흔들리는 이 사람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일체유심조를 되뇌지만 여전히 마음은 멀고 가슴 만 간절합니다.

낙천적으로 살아갑시다 2006-04-09

화나고 힘들 때 이렇게 해보세요.





1, "참자" - 하고 생각해라...



감정 관리는 최초의 단계에서 성패가 좌우된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는 일단 참아야 한다.



2, "원래 그런 거"- 라고 생각하라.



예를 들어 고객이 속을 상하게 할 때는

고객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라.



3, "웃긴다" - 고 생각하라.



세상은 생각할수록 희극적 요소가 많다.

괴로울 때는 심각하게 생각할 수록

고뇌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간다.

웃긴다고 생각하며 문제를 단순화 시켜보라



4 "좋다. 까짓 것" - 이라고 생각하라.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좋다. 까짓 것" 이라고 통 크게 생각하라.

크게 마음 먹으려 들면 바다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5,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 라고 생각하라.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라.

내가 저 사람이라도 저럴 수 밖에 없을 거야~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저럴 거야~ 라고 생각하라.



6, "내가 왜 너 때문에" - 라고 생각하라.



당신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이 속을

바글바글 끓인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라.



7, "시간이 약" - 임을 확신하라.



지금의 속상한 일도 며칠 지나면,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너무 속이 상할 때는

"시간이 약" 이라는 생각으로

배짱 두둑히 생각하라



8, "새옹지마" - 라고 생각하라.



세상 만사는 마음 먹기에 달렸다.

속상한 자극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 만사 "새옹지마" 라고 생각하며

심적 자극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라.



9, "즐거웠던 순간" - 을 회상하라.



괴로운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한없이 속을 끓이게 된다.

즐거웠던 지난 일을 회상해 보라.

기분이 전환 될 수 있다



10, "눈을 감고 심호흡" - 을 하라.



괴로울 때는 조용히 눈을 감고

위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방법을 활용하면서

심호흡을 해 보라.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침을 삼키듯 "꿀꺽" 삼켜 보라.





I just can't stop loving you, (마이클 잭슨) 2005-03-14

I pray in you I'll find a love so true

When morning awakes me

Will you come and take me

I'll wait for you



내 기도속에서 사랑은 진실한 것이라고 알게 해주십시오.

아침 자리에서 눈 뜰 때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You know how I feel

I won't stop until I hear

your voice saying I do.

This thing can't go wrong

This feeling's so strong

Well, my life ain't worth living

If I can't be with you



어떤 마음으로 사람이 살아가는지 당신은 아시겠지요

사랑한다는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귀머거리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게 신실하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없다면 내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I just can't stop loving you

I just can't stop loving you

And if I stop

Then tell me just what will I do

I just can't stop loving you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없이 제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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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Just Can't Stop Loving You by Michael Jackson



마이클 잭슨의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란 노래입니다.



빌보드 차트가 아닌 Gossip란과 코미디 소재로 오르내리기에 바쁜 그를 보고 있자면,

언뜻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수야 어찌 되었건

사랑 노래는 메아리가 되어 모두에게 사랑을 불러옵니다.



하긴...

환갑 가수가 갓 서른 여인을 맞아 들여도 사랑입니다.



수백대 매로 아이를 두드려도

애비의 사랑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휘둘려도 어디 그리 사랑이 쉽게 변하던가요





신은 숨어 있는 걸까요?

50여년 전 그렇게 수 많은 사람이 절망 속에서 불렀던 때처럼 기다려 봅니다.

요즘 핏발 선 눈으로 온 세상을 몸서리치게 만들고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참회는 뒷전이고,

언감생심 땅타령까지 하고 나서는 낯 두꺼움.

주뢰를 틀던 이들에게 칼을 씌우지는 않으렵니다.



그러게 다짐합니다.

사랑없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기다리며 하루를 보내렵니다.



사랑을 믿습니다.





sgs

일어나기 싫은 날 (Garfield) 2004-11-09

정말 일어나기 싫은 날이 있지요...



그냥 그대로이고 싶은 날 말입니다.



사람은 다 같은 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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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흐...또 일어나야 할 시간이야...

== 뭐해?

-- 일어날려고...그럴려고...그러는 중이야...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였던가요...

"그래도 해는 또 다시 뜬다."

(The sun also rises.)



언젠가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날이 꼭 올텐데...

오늘 하루 감사로 시작하십시오.

인과응보의 끝 ( 토끼풀 다섯 ) 2005-11-11

♣ 동갑인 70세 노부부가

결혼 50주년을 맞았을 때

천사가 나타나 소원을 한가지씩 말하라고 했다.



할머니가 말했다. "세계일주를 하고 싶습니다."

천사가 날개를 흔들자

세계일주 패키지 상품권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천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른 살 어린 여자와 살고 싶습니다,"

천사가 날개를 흔들자

70세 할아버지가 100세 할아버지로 변했다.



♣ 한토마 양심 논객과

한토마 수구 논객이 나란히 걷고 잇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소원을 한 가지씩 말하라고 했다.



한토마 양심 논객이 말했다.

"민주. 정의. 양심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싶습니다."

천사가 날개를 흔들자

아름다운 사회에서 살 수 있는 권리증이 나왔다.



한토마 수구 논객이 말했다.

"박정희 정권 시대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천사가 날개를 흔들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살 수 있는 권리증이 나왔다.



그러자 천사는 비디오를 켜서

수구 논객이 살아가야 할 장면을 한 번에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독립투사였던 할아버지가 빨갱이로 처형 당하는 장면,

보안법 위반으로 아버지가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

교련복 입고 각반찬 채 총 메고 고교생들이 소풍가는 장면,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피해 대학생들이 도망다니는 장면,



하루18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장면.

노조집회에 참석했다가 구사대에게 죽지 않을 만큼 얻어 맞고,

정보부에 눈 가리고 끌려가 혹독하게 고문당하는 장면.

고문의 휴우증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살아가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http://bbs3.hani.co.kr/board/ns_hantoma200506/Contents.asp?Stable=ns_hantoma200506&Idx=45525&Rno=25309&rp=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에...As long as u love me... 2005-12-24

뒷골목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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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Long As You Love Me sung by Backstreet Boys



Although loneliness has always been a friend of mine.

I'm leavin' my life in your hands.



외로움이 친구처럼 늘 함께 있는 이 세상에서

이제 당신 손에 나를 맡깁니다.



People say I'm crazy and that I am blind

Risking it all in a glance.

And how you got me blind is still a mystery.



사람들이 나를 첫눈에 반해 눈멀었다 놀려대지만

그런 신비를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I can't get you out of my head.

Don't care what is written in your history

As long as you're here with me.



당신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지난 일이 뭐 어떻단 말입니까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데.



I don't care who you are

Where you're from what you did

As long as you love me.



진정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어디서 사는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데 무슨 상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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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든 만다라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그동안 적지 않았던 실망은

내 탓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을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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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런 세상...

지금이 바로 사랑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두 아이같이 첫마음으로 살 수는 없는 걸까요.



구유의 예수는 해마다 새롭게 우리를 일깨웁니다.

전생에 부모의 빚쟁이가 자식이라는 데. 2005-07-16

제페토 할아버지가 나무를 깎아 만든 피노키오.

참 속깨나 썩이던 녀석.

거짓말을 하면 자꾸만 코가 길어나던 그 나무토막.



자식은 전생에서 부모에게 꿔준 빚이 있던 빚쟁이였다고도 합니다.

그러기에 아무 때나 이리 졸라대나 봅니다.

디카폰, 해외연수, 카드, 자동차, 심지어는 집도 노래합니다.

화 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때로는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면 생각하는 부모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빚은 갚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버릇없는 아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라는 말은 아닙니다.

제대로 아이 하나 키워내야 부모가 어른 대접 받는다는 믿음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자식 하나 키우는 것은 마을 하나를 만드는 일이라 했던가요...





제페토같은 마음 품은 부모 제법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요...

부모도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부모들은 그저 자식생각 뿐인 것은 아이들은 알런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했으니, 부모 마음은 자식 낳아 보아야 안다고 하지요...



그러나 쇳소리 하나.

"튼튼한 다리, 열 효자 안 부럽다."

건강이 제일... 고금의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