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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의 나라. 2005-03-07




삼일절은 휴일치고는 좀 무엇한 날입니다.

요즘도 봄의 문턱에서 싸르르한 날씨에 눈을 퍼부었듯이, 아마 당시에도 생각은 대춘부라 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국경일은 거개가 대단한 성취를 이뤄낸 것을 기념하는 데 반해

삼일절은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온 겨레가 못당할 꼴을 겪어야 했던 그런 시련의 시작을 기억해야한다는

착잡함이 스며있기 때문인가도 합니다.



그 서러운 기억의 한 가운데 만해 한용운 선생이 우뚝 서 있습니다.

님 가신지 벌써 60성상이 넘었지만

여전히 님은 예전처럼 두 눈 부릅뜨고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누구는 선생께서 노쇠해서 생을 마치셨다고 얼버무리지만 그것은 정말 생뚱맞은 주장이고,

님은 왜인들의 식량 배급을 결연히 받지 않고 연명하시다가

결국 해방을 한 해 앞둔 그 겨울에 삼청냉돌에서 아사하셨다는 것을

송구스런 후학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찾은 조국에서

여전히 설쳐대는 매국노의 자식들이 추잡한 할애비의 검은 땅을 찾겠다고 나서더니

그에 기세한 탐관오리들까지 땅사재기로 욕을 쌓아가고 있는 이 즈음.



그 뻔뻔스런 얼굴들을 님이 예의 형안으로 뚫어지게 보고 계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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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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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님이 나신 곳, 님 나신 곳에서 이제서야 옷깃 한번 여밉니다.



번듯이 복원하여 검박한 운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누옥을 들어서면,

님은 당시 조선의 민초 거개가 그러했듯이

가난이 일상인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나라 걱정을 잊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립니다.













소를 찾고 싶었던 님의 누옥 마루에는 심우재란 현판이 고즈넉히 걸려 있고...



전대법륜.

바른 길은 멀리 있는 것 같아도

결국은 실현될 것이라는 바램이 님의 마음 속이었다고

후세들이 새긴 각오가 자리 잡았습니다.



님은 가셨어도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님이 짚어 주셨듯...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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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에서 자라야만 애국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홍성 땅은 깨우쳐 줍니다.

만해 생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습니다.



지금 보아도 번듯한 기와집이고, 당시에는 근처 인근이 모두 그 집안에서 부치던 땅이었다하니

상당한 부자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각자였습니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에 행랑채에는 그의 업적 둘이 보란듯이 잡인들에게 빛을 내고 있습니다.

자랑스레 걸린 장군의 문패와 현액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가노해방 민족춘 (家奴解放 民族春)

청산대첩 광복신 (靑山大捷 光復身)





15세 때 벌써 형안을 떠 데리고 있던 노비를 모두 풀어주어 민족의 봄을 열었던 포부,

청산리 대첩의 후련함으로 겨레의 자존심을 한껏 고양해주어 광복의 토대가 되었던 사실입니다.



어린 나이에 사람을 높낮이로 부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과감히 타파한 것도 놀랍고,

부실한 군비와 병력이었지만 중무장 일본군 3,000 여명을 골로 보낸 것이 그렇습니다.

병력과 장비 만 믿고 달겨들던 저 극악한 제국주의 왜병 삼천을 골짜기에 묻은 독립군측 피해는 전사 2인이었다 합니다.

골로 보낸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연원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 우리 겨레에 행복이었다고 주장하는 대학교 접장에다,

일본군 소위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일본식 유신으로 조국을 바로 세웠다는

육사 출신 전략가의 주장을 보면서



어쩌면 이 땅에는 다시 한번 그 날이 오고

천추의 한이 맺힌 백야 장군이 재림하여

이들을 다시 한번 골로 보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일본의 밀정이 보낸 조선인 자객에게

백야 장군이 암살되었음을 우리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밀정의 후예들이 이 땅에서 횡행하도록 더 이상 방치하는 것은

살아 남은 자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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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만해선사



'돌집' 등진 북향집 그칠줄 모르고 탄 ‘님의 구국혼’



서울 성북동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달동네를 오른다. 좁디좁은 골목길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른 집이 심우장이다. 심우장은 만해가 54살에 지어 65살에 입적할 때까지 산 집이다.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만해에게 소는 무엇일까. 만해가 심우장에서 한 첫 작업은 〈유마경〉 번역이었다. 붓다 당시 유마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말을 남긴 재가 거사다. 〈유마경〉에선 붓다의 수제자 사리자를 비롯한 10대 제자들이 유마거사에게 쩔쩔맨다. 유마는 출가자도 아닌 재가자의 몸이었지만, 이미 ‘자타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의 ‘대승(불교)’을 체화했기에 불도를 이룬 강물조차 한입에 들이마신 큰 바다였다.



금강산 건봉사에서 참선 수행해 1917년 스승 만화 선사로부터 ‘한입으로 온 바다(萬海)를 다 마셨다’고 ‘만해’라는 법호를 받은 ‘선사’였던 그는 다시 중생들의 ‘고해바다’에 뛰어들었다.





일제 앞잡이 잘못 몰려 독립군에 두번 죽을 고비. 훗날 사죄하자 “씩씩해서 맘 놨네” 격려



만해는 나라와 자유를 잃고 핍박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의 중생들의 아픔에 평생 열병을 앓았다.



만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인했으나 18살에 백담사로 출가했고, 잠시 홍성에 돌아왔다가 24살에 재입산한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만해는 젊은 시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세계지리책을 읽고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안 만해는 27살에 세계일주여행을 단행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곳에선 일제에 쫓겨 고향을 등진 대한의 청년들이 머리 깎은 사람만 보면 ‘왜놈 앞잡이인 일진회원일 것’이라며 뭇매를 때려 죽이거나 산 채로 바다에 수장했다. 만해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격투 끝에 사지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32살 때는 만주에 갔다가 다시 ‘왜놈의 첩자’로 몰려 독립군에게 총을 맞았다. 이때 맞은 여러 발의 총알이 목 부위에 박혀 있어 만해의 목은 평생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몰려 죽을 뻔한 두 시기 중간엔 일본의 은혜를 입었다. 1908년 도쿄에 조동종이 세운 대학에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공부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같은 개인적인 수난과 은혜에 의해 친일 또는 친미, 반공 등의 노선을 오갔다. 그러나 만해는 달랐다.

총을 쏜 독립군 청년이 훗날 만해를 찾아와 사죄하자 그는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씩씩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나는 이제 맘을 놓게 됐다”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는 늘 스스로 지옥의 문지기가 되기를 마다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대중 공양 도중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한일병합 소식듣고 울분 “밥이 먹어가느냐” 밥상 걷어차

민족대표 죽음 두려워하니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 똥물



서울 평창동 정토사 조실 설산(87) 스님은 만해의 제자 의산 스님의 제자다. 손상좌로서 심우장과 건봉사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곤 했던 그는 혜화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일제에 징병되자 작별인사를 드리러 심우장에 갔다. 개인적인 친밀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만해는 떠나는 손상좌를 보자 두던 바둑판을 집어던지며 “이놈아 죽지 마라”고 세 번을 울부짖었다. 스승의 말이 가슴에 박힌 청년 설산은 서울역에서 달리는 기차 바퀴에 발을 넣어버렸다. 설산 스님이 이렇게 발가락을 잘라 징병을 피하고 다시 만해에게 가서 인사드리자 만해는 “조선 사람이 살아왔다”며 기뻐 외쳤다. 설산 스님은 “할아버지(만해)는 일제에 호적조차 올리지 않아 배급조차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처지에서도 만해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평의 국유림을 불하해주겠다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총독부와 연계된 한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모두가 희망을 잃은 때에도 “보라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 않느냐”며 청년들에게 ‘희망의 햇살’을 비춰주던 만해는 ‘해방의 봄’을 한 해 앞둔 44년 열반에 들어 비쩍 마른 몸마저 꽁꽁 얼어붙은 시대의 불쏘시개로 바쳤다.



3·1운동으로 3년을 감옥에서 지낸 뒤 출옥한 직후 찾아온 한 기자에게 만해는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했다. 불교에선 스스로 지옥에 들어간 이가 있다. 모든 중생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으로 지옥문을 나서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이다. 심우장의 앞산과 마을을 바라보니 봄이 성큼 다가온 양지다.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어 북풍 눈보라를 자처한 심우장에서 양지녘 중생을 보고 미소짓는 이가 과연 누구였을까.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05100038/2005/03/0051000382005030217462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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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와 만해를 기리러 갑니다.



서해안 고속도로, 홍성 나들목을 나서...

토끼굴을 지나며 바로 좌회전하면... 29번 국도 입니다.

1Km 쯤 진행하다 서산 방조제 방향을 향해 좌회전...합니다.

5백여 미터 못가 김좌진 생가 팻말이 나오는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몇백미터 상거입니다.

(갈산면 행산리)



백야 기념관을 나서 좌회전하여 (남쪽으로) 결성면을 향합니다.

3Km 쯤 가면 용호초등학교. 우회전... 다시 1.5Km 진행하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Km 남짓 가면...표지판... 생가입니다.

결성면 용호리 잠방골.



결성면에서 정서 방향으로 새조개로 유명한 남당포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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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심우재는 만해 생가를 기려 후세인들이 부친 이름입니다. (충남 홍성. 041) 642-6716)

심우장은 만해가 만년을 보내다 유명을 달리한 곳입니다. (서울 성북 2동 279. (02) 747-8220)

심혈을 기울인 자료가 풍부한 만해 기념관은 남한산성에 있습니다. (경기 성남시. (031) 744-3100)

스님 만해 기념관은 강원도 백담사의 요사채에 있습니다. (강원 인제군 용대리. (033) 462-3224)

백담사 입구에는 만해 마을이 있습니다.(033) 462-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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